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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라하후(唐破風) 도리이 돌이 얹혀진 석굴암 기둥
    미학(美學) 2021. 4. 18. 06:19

     

    석굴암 주실 입구 본존불 앞 기둥에 얹힌 홍예석이 본래부터 있었는가의 문제는 오래전부터의 숙제였다. 그리고 그 숙제를 아직도 풀지 못한 탓에 지금도 홍예석은 어엿해 차마 보기 안습이다. 이미 결론을 말했거니와 그 홍예석은 일제가 석굴암 1차 공사를 한 1913~1915년 사이 얹힌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전 사진에는 없던 돌이 공사 후 갑자기 생겨났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고(故) 성낙주 선생이다.(작년 6월, 조금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문제의 본존불 앞 기둥 사이 홍예석   

     

    성낙주 선생은 석굴암 원형탐구에 나름 이바지하신 분이다. 그분은 평생을 교직에 봉직하면서도 따로 '석굴암미학연구소'를 차려 석굴암 원형 찾기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2014년 마침내 40년 연구의 총아인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를 펴냈다. 전투적인 제목과 '신화와 환상에 가려진 석굴암의 맨 얼굴을 찾아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석굴암에 대한 그의 실증적 사고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생각과는 합치되는 부분이 극히 적었으니 '같은 사물을 대하는 생각이 이처럼 다를 수도 있구나'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성낙주의 책 <석굴암, 법정에 서다>

    성낙주 선생이 직접 설명하는 영상

     

    그분과는 앞서 내가 '석굴암 관람 유감 - 조속한 전실 개방을 촉구한다'에서 언급했던 석굴암 전실(前室) 구조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석굴암 원형 탐구(I) - 광창(光窓)과 홍예석의 문제'에서 강조한 광창과 홍예석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즉 그분은 광창과 홍예석은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고 나는 그 반대인데, 오늘은 그 가운데 홍예석의 문제만을 다뤄볼까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석굴암 두 기둥 사이의 홍예석은 1차 공사가 시작된 해인 1913년 이전 사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진에서건 단 하나라도 홍예가 걸쳐 있었다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겠지만 없는 것이다. 

     

     

     1909년 12월 도쿄제국대 교수 세키노 다다시가 촬영한 사진으로 홍예석이 없다.  다만 그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형 석부재 하나가 앞에 떨어져 있으나 홍예석으로 쓰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필시 광창의 한 부재였으리라.  
    1909년 4월 조선통감부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일행이 석굴암을 둘러본 뒤 찍은 단체사진. 위 사진 2장은 현재 가장 이른 석굴암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때도 홍예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낙주는 홍예석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근거로 제시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이유, 즉 신사(神社) 문 앞에 설치하는 이른바 도리이(鳥居)를 석굴암 기둥 사이에 걸쳤다는, 그리하여 석굴암에 왜식(倭式)을 입식(入植)시켰다는 주장은 그 도리이의 모양과 석굴암 홍예석의 모양이 다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은 신사 도리이가 어떻게 석굴암의 무지개 돌과 같냐는 것이다.

     

     

    닛꼬 동조궁의 도리이
     히로시마 이쓰쿠시마 신사의 유명한 해상 도리이  

     

    그가 두 번째 이유로서 제시한 것은 아래 사진으로서, 석굴암 기둥 사이 창방과 같이 튀어나온 곳에 홍예석과 같은 돌을 걸쳤던 홈이 파여져 있다는 점을 결정적 이유로 들었다. 그러면서 일제의 석굴암 1차 보수공사 중에 홍예석 파편이 수습되었다는 보고서 내용과,(그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무지개 돌을 걸치는 수법은 김대성이 불국사 시공에서도 즐겨 사용했다는 주장을 폈다.

     

     

    성낙주가 제시한 사진

     

    ※ 성낙주의 설명:

    이 사진에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숨어 있는데, 첫 번째는 이른바 ‘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 논란거리인 홍예석(虹霓石)에 관해 보다 명확한 해석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사진에서는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숨어 있던 부분이 일부 드러났는데, 특히 우측 돌기둥 위의 첨차석이 눈길을 끈다. 그동안 무지개 돌은 학계 일각의 힐난을 한 몸에 받아왔는데, 요지는 일제가 1차 보수공사 때 본존불의 시야(視野)를 가리려는 악의에서 얹은 것으로 우리 손에 의한 1960년대 보수공사에서 그대로 존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이의 누끼를 모방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우측 첨차석의 단면을 보면, 양끝이 귀처럼 뾰족이 솟아 있는 대신 중앙부위는 낮게 깎여 홈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홍예석이 걸쳤던 자리로 추정된다. 마침 주실 돔 지붕의 함몰된 구멍[穴]을 통해 햇빛이 내리 꽂혀 그 부분이 더욱 생생한데, 기존의 사진들은 정면에서 촬영한 탓에 그 부분은 희미한 흔적만이 비치는 정도였다.

     

    아마도 최초의 보수책임자는 바닥에 퇴적된 흙더미 속에 깨진 채로 파묻혀 있던 원래의 홍예석을 발굴해서 그 모양대로 다시 깎아 시설했을 것이다. 그때 불국사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를 잇는 무지개다리의 석재는 큰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거니와, 만약 홍예석 자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그런 홈을 파낸 데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사이의 홍예(금강신문)
    성낙주의 주장에 더욱 뒷받침이 되는 사진: 불국사 청운교 좌측 홍예(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와 같은 성낙주의 주장은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내실이 부족하다. 일본 신사의 도리이는 위와 같은 평(平) 도리이뿐만이 아니라 신메(神明) 도리이, 가라하우(唐破風) 도리이, 하루히(春日) 도리이, 묘진(明神) 도리이, 마루키(丸木) 도리이, 구로키(黑木) 도리이 등 다양한 모양이 존재한다. 이중 석굴암에 입식된 도리이 양식은 가라하우 도리이로서 가라하우(唐破風)는 일본 전통 건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양식이기도 하다. 아래 것들은 절과 성, 신사와 신궁 등 다양한 성격의 건물에 사용된 가라하후 양식과 가라하후 도리이 사진이다. 

     

     

    가라하우 지붕 양식
    가라하우가 사용된 전통가옥
    나라 동대사 본전
     아이치현 이누야마성 
    야스쿠니 신사 본전
    오사카 이세 신궁 
      가라하우 도리이

     

    즉 일제는 석굴암에 가라하우 도리이를 설치한 것인데, 이와 같은 지시를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찌(寺內)가 내렸다는 주장이 있다. 2011년 한국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이 학술 연구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대(京都大) 도서관에서 발견한 <석굴암 수리 공사보고서>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데라우찌는 처음에는 석굴암의 불상들을 일본으로 방출해 갈 것을 지시했으나, 여론이 나빠질지도 모르니 일단 수리를 한 후 보관했다가 차후에 옮기자는 주위의 의견을 따랐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석굴암 불상의 보존 상태가 극히 나빴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실리는데, 데라우찌 총독은 수리공사를 하는 기간 중 직접 경주까지 내려와서 지휘를 했으며 주실 입구 돌기둥에 일본 신사 입구와 같은 도리이를 만들도록 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의 얼을 꺾고 일본신사의 정기를 접목시키기 위함이었으며, 그 모양으로 가라하후(唐破風)형이 채택된 것은 가라하우의 뜻이 '대륙의 바람을 깨뜨린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발견자의 추측이다. 

     

    이렇게 되면 굳이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석굴암이 비교적 멀쩡한 상태에서 재발견되었음에도 오직 홍예석만 파괴되었다는 가정은 사실 설득력이 부족했었다.(성낙주 소장의 주장에 의존하면 홈까지 파 단단히 결합되었던 홍예석이 유독히 파괴된 것이 더욱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초기 사진에서도 홍예(무지개)의 형태를 취한 가공석은 발견되지 않았던 바, 홍예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판단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 주범은 물어보나 마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실이 밝혀진 이상 석굴암의 홍예석은 철거되어야 마땅하다. 목조 전각이 애초에 있었던 없었던 간에, 광창이 애초에 있었던 없었던 간에, 그것들을 새로이 만들거나 철거하거나 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전실이 전개형이든 굴곡형이든 간에 새로운 완전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현재의 석굴암 형태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주실 기둥을 타고 앉은 저 닌자(忍者) 같은 가라아후 도리이는 하루속히 철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희망 사항, 즉 석굴암 전체를 가로 막고 있는 유리가 주실 입구로 옮겨져 전실이 관람공간으로서 개방된다면, 전실에서도 주실 천장 등을 볼 수 있는 보다 넓은 시야가 확보되게 된다. 어차피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기계실의 송풍기는 가동되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필요한 유리막 역시 철수될 수 없다. 그렇다고 석굴암의 지금의 유리막 안에 끝까지 가둬 두며 앵벌이를 시키는 것도 석굴암 부처님에게나 국민들에게나 도리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루속히 유리막을 주실 앞으로 옮기고 주실 기둥의 홍예석을 철거해 인류문화유산이요 한민족의 자부심인 석굴암이 좀 더 국민 곁으로 가까이 오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조상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 석굴암의 원형 보전을 위해 후손들이 할 수 있는 최소이지만 최선의 방법이며, 또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일제가 제멋대로 설치한 가라하후 
    그러면서 본존불 대좌 앞에 작은 석대(石臺)도 설치했으나 
      일제가 석굴암 석물을 뜯어놓은 자리로 1960년대 공사 때 옮겨졌다.(화살표) 일제 때의 시공물을 뜯을 수 있다는 선례가 남겨진 셈이다. 
    답답하고 답답하다. 
    만일 이 가라하우가 사라지고 유리막이 전실 앞으로 옮겨지면 
    우리는 석굴암 본연의 모습에 보다 접근할 뿐더러 이렇듯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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