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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불국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이유(I)
    미학(美學) 2020. 7. 5. 21:06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그것이 1호 유산으로 등재된 건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적이라는 소리일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세계문화유산 하나를 손해 본 기분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묶지 않고 각각을 등재 신청했어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았을 유적을 괜히 쫄아(?) 어셈블리로 신청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두 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적으로서 세계의 어떤 유물 유적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이에 유홍준 교수도 오래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우리의 모든 문화유산이 다 사라진다 해도 석굴암만 남아준다면 한민족이 쌓아온 문화적 긍지는 손상받지 않을 것"이라고 석굴암을 극찬했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그 자랑스러운 석굴암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진작에 봉쇄됐다.

     

    우리는 석굴암을 보기 위해 토함산을 애써 오르지만,(특히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은 새벽에 깨어나 졸린 눈을 비벼대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답답하고 좁은 목굴암(木窟庵)과, 전실(前室) 입구부터 가로막힌 유리창 속으로 보이는 팔부중상과 인왕상, 그리고 멀찌감치 앉아 있는 본존불의 모습 밖에 없다. 게다가 사진도 못 찍게 하니 그거라도 담아 와 감상할 기회마저 봉쇄되는데, 그럼에도 나는 아래 사진 한 장을 관리인과 싸워가며 담아 왔다.(내가 이처럼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III'에서 설명했다)

     

     

    석굴암 / 금강역사상과 석가모니불

     

    한마디로 입장료가 아까운 세계문화유산이다.(불국사와 석굴암은 각 5천 원으로 경주의 유적지 중 가장 비싸다)제대로 볼 수 없기로는 사실 불국사도 다를 게 없다. 불국사는 다 오픈돼 있는데 볼 수 없는 게 무엇인가 물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에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인데, 이 글 역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빌려왔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의무교육을 받고도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직 경주에 가보지 못한 인생이야 있겠지만 경주를 보러 가서 불국사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 중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불국사를 보고 나서 멋지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불국사를 보고 나서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얼굴이며 한국미의 한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몇 해 전 한 건축잡지에서 건축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전통건축'을 묻는 질문에 불국사가 첫째는커녕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을 보고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하고 유명한 것이 공연히 시샘을 받아 오히려 무시당하고 홀대받으면서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야 세상사에 흔한 일인 줄 알았지만 전문가라 할 건축가들마저 불국사를 이렇게 외면할 줄은 정말 몰랐다. 더욱이 이 설문을 보는 순간 나라면 '우선 뭐니 뭐니 해도 첫째는 불국사가 아닐까'라고 속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그런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건축물에 대한 심미안이 남다른 건축가가 그러했다면 일반인은 더욱더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생각에 외국인을 포함한 주위 몇몇 사람에게 불국사에 대해 물어봤다.(그곳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기에 정말로 임의로 찍어 물어봤다) 결과는 생각대로 '별로였다'는 대답이 태반이었다. 내가 '생각대로'라고 말한 것은 나의 생각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불국사는 우리나라 절집 중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는, 그래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절집임에도* 방문자의 눈에는 '별로였다'는 것이다.

     

    * 기타 우리나라의 절집은 불국사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 23년이 지난 2018년에야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가 묶여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게 되는 바, 불국사가 갖는 위상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불국사 당간지주 / 오른쪽은 통일신라의 것이고 왼쪽은 조선시대 것인데 왠지 둘 다 주워다 놓은 느낌을 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국사는 김대성이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완공했다. 하지만 불국사의 내력이 적힌 <불국사고금창기>에는 528년에 세워졌다 하는데, 어느 쪽이 됐건 건축가 김대성의 손을 거쳐 간 것은 분명하다. 황룡사나 분황사, 사천왕사나 망덕사 등의 국찰(國刹)과 달리 불국사는 왕경(王京)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건립됐다. 이는 김대성이 이룩할 불국토(佛國土)에 걸맞은 지형이 그곳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곳에 본래부터 작은 사찰이 존재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라는 설화가 실려 있다. 이는 잘 알려진 대로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 세웠고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는 것인데,(<古鄕傳>) 이 이야기는 설화임에도 꽤 설득력이 실린다.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님은 이미 성불하여 서방정토에 갔다고 생각했겠지만 현세의 부모님은 아직 그러하지 못했던 바, 깨달음을 얻어 그들도  불국토에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대성은 부모님이 불국토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불교의 원리에 충실한 불사(佛寺)를 조성했으니 이름하여 불국사였다.

     

    김대성은 부모님 뿐 아니라 부처님을 믿는 신라의 모든 백성들 또한 불국토에 가기를 희망했을 터, 불국사의 구조를 살펴보면 불교 원리와 경전의 내용에 대단히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절의 동선(動線)을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고, 깨달음에 접근한 자는 정말로 불국토인 서방정토에 이르러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국사는 이처럼 불교의 원리가 설계에 철저히 응용된 절집이나, 정작 우리의 관람 동선은 그것을 무시하고 오히려 거꾸로 접근하니 아무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는, 그저 인공미 물씬한 가구식(架構式)의 화려한 외양만이 기억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뒤죽박죽의 관람이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뒤죽박죽의 관람은 사실 절 전면의 구품연지(九品蓮池)를 없앨 때부터 예견됐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아래에는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구품연지라는 커다란 인공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은 조선 영조 3년까지 존속되다 이후 사라졌는데, 절 내로 유입되어야 할 물이 고갈되고 토사 유입 등으로 인해 자연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연지는 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발굴조사팀에 의해 동서 39.5m, 남북 25.5m, 깊이 2~3m 정도의 연못 석축이 확인됐으나(연지 규모는 신라 때의 것이 아닌 조선 영조 때의 것임) 단체 관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복원에서 제외돼 밋밋한 평지가 되어버렸다.

     

     

    구품연지의 기록이 있는 <불국사고금창기>
    자하문과 청운교 백운교 / 우리 눈에 익숙한 앵글이다. 불국사에 도착한 관람객들이 사진 찍기 바쁜 장소지만 예전 이곳에는 구품연지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왼쪽 끝에 연못에 물을 공급했던 수구(水口)가 보인다.(화살표)
    산에서 대나무 대롱으로 끌어들인 물은 경내의 수곽으로 연결되고
    관음전과 대웅전 지하를 지난 후 석축 사이 수구로 빠져나와
    이곳 연못으로 떨어져 구품연지를 이루었다.
    연지의 물은 안양문 밑 연화교 칠보교 아래로 흘러 수로를 통해 절 밖으로 빠져나갔다.

     

    구품연지는 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수무량수경>의 내용을 빌려와 만들었다. 즉 '서방정토에는 연꽃이 피어 있는 큰 연못이 있는데, 그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보이고 황금빛 꽃들이 피어나며, 사람들은 그곳에 둘러앉아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는 바로 그곳으로서, 보랏빛 물안개가 피어난다는 자하문(紫霞門)이나 물 위에 뜬 누각 같다는 범영루(泛影樓), 물 위의 흰 구름 같은 다리 백운교(白雲橋)와 푸른 구름 같은 청운교(淸雲橋)의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 구품연지가 있음으로 해서이다.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 된 무영탑(無影塔)의 전설도 구품연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이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지 않음으로써 아사녀와 아사달은 목숨을 잃고 만다. 물론 이 무영탑 전설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구품연지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비쳤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물에 비치는 탑 그림자가 너무도 임팩트 강했던 바, 역으로 무영탑의 전설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연못도 없지만 설령 있다 해도 탑 그림자를 볼 수 없다. 자하문 양 옆으로 늘어선 회랑이 탑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이다.

     

    번외의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과거에는 지금처럼 꽉 막힌 답답한 회랑이 아니라 기둥 위에 지붕만을 얹은 개방식 회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복원된 월정교도 원래는 그와 같은 개방식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국사를 볼 때마다 그 폐쇄적인 회랑으로 인해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복원된 회랑은 조선 시대 궁궐의 회랑이지 옛 가람의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래의 회랑 없는 사진을 보면 옛 모습과 함께 시원함이 느껴진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정말이지 불국사의 회랑은 꼴불견이다.(조선시대 궁궐의 회랑과 같아도 저렇게 같을 수 있을까?)

     

     

    양 탑이 보이는 일제강점기 불국사 엽서 / 1924년 폐허의 불국사를 복원시킨 후 이를 기념하는 엽서를 발행했다. '복원은 과하지 않게'라는 나름대로의 선이 지켜진 듯.
    시원해 보이는 일제강점기의 불국사 풍경 / 그전에는 잔디가 깔린 부분까지 연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면 불국사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장엄해진다.
    자하문에서 바라본 범영루 /<불국사 역대고금창기>에 따르면 범영루의 이름은 '수미범종각'이나 연지에 비치는 아름다운 누각으로 인해 범영루라는 시적인 별명을 얻었다.
    자하문에서 내려본 청운교와 백운교 / 청운교와 백운교는 전체 33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그 아랫사람 서 있는 곳과 나무들이 있는 곳에 과거 연못이 있었다.

     

    우리는 불국사를 방문하면 자하문 밖 백운교 오른쪽의 언덕배기를 올라 대웅전과 무설전(無說殿)이 있는 경내로 곧장 들어서게 된다. 관람 동선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서부터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관람이 시작된다.* 본래는 연화교와 칠보교를 걸어 올라 와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만나 뵙고, 다시 수십 계단을 올라와 만나보게 될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그런데 그 석가모니불을 불국사 경내를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고 세존(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법화경>을 듣게 되는 것이다.*

     

    * 불국사의 이와 같은 동선 배치는 다른 어떤 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짓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일주문 바로 뒤에 대웅전을 둔 동네 사찰보다 못한 셈이다. 동네 사찰이야 공간이 없고 다른 당우가 없으니 그것밖에 길이 없겠지만 대한민국 일등 사찰을 자부하는 불국사에서 이와 같은 참배·관람의 동선을 만든 것은 정말로 이해 못 할 일이다. 

     

    ** 경내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가 현신한 다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올라 그 설법을 듣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가르침의 최고 경지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국토에 도착하자마자 대웅전 일곽의 옆구리로 치고 들어와 최고의 경지를 마주한다. 겨우 알파벳을 익힌 학생들에게 영어 원서를 던져준 격이다.

     

     

    대웅전 앞 석가탑과 다보탑 /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나 흔히들 줄여서 석가탑으로 부른다.

     

    이렇듯 불국토에서 가장 나중에 경험하게 될 일을 시작부터 해버렸으니 그것이 눈과 귀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처음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맛을 봤으니 알든 모르든 간에 그다음 것은 모두 시시하고 양에 차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러하니 대웅전 일곽을 벗어나  만나게 되는 극락전 일곽 안에는 극락전 전각과 석등 하나만 달랑 있고 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 극락전 일곽은 <화엄경>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아미타불만 한 분 있다. 그리고 탑도 없다.

     

    <화엄경> 속의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았으므로 사리탑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석가탑과 다보탑의 화려미를 일람하고 온 관람객들은 갑자기 허전해져서 극락전 석등 앞에 놓인 아무 의미 없는 금돼지나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인데, 사실 감상하자면 극락전 안에 모셔진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은 불국사 비로전, 백률사의 것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에 해당될 만큼의 수작(秀作)이다. 하지만 대웅전 일곽의 화려미에 눈이 높아진 관람객들에게 법당 안의 불상 하나가 눈에 찰 리 없다.

     

     

    극락전
    극락전 내 금동아미타여래좌상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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