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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이념의 차이는 부부 사이도 가른다 - 루이 다비드
    미학(美學) 2020. 3. 9. 20:40


    명절 날 가족, 친인척이 만날 경우 정치 얘기는 절대 피하라고들 한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공통된 화제가 있을 리 없을 터, 본인의 안부와 주변의 안부가 한바퀴 돌아간 후에는 결국 정치 얘기가 시작된다. 그럴 경우, 좌든 우든 한쪽으로 몰리면 이 또한 더 없이 좋겠지만, 갈릴 경우에는 골치가 아프니 언성이 높아지는 일쯤은 비일비재하고, 화해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앙금이 남는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극단적으로 형제까지 갈라서는데, 이는 현실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하지만 부부가 갈라서는 경우는 못 본 것 같고, 내가 아는 예는 프랑스 화가 쟈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유일하다. 다비드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지닌 다혈질의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 페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국비 장학생으로써 겨우 이태리 유학을 마친 다비드가 돌아와 만난 파리의 부잣집 딸이었다.


    다비드는 페쿨과 1782년 결혼을 했다. 이후 그는 뒤늦게 잘 나가기 시작하니 당대의 유명한 건축업자인 그의 장인의 후광이 작용했을 것임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무능력했던 것은 절대 아니니 그 무렵에 그린 <헥토르를 애도하는 안드로마케>로 왕립학회의 회원에 추서된다.(솔직히 이때도 장인 덕을 좀 보았겠지만) 당시가 1784년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5년 전이었는데, 다비드는 왕립학회의 회원이 됨으로써 좋든 싫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 된다.



    '헥토르를 애도하는 안드로마케'

    트로아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맞서 싸우다 죽은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이야기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렸다. 1783년, 루브르 박물관



    1789년 7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브루투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을 살롱전(Le Salon)에 내건다. 그림 왼쪽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브루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인 그 브루투스가 아니라 로마 이전 이탈리아를 다스렸던 에트루리아의 왕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역모에 가담하자 사형을 내렸는데, 다비드는 핏줄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가로 4.2m, 세로 3.2m의 대형 캔바스에 실었다.  



    '브루투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

    브루투스가 사형을 내린 아들의 시신이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 중의 한 사람은 실신을 하고 한 사람은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다. 1789년, 323x422cm, 루브르 박물관



    그는 화폭에 담은 이와 같은 생각을 직접 현실에 투영하기도 했던 바, 1792년 9월 국민회의 의원에 뽑힌 다비드는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정까지는 갈등이 많았을 터, 루이 16세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 사주기도 했고, 위 <브루투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을 주문했던 곳도 사실은 왕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 마르그리트 페쿨은 다비드의 행동에 반발했다. 왕실의 도움으로 호의호식했던 그간의 정리(情理)도 정리거니와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란 그녀로서는 절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급기야 페쿨은 자신의 세 딸과 함께 집을 나가버린다.(솔직히 재력 있는 처가를 가진 것은 좋은 일이며 부러워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경우 하나는 분명히 감수해야 한다. 다름아닌 가부장권의 상실이니, 아내가 집을 나가도 끽소리 못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비드는 더욱 정치에 매달린다. 아울러 더욱 왼쪽으로 기울어 로베스페에르의 급진 자코뱅 당 쪽에 선다. 이때 그린 그림이 유명한 <마라의 죽음>이다. 마라는 다비드의 친구이자 자코뱅의 중요 당원이었는데, 어느 날 급한 전갈을 가지고 왔다는 샬롯 코르테라는 여자에게 욕조에서 칼을 맞고 죽는다. 그녀는 반대파인 지롱드 당의 열혈 지지자였다. 혁명의 과정은 이렇듯 살벌한 것이었는데, 그래도 로베스페에르가 단두대에 서게 될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듯 <사바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대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로 싸우지 말고 로베스페에르를 중심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그림이었다.



    '마라의 죽음'

    친구이자 쟈코뱅 당의 지도자였던 마라에 대한 헌사이다. 1793년, 165x128cm, 벨기에 왕립박물관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로마가 완전히 자리 잡기 전, 그들은 사비니를 칩입해 그곳 여인들의 잡아다 아내로 삼았다. 이에 몇 년 후 복수를 위해 사비니 남자들이 쳐들어 오는데 사비니의 여인들은 오히려 싸움을 말리고 나선다. 이제는 제 님편이요 아기들의 아빠가 된 로마인들을 보호핟기 위함이었다. 1799년 385X522cm, 루브르 박물관 

     

    여인과 아기가 주목되는 위 그림의 중요 부분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즈음 로베스페에르의 공포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니,(혁명이 한창인 1794년 6월에만 1,300명이 처형됐다) 혁명력인 테르미도르 월(7월) 8일, 가열찬 투쟁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 로베스페에르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를 단두대로 보냈다. 국민공회 위원들은 그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고 테르미도르 월 9일부터 사흘간 로베스페에르를 비롯한 104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른바 '테르미도르의 반동(反動)'이라 불리는 그 기간 동안 다비드는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그를 구한 것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젊은 포병 장교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정치지향적 화가 다비드는 이번에는 나폴레옹을 멋드러지게 그린다. 다비드의 아래 오른쪽 그림(<성 베르나르드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은 대불대동맹(對佛大同盟)*을 분쇄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27살 사령관의 모습을 최대한 폼나게 표현했지만, 그 실제의 모습은 방한복을 껴입고 부하들이 끄는 말에 의지한 왼쪽 그림(풀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에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1807년에는 대작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완성시켰으며, 1812년에는 <튀일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를 그렸다. 


    * 프랑스 시민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결성된 유럽 여러 국가들의 반(反) 프랑스 동맹으로, 이 동맹은 곧 나폴레옹 군대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으로 발전한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노틀담 성당에서의 대관식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렸다. 1805~7년, 621x979cm, 루브르 박물관


    중요 부분

    그림으로 보자면 나폴레옹이 아닌 황후 조세핀의 대관식 같다. 이에 주위에서는 나폴레옹의 분노를 걱정했지만 사전에 동의된 구도였다고 한다.


    '튀일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
    1812, 204x125cm, 워싱톤 D.C. 국립아트갤러리 


    나폴레옹이 좋아한 그림 '튀일리 궁 서재의 나폴레옹 황제'

    그도 그럴 것이 화가는 황제 옆에 슬쩍 '나폴레옹 법전'의 초안을 그려 넣는 센스를 보이고 있다. 새벽 2시 20분(뒤의 시계)이 되도록 법전의 초안 마련을 위해 고생하시는 황제 폐하. 이것이 다비드가 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고, 다비드는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1816년 그는 결국 네덜란드로 망명을 하는데 당시 68세의 고령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를 귀하게 대접하였으니 끊임없이 찾아오는 화가들을 맞아 한껏 원로 행세를 했고, 짬이 나면 간혹 소품을 그리거나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워털루 평원을 찾아 명상에 잠겼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등극,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는데, 이후 왕실로부터 몇 차례의 정중한 귀국 요청이 있었으나 일절 응하지 않다 망명 9년 후인 1825년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참! 집 나갔던 그의 마누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다비드가 숨어 지낼 때 찾아와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펴주었던 바, 다행히도 해피엔딩이 되었다. 그가 죽고난 후 그의 침실에서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이 발견됐다. 다비드는 1799년, 당대 최고의 미녀로서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떠오르던 쥘리에트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그렸으나 그녀가 번번히 시간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작업이 느려졌다. 그는 그림을 망명지인 벨기에로 가져갈만큼 애착을 가졌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다비드가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장식이 절제된 가구와 심플한 배경은 모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겠다는 화가의 의지를 읽게 해준다. 174x224cm, 루브르 박물관


    '소크라테스의 죽음'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 그림도 다비드의 것이다. 1789, 129.5x196.2cm, 뉴욕 매트로폴리턴 박물관


    말년의 '자화상'

    88x75cm, 1825년, 루브르 박물관


    벨기에 워털루 평원

    1815년 6월 18일, 프랑스 군과 대불대동맹 군의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기념관과 기념물이 건립됐다. 전쟁터의 흙을 쌓아 만든 원뿔형의 탑 위에 사자 조형물이 세워져 '사자의 언덕'(Butte du Lion)으로 불린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쪽 20km 지점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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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