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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파르테논미학(美學) 2020. 4. 21. 19:50
단언하거니와 완벽한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 미(美)에는 일반적 개념이 통용될 수도 있지만 주관적 기준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나 사물이라 할지라도 흔히 말하는 '내 취향'이 아니면 적어도 나의 아름다움의 기준에서는 배제된다. 이에 18세기의 독일 사상가 바움가르텐(Baumgarten, A. G.)이 '미학'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이래 개인적 미의식(aesthetic consciousness)은 미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미학’이라고 번역해서 쓰고 있는 영어의 ‘에스테틱스(aesthetics)’는 바움가르텐이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을 명명하기 위하여 감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아이스테시스(aisthesis)로부터 만들어 낸 ‘에스테티카(aesthetic)’라는 학명에서 유래하고 있는 바, 감성, 곧 주관은 미에 있어서의 원초적 문제였던 것 같다.
어찌됐건 '미'는 우리 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미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어에는 명사 'kallos'(로마어로는 'pulchritudo')와 형용사 'kalos'(로마어로는 'pulcher')가 있다. 미의 추상적 성질을 지시하고자 할 때는 전자를 사용했고, 개별적인 아름다운 사물을 지시하고자 할 때는 형용사의 명사형인 'to kalon'(the beautiful)을 사용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미의 개념은 후자의 개념이 될 터이다.('용어 정리는 '다음백과' 참조)
따라서 이 챕터에서 다루고자 하는 미 역시 'to kalon'이며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될 터이지만, 챕터의 시작이니 만큼 용례로서 나름대로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하나 제시하고 넘어갈까 한다. 다름 아닌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거기 조각돼 있는 조각상, 이른바 엘긴 마블이라는 조각품들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아테네 시의 심장부인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있는 건축물로, (전쟁의) 승리와 지혜의 여신이자 아테네 시(폴리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에게 헌정된 신전이다.
그리스는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을 승리로 마감하였고 기원전 449년, 페르시아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의 위협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와 맞서 싸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맹인 델로스 동맹 역시 본래의 존재 이유가 소멸 돼버렸지만 동맹은 해산되지 않았다. 당시 동맹의 의장국은 아테네였는데, 페르시아 전쟁 영웅인 아테네의 참주 페리클레스는 모아진 전쟁 기금으로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지었다. 페르시아 전쟁에 의해 파괴된 건물의 재건이라는 명목이었다.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아테나 파르테노스', 즉 '동정녀 아테나'에서 비롯되었다.
총지휘은 페리클레스, 감독은 조각가 페이디아스, 시공은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맡았다. BC 447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건물 자체는 BC 438년에 완성되었으며 건물 외부장식 작업은 BC 432년까지 이어졌다.('다음백과' 참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테네의 속주격인 다른 도시국가들은 그런 식으로 기금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페리클래스는 힘을 앞세워 밀어붙였다. BC 438년 외관이 완성되자 페리클레스는 페이디아스가 만든 금과 상아의 아테나 여신상을 실내에 봉헌했다. 당대의 가장 화려했던 최고 건축물이었다.
이 직사각형의 파르테논 신전은 그후 수세기 동안 아테나 신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각품을 잃어버리고 건물의 원형 또한 크게 파손되었지만 기본구조는 원상태로 남아 있다. 그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기단의 맨 위층에서 꼭대기까지가 30.89m이고 너비는 69.5m이며, 동서로 각각 8개, 남북으로 각각 17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본구조이다. 더불어 지붕에 해당하는 엔타블레이처는 단순한 석재 띠인 아키트레이브와 그 위에 트리클리프*와 메토프**가 번갈아 늘어선 프리즈 부분, 그리고 동·서쪽의 완만한 페디먼트***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트리클리프: 3줄의 세로 홈이 나 있는 돌출된 직사각형판.
** 메토프: 트리클리프 사이에 끼어진 사각형 판석으로 도리아식 신전에서만 형성되는 특유의 양식이다.*** 페디먼트: 정면과 후면의 삼각형 박공.
기둥은 엔타시스(Entasis) 형식을 채택하였고(기둥의 중앙부를 배부르게 만들어 착시에 의해 기둥 몸이 가늘게 보이는 현상을 교정하기 위함) 기둥으로 구획된 건물의 안에는 사각형 방인 켈라를 만들었다. 이 켈라는 2줄의 작은 도리아식 콜로네이드(열주)에 의해 3개의 복도로 나누어져 있었고(아래 평면도 참조) 이 내외관의 기본은 이른바 황금비율로써 시공되었다. 켈라 뒤에는 서쪽으로 입구를 낸 좀 더 작은 사각형 방이 있었는데, 원래는 연결돼 있지 않았다.(아래 평면도의 오른쪽 그림) 이 내부 구조의 동쪽과 서쪽 끝은 각각 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 포티코(현관)로 이어진다. 기둥과 주두 장식은 모두 도리아식을 채택했다.
바깥쪽 기둥 위에 있는 메토프에는 고부조(高浮彫)가 새겨져 있는데, 동쪽면에는 신과 거인, 남쪽면에는 라피테스(전설상의 그리스 민족)인과 켄타우루스, 서쪽에는 라피테스인과 아마존인들과의 싸움 장면을 각각 나타냈다.(추정) 켈라 벽 윗부분의 연속적인 저부조 프리즈에는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제전의 분위기가 표현되었고, 박공부분에는 완전 돋을새김된 환조 조각이 있는데, 동쪽면에는 아테나 여신의 탄생 장면이, 서쪽면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전투 장면이 묘사돼 있다. 조각 작품 전체는 색채와 청동 장신구가 보태져 화려함을 더했지만, 채색은 거의 다 지워졌고 청동 장신구는 대부분 절도당했다.
이후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거대한 아테네 조상이 철거되고 동정녀 마리아를 기리는 크리스트교 사원으로 바뀐 5세기까지는 본질적 원형을 유지하였으며 7세기에 이르러 실내 일부가 개조되었다.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파르테논 신전의 남쪽에 미나레트(첨탑)를 세웠으나 그밖에는 변화 없이 그대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다음백과' 참조) 이렇게 볼 때 파르테논 신전은 적어도 15세기까지는 그 원형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17세기 들어 크게 훼손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이 지금과 같이 훼손된 데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1687년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베네치아 군대가 포격한 20여 발의 폭탄에 의해 파괴됐다는 설이 있고, 1820년대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그리스 독립군이 쌓아놓은 신전 안의 화약이 폭발하며 무너졌다는 설이 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이 참전하여 싸우던 바로 그 전쟁이었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
영국 출신. 젊어서는 절름발이로서의 신체적 결함과 오랜 무명생활 등으로 불우하였으나 1812년 발표한 시집 '차일드 헤롤드의 순례(Child Harold's Pilgrimage)'가 대박이 나며 일약 영국 사교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후 '돈 주앙(Don Juan)'으로도 재미를 보았으나 그리스 문화에 대한 사랑과 동경으로 1823년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그리스 독립전쟁에 투신하였고, 이후 그리스 독립군에 편입돼 열정적으로 싸우다 그 이듬해 미솔롱기온에서 열병과 출혈로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의 안치가 거부당해 자신이 살던 동네 뉴스테드의 납골당에 묻혔다.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열정의 미남 시인이다.
미솔롱기온에서 희랍인의 환영을 받는 바이런
1800년경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대사였던 토마스 블루스는 아크로폴리스의 폐허 속에 우뚝한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향후 10년 동안 오스만 정부의 모호한 허락 속에 파르테논 신전에서 남아 있는 조각품의 90%에 해당하는 253점의 유물들을 떼어 영국으로 가져왔다. 토마스 블루스는 이 유물들로 제 집 '브룸 홀'을 장식하였는데, 과도한 건축으로 재정이 파탄나자 영국 정부에 이 유물들에 대한 일괄 매수를 제의했다. 의회는 찬성 82표, 반대 30표로 유물의 구입을 가결했다. 토마스 블루스는 오스만 제국과의 원만한 외교의 공로로 영국왕실로부터 엘긴 경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후 그의 이름은 문화재 약탈행위를 의미하는 '엘기니즘'(Eginism)'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그 엘기니즘의 산물로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위 브리시티 박물관의 파르테논 조각품들로서, 이것은 지금 아예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로 불리며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 그리스 정부와 영국 정부 사이에서의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과거 반달족이 로마를 파괴한 이른바 '반달리즘(Vandalism)'은 더도 덜도 아닌 파괴 행위이며(* '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 참조) '엘기니즘'은 두 말할 것없는 도둑질로서, 어떠한 음침한 변명도 필요 없음에도 영국 정부는 여지껏 반환을 미루고 버티고 있다. 그 갈등을 논외로 하면서, 브리시티 박물관의 관장이자 사학자인 닐 맥그리거는 이렇게 말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은 신과 영웅들, 그리고 평범한 인간들이 신화와 일상에서 끌어낸 복잡한 환경에서 실타래처럼 한데 뒤엉켜 있었던 아테네의 우주를 우리 눈 앞에 펼쳐 보인다. 인간이 만든 조각상 중에 이처럼 감동적이고 정신을 고양하는 조각상도 드물다. (중략) 이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인간으로, 특히 아테네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지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완전히 바꿔놓았다. 한마디로 이 조각상은 새로운 시각언어가 거둔 최초이자 최상의 업적이었다."
아테네 대학 고고학 교수 올가 팔라기아는 보다 심층적이다.
"그러한 새로운 표현 양식은 핵심은 인체의 몸의 움직임과 옷의 관계에 새로운 균형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중략) 완벽한 비율을 가진 인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 새로운 고전주의 양식을 축약하는 핵심 단어는 조화와 균형이다. 바로 이것이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는 속성을 띠게 만든다. 그들이 창조한 형상이 실로 시간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는 다음과 같은 오류를 지적한 바도 있다.
"유네스코의 공식 로고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닮은 모양인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1호가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실 최초 등재된 세계유산은 파르테논 신전이 아니에요. 심지어 한 곳이 아닌 12곳이죠.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폴란드 비엘리치카의 소금광산 등이 1978년에 처음으로 지정됐어요."
알려진 바와 달리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지정 인류세계문화유산 1호가 아니다. 하지만 아마두 마타 음보우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유네스코 로고의 모티브가 된 파르테논 신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우리 기구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인 균형과 화합을 추구하는 훌륭한 상징입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잘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유네스코의 공식 로고가 된 것인데, 지금 그 건물을 유네스코가 복원 공사 중이다. '2500년 전에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그 신전을 지금 유네스코에서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이 신전을 완공한 후 이곳에 안치됐던 승리의 여신 니케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않았다. 이 아테나 파르테노스가 다른 데로 날아갈까 염려해서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는데, 혹 이 신상도 복원되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어떻게 복원되든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사중인 파르테논 신전
1981년 지진으로 서쪽 모서리가 부서지고 난 후 1983년부터 지금까지 35년째 공사중인데 별 달리진 건 없는 듯하다. 물론 빨리하는 게 능사는 아니겠지만 하루바삐 그 완형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내 생애에는 못 본 것 같다. 아무튼 상상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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