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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굴암 원형 탐구(I) - 광창(光窓)과 홍예석의 문제
    미학(美學) 2021. 4. 16. 08:11

     

    석굴암은 따로 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문화재요, 나아가 동양 무비(無比)의 예술품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20여 년에 걸쳐 완성시킨 이 석굴은 이후 천년의 사랑을 받았으니 조선조 불교의 쇠퇴 속에서도 그 사랑이 이어졌다. 그러던 석불에 한일합병 직후 일제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12년부터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 공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때 석굴암의 원형이 훼손되었는데, 그중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석굴암 본존불

     

    1. 석굴암 전체를 시멘트로 덮어버린 것 → 당시는 최초 석굴암에 대한 건축원리를 파악하지 못했고 연구 또한 부족했음에도 빗물과 세월로부터의 보호를 구실로 그 전체를 1미터 두께의 시멘트로 덮어버렸다. 이는 석굴암을 숨 쉬지 못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심각한 결로 현상을 낳았지만 광복 후의 보수공사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그래서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우측 기계실의 에어컨이 온도 20˚C 습도 50%의 공기를 365일 송풍시키며 결로와 이끼 발생을 억제하고 있다)

     

    2. 주실(主室)의 광창(光窓)을 막아버린 것 → 본래 있던 주실의 광창을 막아 어두침침한 방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지금은 전실을 덮는 목조건물을 지어 아예 깜깜이 굴로 만들어버렸던 바, 역시 365일을 인공조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아울러 이 광창은 주실 안의 습기를 배출시키는 통풍구이기도 했는데, 이를 막음으로써 결로와 이끼 발생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덤으로 아침 햇살에 영롱했을 부처님의 상호도 잃어버렸다. 

     

    3. 주실 입구에 홍예석이 설치된 것  → 본래 있던 것은 없어지고 없던 것은 생겼다. 발견 당시 촬영된 어느 사진에서도 주실 앞 양 기둥을 가로질러 설치된 홍예석이 보이지 않으나 일본이 석굴암 1차 보수를 완료한 1915년부터 이 홍예석이 나타난다. 일본 전통건물 양식인 가라하후(唐破風)를 석굴암에 이식해 일본풍으로 만들고자 한 의도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광복 후의 보수공사에서도 이 홍예석은 철거되지 않았다.  

     

    그 외도 꺾여 있던 전실이 개방된 것, 본존불 뒤의 사라진 5층 소탑(小塔), 사라진 감실 부처님 2구가 본래부터 있었는가 하는 문제, 주실 앞에 있던 사각기둥 2기가 행방불명된 것도 석굴암 원형 탐구에 있어서의 중요 과제이나, 오늘 여기서는 주실 광창의 유무(有無)와 홍예석 문제만을 다뤄보기로 하겠다. 

     

    지금껏 석굴암을 찾아갈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 유리창 안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극락세계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 촬영도 일절 금지돼 있는데, 한 번은 외국인이 찍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카메라를 들이댔다 경비원에게 제재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불공평을 지적하는 글을 앞서 올린 바 있지만, 그때 찍은 '전실의 개방이 오류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써 위안을 삼고 있다.

     

    이렇듯 안으로 들어갈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지만 석굴암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면 언제나 그 안과 밖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광창과 홍예석의 문제는 나름대로의 답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여러 선학(先學)들이 개진한 문제일 수도 있고, 아울러 내 생각이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없을까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단장된 외관과 재발견 당시의 사진

     

    이미 답을 말했지만 석굴암 주실의 광창은 김대성의 설계도에도, 그리고 시공 후에도 당연히 존재했으며 1891년 마지막으로 중수할 때도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경상도 관찰사 조순상의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 하지만 이후 어떤 이유에선가 무너지기 시작해(본래 맞물림이 취약했던 부분이다) 1910년경에는 천장 덮개돌 부분까지 함몰된 것인데, 당시의 원인은 2014년 2월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를 일으킨 원인과 동일한 무거운 습설(濕雪)이었을 걸로 짐작된다.(일설인 2016년 경주 지진과 같은 강진설은 타당성이 없어 배제했다) 

     

     

    떨어진 천장석과 눈을 살필 수 있는 발견 초기 사진. 

     

    최초 일련의 사진들을 보면 주실의 광창 자리는 어느 사진에서도 확연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이것을 주실 천장의 일부가 함몰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래 재발견 당시의 사진을 보면 본존불 대좌 앞에 천장에서 떨어졌음직한 궁륭형(穹窿形) 돌이 보인다. 또 천장 덮개돌까지 드러나 보이는 까닭에 천장석이 무너져 내린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본존불 대좌 앞에 천장에서 떨어진 돌들이 보인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사진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본래 광창 자리 돌이 떨어져내린 것일 수도 있고, 이것이 탈락됨으로 덮개돌에 이르는 돌까지 연쇄적으로 탈락되었을 수도 있다. 과정을 따져보자면 오히려 이 후자 쪽이 개연성이 있으니, 광창이 있음으로 해서 맞물림이 약했던 돌이 석굴암 전체를 덮었던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연성이 무시된 채 주실 천장 전체를 덮는 공사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아래와 같은 일본식 석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결국 창광 자리에는 새 돌이 끼워졌고(이때 기둥 사이에 홍예석도 얹혀졌다)
    석굴암은 본래 봉분 형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입구에 석축을 쌓아올려 마치 기차 터널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개장되었다. 
    1935년 석굴암을 방문한 일본의 왕족

     

    그러나 일제가 무턱대고 마구잡이로 광창을 막아 없앤 것은 아니니, 석굴암 내려가는 길에 내팽개쳐진 아래 창문 돌로 보이는 돌은 그들도 나름대로 고민을 했음을 말해준다. 즉 광창이 무너진 곳에 <사진 1>과 궁륭형의 돌을 깎아 끼워보기도 하고, 또 그 창문 돌에 홈을 파 살창을 만들어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사진 2>처럼 '전혀 아니올시다'였던 바, 결국은 광창을 포기하고 천장 전체를 아예 막아버리기에 이른 것이다. 

     

     

    <사진1> 광창을 만들려 했던 돌
    입구 석축을 만들고 남은 돌 
    <사진 2> '신라과학역사관'에 재현된 광창이 있는 석굴암 모형. 살창이 본존불에 그림자를 드리워 감옥 속의 부처님을 만든다. 
    남천우 교수가 제시한 광창 모형 - 이후 이 모델은 강우방, 문명대, 김익수, 유홍준 등의 지지를 받았으나 위의 이유 등으로서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읹았다. 이를 다시 조명하고자 한다. 

     

    일제가 1,000여 년간 존재했던 광창을 없앴다는 사실은 그들이 석굴암의 조형원리를 전혀 몰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석굴암 암반 밑을 흐르는 샘물이 바닥을 차게 하여 석굴 바닥에만 결로 현상이 일어나게끔 유도한다는 이론(이태녕, 남천우, 유홍준)은 그 반대론도 만만치 않아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물 위에 건물을 짓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 그러나 광창이 환풍구로써 결로 예방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으니, 일례로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주 발생하는 겨울철 결로현상과 곰팡이는 오히려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해결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겨울철 결로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바깥과 안의 기온 차이로서 대개 15도 이상의 온도차를 보일 때 나타난다. 이때 창문을 열어 그 온도 차를 줄여주면 결로와 곰팡이가 줄어들게 되나, 열손실을 생각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내부 단열을 든든히 해 바깥 찬 공기를 차단시키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는데, 석굴암의 경우는 안에서 대류되는 따뜻한 공기가 위쪽의 창이 없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바, 창을 내주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석굴암의 심각한 결로현상은 공기가 들어오는 통로만 있고 나가는 통로가 없어서 생기는 것으로, 안의 식지 못한 공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되자 벽과 천장에 흡착되어 이슬이 맺히고 이끼가 끼게 되며, 나아가 부재마저 부식시키게 되는 것이다. 일제는 광창을 없애고 밖에다 시멘트를 발라 감실 벽 구멍 등으로 빠져나가야 할 공기를 가둬 둠으로써 결로현상을 자초한 셈인데, 대류현상이 집중되는 천장까지 시멘트 돔을 씌움으로써 습기와 결로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해방 후에는 우리까지도 또 돔을 만들어 씌웠다)

     

    흔히 천개석(天蓋石)이라 부르는 천장 마감돌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을 대개 김대성이 이룩한 대역사(大役事) 마지막의 유일한 실수로 간주한다. 옥의 티와 같은 그 덮개돌의 금은 정말로 보기 안습이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에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김대성이 그 처리를 고민하며 잠든 사이에 천신(天神)이 마감시켜버렸다는 설화를 끼워놓았고, 유홍준 교수는 자신이 미국 연수시절에 꾸었던 아내 꿈까지 삽입시켜 합리화를 꾀했다. 

     

    하지만 이상의 스토리는 다분히 창작적이다. 상식적으로 보나 당대의 상황으로 보나 김대성이 금이 간 덮개돌을 얹어,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거나 유종의 미를 스스로 망치거나 할 이유가 없다.(만일 직업 중 금이 갔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만들었을 것이다)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얹어 완성시켰다는 가정은 더욱 말이 안 된다.(당대의 사회에서 감히 석공들 따위가 20년 대역사를 망치려 들었다고?/실제로 유홍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구원에 대한 믿음, 엄격한 주종 관계라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진 3> 덮개돌에 금이 간 석굴암 천장

     

    천장에서도 공기가 빠져나갈 틈이 필요했다. 아니 더욱 절실했으나 필요에 의해, 그리고 30개의 멍에돌을 비롯한 360개의 판석에 의해 워낙에 단단하고 촘촘하게 짜맞춰진 돔인지라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아주 작은 공간이 맞물림을 헐겁게 해 붕괴의 원인을 제공할지도 모르기에 처음부터 틈바구니를 주지 않은 까닭이었다.(이것이 천년 동안 석굴암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만 김대성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는 다 계획이 있었거든!) 덮개돌이 돔 중앙에 끼어넣어진 마지막 날, 그는 손수 해머를 들어 위에서 둥근 덮개돌을 내려쳤다. 그러자 돌을 세 조각으로 나누는 균열이 생겼다. 김대성은 덮개돌에 금이 가거나 깨져도 사방에서 밀어주는 아치 돌로 인해 흩어지지 않으며 keystone 본연의 역할을 잃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이렇게 석굴암을 완성한 김대성은 토함산 남쪽 고개(향령)에서 향을 태워 천신께 제를 올렸다.  

     

     

    세 개로 갈라진 덮개돌은 직경 3미터에 높이 1미터  무게 약 20톤의 대형 석재로서, 깨진 채로 돔 중앙에 끼워넣는 것은 적어도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김대성이 향령(香嶺)에서 제를 올렸다는 <삼국유사>의 스토리가 대역사를 완수케 해준 천신에 대한 공양임은 두 말할나위 없다. 그렇듯 성취감으로 올린 공양을 일연스님은 아쉬움의 공양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래서 어색하다.(일연스님의 눈에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저 깨진 덮개돌이 아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튼 김대성은 마지막까지 천재성을 발휘해 천장이 숨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석굴암의 천장에 몰렸던 더운 공기는 당연히 그곳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틈을 타고 빗물이 들어올 수도 있다. 김대성은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김대성은 그 또한 간단히 해결했다. 석굴암 바깥 꼭대기에 기와 지붕을 얹은 것이었다. 그리고 1891년 조순상(趙巡相, 조씨 성을 가진 순찰사)이 석굴암을 보호하는 목조건물을 씌우는 과정에서도 똑 같이 적용되었다. 일제시대 발굴 때 시대가 뒤섞여진 채로 무더기로 발견되어진 바로 그 기와였다.  

     

    * 2편으로 이어짐 

     

    위 <사진 3>처럼 감실에는 10개의 보살상이 안치돼 있는데 입구 양쪽 2개는 빈 상태로 현재 조명장치가 놓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가장 아름다운 보살상이라 찬탄한 감실의 유희좌 보살상이다.(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그러면서 감실 조각상 2기는 일본인이 훔쳐갔다고 했지만 본래부터 불상이 없던 환기구였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 발굴 당시의 지붕 기와
    광창으로 흘러내린 기와를 전실과 주실 입구에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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