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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간송미술관이 내놓은 불상과 불감미학(美學) 2022. 1. 15. 07:01
어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 불상과 불감이 케이옥션에 출품됐다. 국보가 상업 경매에 나온 첫 사례인지라 세간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 간송미술관이 자식과도 같은 미술품을 내놓은 이유는 전과 마찬가지로 재정난 때문인데,(☜ '경매에 나온 간송미술관의 불상 2점') 이번에는 그에 대한 논평 없이 작품만을 논해 보기로 하겠다.
시장에 나온 미술품은 국보 제73호 금동삼존불감(1962년 지정)과 국보 제72호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1962년 지정)으로, 먼저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부터 살펴보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金銅癸未銘三尊佛立像)은 6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호신불로 많이 제작된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立)의 형태로서 삼성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금동보살삼존상 · 금동신묘명금동삼존불입상과 함께 북위(北魏)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
일광삼존불이란 한 광배 안에 주불상과 좌우 협시보살이 모두 조각된 형태를 말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을 백제의 것으로 보고 있어 대부분의 백과사전에도 (불상 뒤의 명문에 의거) 백제 위덕왕 때 보화라는 사람이 계미년(563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조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강우방 선생은 그것을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고(<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나 역시 고구려 불상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이에 대한 강우방 선생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계미명금동삼존불은 고구려에서 불교가 문화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6세기 중엽(563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광배 뒷면에 '계미년 11월 1일 보화위망부조△인조(癸未年十一月一日寶華爲亡父趙△人造)'라는 짤막한 글이 음각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불상을 백제 것으로 보고 있으나 둥그런 육계, 팽팽하며 길쭉한 얼굴, 수직으로 올리고 내린 시무외인과 여원인,(손가락 형태) 경직된 의습이지만 과장되게 좌우로 길게 뻗쳐 있으며 그 옷자락의 끝이 일정한 형태를 취하여 도식화된 점 등으로 미루어 동위(東魏) 초의 양식을 반영한 고구려불이라 생각된다. 양 협시불은 정교하고 치밀한 맛은 없으나 강한 운동감이 있는 천의의 흐름으로 감싸져 있다.
광배의 형식으로 보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에 인동당초문, 밖의 여백에는 작은 원형의 문양(魚子文)이 가득 채워져 있다. 광배의 형태나 화염문 · 인동문 · 당초문 · 연화문 등의 문양은 평양 출토 영강7년명(永康七年銘) 광배와 같다. 대좌의 기본 구조는 연가7년명 불상과 같은 형식으로 세 겹의 연화가 중첩되었고 상단의 것만 양감이 강한 복판(覆辦)으로 되어 있다. 도금의 찬란한 금색이 전면에 잘 남아 있다."
쇠와 나무 등의 재료로써 일반적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들어 부처님을 모신 조형물을 불감(佛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국보인 순천송광사목조삼존불감(順天松廣寺木彫三尊佛龕) 등의 뛰어난 목조불감이 전하나 금동불감은 드문데, 이번 경매에 나온 국보 제73호 금동삼존불감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작품은 높이 18㎝의 작은 불감이나 표현될 것은 다 돼 있고 그 표현력 또한 뛰어나다. 덮개 형식으로 만들어진 법당은 지붕 치미와 잡상, 주심포 형식의 공포 양식까지 섬세히 묘사돼 있어 우리나라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신라~고려초 목조건축물의 형태와 결구 방식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불상의 경우는 불상의 광배, 화관, 옷주름의 형태로써 11∼12세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본존불의 긴 허리와 U자 옷주름, 협시불이 쓴 삼신관 등의 형태로 보면 7세기말까지 상향이 가능해 이번 기회에 재감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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