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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굴암 광창과 √2 구도의 문제
    미학(美學) 2021. 4. 25. 13:59

     

    예전 창문 위에 눈썹이 달린 집에 산 적이 있다. 아래 사진처럼 2층 창문 두 개에 모두 눈썹이 붙어 있었는데 지붕은 사진의 집보다 훨씬 더 튀어나와 있었다. 따라서 눈썹 위는 눈비를 막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던 바, 동네 비둘기들의 둥지가 되어 그곳에서 태어난 새끼까지 설쳐댔다. 창문을 열면 새똥 가루가 날아들었고, 사방에 깃털이 날리는 것이 마치 터진 오리털 이불을 덮고 사는 집 같았다. 그래서 결국 철망을 둘러치는 대공사를 해야 했는데 요즘도 옛 한옥 건물이나 문화재 건물 현판 주변에 둘러 쳐진 철망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내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석굴암 광창의 유무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석굴암 원형 탐구 - 광창(光窓)과 홍예석의 문제'에서도 말했거니와 나는 석굴암에 광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것이 단지 채광만을 의한 것이 아니라 석굴암 주실 안에서 대류된 더운 공기를 내보내 실내의 결로를 예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광창은 그 기능적 역할 연구와 함께 석굴암 원형 탐구에 있어서의 가장 먼저 들여다보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석굴암 원형 탐구(I) - 광창(光窓)과 홍예석의 문제

    석굴암은 따로 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문화재요, 나아가 동양 무비(無比)의 예술품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 김대성이 20여 년에 걸쳐 완성시킨 이 석굴은 이후 천년의 사랑을

    kibaek.tistory.com

     

    본론을 말하자면, 일제시대 석굴암 발굴 당시의 사진들과 현황을 비교할 때의 상이점은 크게 네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광창으로 여겨지는 자리가 막힌 점.

     

    광창 자리를 막는 일본인 기술자

     

    2) 꺾여져 있던 전실이 오픈된 점.

     

    전실 입구 좌·우가 꺾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진

     

    3) 주실 기둥에 홍예석이 얹힌 점.

     

    없던 게 생겨났다. 

     

    4) 홑겹이던 주실 입구의 아치가 이중으로 복원된 점.

     

    이상 4가지 중 2)와 3), 즉 꺾여 있던 전실이 오픈된 점과 주실 기둥에 홍예석이 얹힌 점에 대해서는 앞서 충분히 견해를 밝혔다. 이에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불필요할 듯하고, 오늘은 1)광창의 문제와 4)주실 입구의 아치가 이중으로 복원된 점을 다루려 한다. 그중 4)의 문제는 이제껏 별로 거론되지 않았던 문제이나 결론이 비교적 간단하므로 먼저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지금 우리가 신라시대 김대성이 만든 석굴암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다. 1891년 조순상(趙巡相)의 공사 이전에도 자연적으로나 인위적인 변형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인데, 그래도 없던 광창을 새로이 만들었거나 홑겹이었던 입구의 아치를 이중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보통의 공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석굴암의 원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수리 공사 이전 사진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에 앞·뒤 사진을 비교 검토하고 있는 것인데, '앞'의 사진을 보면 전체를 찍은 사진에는 어느 것이건 광창의 자리가 확연하며 주실 입구가 하나의 아치로만 구성돼 있다. 하지만 수리 공사가 끝난 1915년 이후에는 광창이 사라지고 주실 입구의 아치가 이중이 되었던 바, 일제가 1차 공사(1913~ 1915년) 중 입구에 석축을 쌓으면서 광창을 없애고, 주실 입구에 또 하나의 아치를 깎아 붙였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잘못 복원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매우 잘 된 복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아치 아래 기둥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위에도 이중의 아치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고, 그것이 주실 지붕 흙과 돌에 밀려 박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그것을 읽고 복원했다면 그것만큼은 매우 훌륭한 일을 한 셈이다. 

     

     

     입구 아치가 홑겹인 1909년 사진 
    이때까지도 원형 그대로 홑겹 아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중 아치가 되었다.

     

    하지만 광창을 없앤 것은 심히 유감이다. 물론 처음부터 광창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앞서도 언급한 성낙주 선생 같은 분인데, 그는 살창의 광창이 있었을 경우 감옥 속의 부처님이 되는 것 외에, (※ 이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이 끝났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1) 광창을 가정할 경우 주실을 덮는 흙을 뚫는 긴 터널(4.5~5m)이 만들어져야 하므로 구조적으로 맞지 않다.   

     

    2) 그래도 광창을 만든다면 그 터널은 족제비, 담비와 같은 동물, 새떼, 벌레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될 것이요, 새들의 보금자리로서 새 똥이 가득할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3)  또 광창으로 들이치는 비바람은 어쩔?

     

    4)  겨울철 너댓달 동안의 방한(防寒)은?

     

    등을 거론하며 이상의 '들이닥칠 재앙'을 어찌할 것이냐 묻는다. 그래서 반론하거니와, 여기서 비바람과 방한의 문제는 언뜻 큰 일 같지만 사실 별 문제가 안 된다. 성낙주 선생은 "냉돌 바닥에서 참선하고 묵상하다가 냉동창고와 같은 바닥에 얼어 죽자는 건가?" 묻기도 했으나 이것은 주실 하고는 상관없는 전실(前室)의 문제다. 석굴암 전실에 목조 전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묻는다면 이 질문이 타당할 수 있겠지만 전실은 어차피 오픈된 참배 공간으로 설계·제작되었으므로 질문 자체가 의미 없는 셈이다.  

     

    그리고 비바람 피해가며 따뜻하게 참배하겠다면 그런 법당을 찾으면 될 일이지 굳이 토함산 꼭대기까지 올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아울러 (그냥 집에서 편히 쉬지) 굳이 비바람 맞아가며 예불을 드릴 필요는 또 무엇인가?  

     

    또  얼어죽을 정도로 참선하고 묵상하는 미련퉁이도 없을뿐더러 석불사(석굴암)가 세워진 시기(751-774)는 선종이 들어와 자리잡기 전이었으므로 참선과 묵상은 당대의 수행법과도 거리가 멀다. 즉 지금의 시각으로 당대의 사정을 척도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다만 석굴암 외벽에서 광창까지 생겨나게 될 공간은 꽤 걱정이 된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내가 바로 비슷한 환경의 집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굴암의 단면을 살펴보았다. 과연 통로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생기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석굴암 단면도

     

    보다시피 터널이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공간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럴 공간이 있더라도 새들이 그곳에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매우 안이하다. 불심 깊은 새라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광창 아래보다 본존불의 머리나 어깨를 더 선호할 것이니, 실제로 일제시대 발굴 당시 사진이나 한국전쟁 중에 찍은 사진은 새똥 같은 오물이 여실하다.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단속하며 새들이 앉지 못하도록 쫓는 일, 박쥐들이 천정에 매달리지 못하게 만드는 일 또한 수행이요, 예배의 과정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광창이 없음으로 해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발굴 초기 본존불 사진
    한국전쟁 중의 사진이다. 광창이 없는 데도 새똥이 장난 아니다.  
    한국전쟁 중의 사진(미군 병사가 앞에  앉았다) 

     

    광창이 존재했음을  발굴 당시의 일본인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최소한의 고민은 했고 복원시켜보려는 노력도 있었던 바, 앞서 말한 석굴암 주변의 석물 부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돌을 광창 자리에 꿰어 맞추려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복원시 그 돌을 측정해 본 결과 광창으로 추정되는 자리와는 그 사이즈가 크게 달랐다. 왜 그랬을까? 일본인 기술자가 광창 자리를 잘못 측정한 것일까? 

     

     

    광창의 부재로 여겨지는 석물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광창의 사이즈조차 제대로 재지 못할 정도로 서투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그들은 본존불 앞에 떨어져 있는 광창 위 눈썹돌(아래 사진)을 최대한으로 모방해 맞춰보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 살창을 세워 넣어보려는 시도도 한 것인데, 본래 그 눈썹돌이 달렸던 위치를 끝내 파악할 수 없었던 바, 결국은 막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일제시대 엽서 속의 눈썹돌(화살표)  
    최소한의 노력은 한 흔적

     

    60년대 우리는 재복원을 하면서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광창에 대해 고민을 좀 해봤다면 주실 입구에 왜 기둥 두 개가 천장까지 세워져 있는지 그 이유를 궁금히 여겼어야 옳았다. 지금은 그 기둥이 아무런 역할도 없이 그저 일제가 만든 홍예석을 걸치는 데 쓰이고 있으나 그 본래 역할은 눈썹돌을 지지하는 기둥이었다. 주실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흙을 막고, 빗물 또한 최대한 차단하고(아주 막지는 못하겠지만) 또 본존불 앞으로 쏟아지는 햇빛도 어느 정도 차단시키는 그 눈썹돌을 양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암에서 가장 많은 변형이 있었던 광창 자리

     

    그 결과 우리는 최소 다음과 같은 것을 잃어버렸다.

     

    "석존의 백호는 지금은 탈락되어 없으나 오래도록 매몰되어 땅속에 있었던 것을 최근의 수선 때에 토사 중에서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총독부의 박물관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전혀 행방불명이라고도 이르는데, 원래는 동해의 떠오르는 햇살이 새벽의 운무를 떨치고 만경창파에서 떠올라 훤하고 또렷하게 광명이 훨훨 타오르면 곧바로 굴내에 들어와서는 석존의 이마 위 백호에 반사되어 참으로 있기 어려운 대금광명을 발사하며 수정(水晶)의 이면(裏面)에는 황금을 붙여놓았다고 이르는데, 애써 수선을 하면서 예전과 같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일본인 한학자 오쿠다 테이가 1920년에 펴낸 '신라 구도(舊都) 경주지'에 쓴 글이다. 여기에서 '수선'이라고 하는 것은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총독부가 벌인 1차 수리공사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본존불의 백호를 찾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 본존불의 미간에 비쳤을 광명이 지금은 사라졌음을 말하자고 함이다. 지금은 인위적 조명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할 자격조차 없지만 과거 수선공사 전에는 이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광명은 광창을 통해 이루어졌다.(참고로 지금 본존불의 백호는 1966년 8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국내산 수정을 지름 4㎝ 두께 0.7㎝ 크기로 깎고 뒷면에 순금판을 받쳐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도 있다. 

     

    "(일본인이 반출한)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 놓인 불상도 본존불처럼 이마에 백호 구슬을 지니고 있었다. 동트는 새벽의 첫 번째 빛이 석굴암 입구와 그 위에 달린 광창을 통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와 닿고 거기서 반사된 빛은 두 보살상의 백호를 향해 내쏜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번 굴절되어 나온 빛은 본존불 후면에 있는 11면 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친다. 한마디로 새벽의 짧은 한순간에 석굴암 내부의 조명 효과를 극적으로 제고한다" 

     

    미술사학자 겸 교수인 존 카터 코벨(John Cater Covell, 1910~1996) 여사의 윗 글은 다분히 영화적이라 믿기는 좀 힘들다. 하지만 과거, 광창을 통해 들아온 햇빛이 주실에 영롱히 비친 것만큼은 사실이다.  

     

     

    존 카터 코벨. 캐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학을 가르친 지한파 교수다.
    존 카터 코벨의 저서. 그녀는 이외에도 3권의 한국에 관한 챘을 썼는데, 그녀의 주장을 따르자면 야마토 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족이 세운 나라다. 
    코벨의 말을 빌리자면 광창을 통해 들어온 새벽 빛은 본존불의 백호에 반사되어 쓰리쿠션 된 후 
    바로 뒤에 위치한 11면 관음보살의 이마를 비춘다. 

     

    다음 회에서는 석굴암의 구조적 측면에서 광창을 고찰해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오래 전 말 많았던, 하지만 이제껏 답을 찾지 못한 아래의 √2 문제에 관한 글('석굴암에는 √2의 비례미가 없다!')을 읽고 가자.(글이 너무 길어 읽기 힘든 분은 아래 신문기사를 읽어도 무방하다)

     

     

    '석굴암 √2의 비례미론'을 주장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님께 드리는 반론

     

    안녕하십니까, 유홍준청장님!
    저는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일하는 신형준기자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전도사’로서 애쓰시다가 문화재청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아 우리 문화유산 행정까지도 책임지시게 된 유청장님께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키신 유청장님의 그간 활동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유청장님께 경의를 표하면서도,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외람되게도 석굴암의 비례미와 관련해 청장님께 반론을 펼까 합니다.

     

    그것은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는 유청장님의 논리가 기실 얼마나 ‘논리적으로 부실한가’ 혹은 ‘논리적으로 근거없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석굴암에 루트 2의 비례미가 있으면 어떻고, 없은들 어떻겠습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굳이 반론을 펴는 것은 문화유산과 관련한 청장님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100만권 이상이 팔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유청장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졌던(혹은 앞으로도 가질) 독자들이, 그리고 국민들이 자칫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근거없는 과장이나 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였을 때 초래될 수 있는 폐해가 걱정돼서입니다.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1994년 창작과 비평사 刊)에서 일제시대 건축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을 수용해 “석굴암이 루트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오늘자(2005년 1월 3일자) 어느 일간신문을 보니 청장님은 다시금 “석굴암이 루트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고 주장하셨더군요.

     

    저는 쓴웃음이 났습니다. 청장님께서 수장을 맡으신 문화재청의 전신(前身)인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 수리를 하면서 석굴암을 정밀 실측했습니다.

     

    그 실측치는 1967년에 출간된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 이미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석굴암이 요네다 미요지가 주장했듯 √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 주장의 기초랄까, 전제가 되는 것은 석굴암 주실(主室·본존불을 모신 공간)의 반경이 12당척(1당척은 29.7cm로, 대략 3m60cm)으로 이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석굴암 주실은 곳에 따라 반경이 10당척(약 3m)인 곳도 있고, 13.4당척(약 4m)인 곳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측점에 따라 반경이 1m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석굴암 주실은 반듯한 원(요네다 미요지는 이를 완원<完圓>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이 아닌 셈이지요.

    따라서 석굴암 주실 반경 12당척을 논리의 전제로 삼았던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은 사상누각이었던 셈입니다.
     
    자! 이 장면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우리 한 번 해볼까요? 즉 ‘석굴암 √2 비례미론’이 어떻게 생성됐으며 어떻게 학문적으로 ‘확대재생산’돼 갔는지 말입니다.

     

    그 과정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우리 미술사학계, 아니 국학계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석굴암 √2 비례미론’을 받아들였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유청장님도 잘 아시듯 ‘석굴암 √ 2 비례미론’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직원이던 일본인 건축기사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1940년 발표한 ‘경주 석굴암의 조영(造營) 계획’에서 처음 제기됐습니다.


    요네다 미요지에 따르면, 석굴암은 원형 주실(主室·본존불을 모신 공간)의 반경 12당척을 모든 비례미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존불을 모신 대좌(臺座) 8각형 앞쪽 변(요네다는 이를 전변<(前邊>이라고 표현했지요) 중심을 석굴 주실의 중심으로 간주했고, 여기서 석굴 주실의 반경(즉 주실 중심~주실 벽면을 이루는 11면 관음상이나 10대 제자상 등 판석이 존재하는 곳까지의 거리)을 측량한다면 12당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석굴암 주실 반경값 12당척을 기준으로 ①12당척에 루트 2를 곱하면(즉 12당척X√ 2) 본존불의 총 높이(본존불 대좌를 포함한 높이)가 나오며 ②12당척+(12당척X√2)하면 석굴의 총높이가 산출되고 ③12당척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의 수선의 길이 10.4 당척의 절반 길이인 5.2당척을 대좌(臺座·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구조물) 8각형 간석(竿石)의 마주 보는 변과 변의 폭으로 삼아 대좌의 모든 규격이 결정되는 등 석굴암 건축에는 엄밀한 √2의 비례미가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는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에서 석굴암 비례미론은 자신의 실측치와 일제가 수리 공사(1913~1915년)를 하면서 제시한 실측치를 참고해 전개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데 요네다 미요지는 그 스스로도 실토했듯이 “석굴 주실의 평면 형태는 완원(完圓)으로 계획되고 시공됐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엔 약간 이그러져 있다”며 “이는 처음 쌓을 때 석굴의 부재를 이음하면서, 또는 수리 때의 착오로 그렇게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석굴암의 축조 계획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완원의 평면으로 구성됐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석굴암 건축에서 √2의 비례미를 이야기하면서도 석굴암이 실측치상으로는 명백하게 √2의 비례미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약간 이그러져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석굴암 주실은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처럼 ‘약간 이그러져 있는 것’에 불과할까요?

     

    문화재관리국은 1961년 9월 13일부터 1964년 6월 30일까지 석굴암을 수리했습니다. 무너져내리는 석굴암을 보수하기 위해 일제가 1913년~1915년 석굴암 해체 수리, 그리고 1917년과 1920~1923년에 걸쳐 두 차례 더 보수를 하는 등 모두 세 차례 보수공사를 했지만 여전히 석굴암 보존에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문화재관리국은 다시금 철근콘크리트로 석굴암 주위에 돔을 씌우는 공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 공사에 앞서서 문화재관리국은 석굴암을 정밀 실측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석굴암 주실의 반경은 요네다 미요지가 ‘석굴암 주실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던 ‘대좌 8각형 앞쪽 변(전변前邊) 중심’을 중심점으로 삼았을 때 측점에 따라 어느 곳은 10당척(약 3m)이고 어느 곳은 13.416당척(약 4m)인 것으로 판명됐지요.

     

    다시 말해 석굴암은 요네다 미요지가 주장했듯, 주실 평면이 12당척을 반경으로 반듯하게 축조된 원의 형태가 아니며, 곳에 따라 반경이 1m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원이란 무엇입니까? ‘중심점에서 같은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의 연속’입니다. 만약 중심이 없다면? 당연히 원이 아니지요. 중심이 없는 원은 없습니다.

     

    석굴암을 실측한 결과, 소위 주실의 중심점이라고 간주되던 곳에서의 반경 수치가 일정하지 않고 1m씩이나 차이가 난다면, 결국 석굴암 주실은 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들 즉 ①석굴암 주실의 평면은 반경 12당척으로 이루어진 원형이며 ②석굴암의 높이는 석굴암 주실의 평면 반경 12당척+(석굴의 반경 12당척X√2)에 따라 결정됐으며 ③석굴암 주실 입구 양 끝에서 12당척으로 정삼각형을 만들면 그 꼭지점은 석굴암 주실 평면의 중심인 본존 대좌 8각형 앞쪽 변(前邊)에 닿고 ④석굴암 주실 평면 반경인 12당척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수선의 길이(10.4당척)의 절반 길이인 5.2 당척은 본존 대좌 구성의 기본 수치가 됐으며 ⑤대좌 바닥에서 본존 불상의 총 높이인 17.04당척은 석굴암 주실 평면의 반지름 12당척X√2배에 해당하는 길이라는 그의 모든 핵심적인 주장은 근본부터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문화재관리국이 1967년 펴낸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 60~68쪽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이중 석굴암 주실 반경 실측치에 대한 부분은 62~63쪽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이 잘못됐으며, 요네다 미요지의 실측이 맞다고 주장하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 분을 위해서 한가지 방증을 더 하겠습니다.

     

    일제는 1913년~1915년 석굴암 제 1차 수리공사(이 때는 석굴암을 해체한 뒤 수리하는 대대적인 공사였습니다) 때 석굴암 실측 도면을 남겼습니다.

     

    이 도면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문서 목록 110-4번’과 ‘보존문서 37-3번’에 남아 있습니다. 두 도면 모두 실측치가 같습니다.

     

    한데 이 도면에 나타난 석굴암 주실의 모습은 석굴암을 해체 수리하기 전의 주실 평면상태를 일제가 기록한 ‘석굴암 재래 기초 평면도’와는 완연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석굴암 해체 수리 이전, 즉 1913년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는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제가 남긴 석굴암 주실 직경의 실측치와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주실 직경의 실측치가 같다는 점에서 요네다 미요지는 1913~1915년 석굴암 해체 수리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석굴암을 1차로 보수하면서 남긴 실측치를 인용, 혹은 참고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한데 일제가 석굴암을 1차로 보수한 뒤 남긴 석굴암 주실 직경 실측치를 보면 소위 석굴암 주실의 중심이라고 간주되는 ‘대좌 8각형 앞쪽 변<前邊> 중심’을 직교하는 횡직경과 종직경 밖에는 없습니다. 요네다 미요지의 수치 역시 이와 동일합니다. 그 역시 이 수치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두 곳의 수치를 석굴암 주실 평면 반경의 대푯값으로 간주할 수 없음은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드러납니다. 문화재관리국은 반경을 측정하기 위해 최소한 12곳을 실측했습니다.(보고서 63쪽 참고)

     

    소위 ‘횡직경’과 ‘종직경’ 단 두 수치만을 실측한 기관(혹은 사람)과 12곳의 반경을 실측한 기관. 둘 중 어느 곳이 더욱 치밀하게 실측했을까는 여기서도 드러나는 셈이지요.

     

    게다가 문화재관리국은 1967년 보고서를 펴내면서 “일제가 어떠한 방법으로 실측치를 표기하고 어떠한 방침에 의거하여 실측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여 논평할 방도가 없으나, 우리들이 실측한 것과는 별로 부합하는 것이 없었다”(보고서 63쪽)고 일제의 실측치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문화재관리국의 보고서가 나온 이후로도 내로라하는 우리 미술사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여전히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매력적이겠지요. 서기 8세기 중엽의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이, 고도의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2의 비례미까지 갖추었다니...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 실린 ‘토함산 석불사’에서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석굴암 √2 비례미론을 사실로 받아들이셨지요.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 195쪽에서 “요네다 미요지는 석굴의 평면을 3자짜리 방안지상에 그려 그 수치의 상호관계가 치밀함을 증명했다”고도 하셨습니다.

     

    덧붙여 “석굴암의 정확도는 1만분의 1에 달한다”며 “신라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과학적이고 치밀했다”고 극찬하신 뒤 “그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기술에는 우리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이 뒷받침돼 있었던 것”이라고 기록하셨지요.

     

    유청장님! 청장님이 지휘하시는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펴낸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를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석굴암은 결코 반듯한 원의 형태로 축조된 구조물이 아닙니다.

     

    혹시 청장님도 요네다 미요지처럼 1913년~1915년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하면서 석굴암이 지금처럼 일그러진 모습이 된 것이 아닐까, 변명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석굴암에서 √2의 비례미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살핀 국립중앙박물관 고문서목록 110-4번과 보존문서 37-3번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는 제 1차 수리공사(1913~1915년)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 1차 수리공사를 마칠 즈음(혹은 직후)의 실측치만 남겼을 따름입니다.

     

    요네다 미요지 역시 일제의 석굴암 1차 수리공사 이후에 기록한 실측치를 참고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켰습니다. 결국 ‘일제가 손대기 전의 석굴암에는 분명 √2의 비례미가 건축상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때문에 신(神)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네다 미요지조차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에서 “석굴암은 그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음이 문헌에 보이며, 1913년에는 전면 해체 수리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석굴이 당초의 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단지 석굴 중요부분과 전실의 짜임이 성실상 크게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 역시 ‘해체 수리 뒤 석굴암에 약간의 변형은 있었을 것이나, 석굴암 주실은 판석 위 아래에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받침돌(면석)이나 이맛돌 때문에 해체 뒤 다시 짜맞추려면 주실 만큼은 크게 변형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논지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네다 미요지의 √2 비례미론은 비판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제의 실측치보다 더욱 면밀히 석굴암을 실측했던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석굴암은 √2의 비례미를 충족시키는 실측수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일부 미술사학자가 주장하듯,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수리하면서도 전혀 원형을 변형시키지 못했을 본존불 뒤편의 두광(頭光)이나 천개(天蓋), 그리고 불두(佛頭·부처님의 얼굴 길이) 사이에 √2의 비례미는 커녕, 어떠한 정수적 비례미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두광은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좌우 길이가 224cm 정도이고, 위 아래는 228cm 정도로 반듯한 원이 아니며, 천개는 직경이 248cm 정도, 불두는 미술사학자 강우방선생에 따르면 110cm인데, 문명대선생이나 요네다 미요지에 따르면 115cm 정도였습니다. √2의 비례미를 구현했다는 통일신라인의 작품치고는 상호 수치 차이가 크지요?

     

    유청장님!

    요네다 미요지는 그나마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음을 내가 증명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주 석굴암의 조영(造營) 계획’에서 내내 √2의 비례미와 실측치 사이간의 괴리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논문 제목은 ‘경주 석굴암의 비례미’가 아니라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2의 비례미에 따라 석굴암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제가 해체 수리를 잘못한 탓인지, 아니면 서기 8세기 석굴암을 막상 축조할 당시의 잘못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2의 비례미가 실측치상으로 석굴암에 구현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속되게 말하면 ‘빠져 나갈 구멍’, 즉 ‘학문적 알리바이’를 요네다 미요지는 마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청장님은 너무 쉽게 석굴암 건축에서 √2의 비례미가 증명됐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석굴암 √2 비례미론’의 주창자격인 요네다 미요지조차 이를 증명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유청장님!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요네다 미요지를 기리며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 그 해까지도 땡볕에서 부소산성을 측량하던 백면의 기술자이고 무명의 건축학도였던 그가 말없이 성실하고 치밀하게 측량했던 그 경험을 토대로 불과 3년만에 이처럼 위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인생을 사는 법과 학문하는 법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그의 삶은 ‘작은 것의 힘, 작은 것의 위대함,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중략)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있다’는 뜻으로 ‘소중현대’(小中顯大)라고 하였다. 요네다의 학문에는 곧 ‘소중현대’의 방법론적 실천이 있었으며 그의 일생은 ‘소중현대적’ 인생이었다.”

     

    소중현대를 진정 깨달으셨다면, √2의 비례미니 sin(사인) 9도의 정현(正弦)법칙이니 하는 어려운 말보다는 석굴암의 실측치부터 세세히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문화재청에도 1967년 발간된 당시의 수리공사보고서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석굴암이 축조된 서기 8세기에는 √로 상징되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 개념이 동양에는 없었습니다.(사실 무리수는 BC 5~6세기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발견됐지만, 그 정확한 개념은 극한과 연속 등의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밝혀지게 됐으며, 19세기말 칸토르나 데데킨트, 바이에르슈트라스 등에 의해 그 기초가 확고하게 됐지요.)

     

    당시 동양의 대표적 수학서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이나 주비산경(周髀算經)을 잘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시에는 원주율을 나타내는 π값조차도 무리수인 3.141592...로 계산되기보다는 정수인 ‘3’으로 계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빼어난 미술사학자이시자, 우리 문화유산 행정을 책임지시는 유청장님에 대해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화유산과 관련한 유청장님의 영향력이 너무도 크다고 생각되기에, 그리고 잘못된 지식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전파됐을 때의 결과에 대해 누구보다 우려하고 있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몇 자 비판하게 됐습니다.

     

    그저 ‘사실찾기’를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어느 박눌한의 지적이었다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유청장님이 현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사학자 중 한 분이시라는 점에는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 지적에 반론을 제기하시겠다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유청장님이 아니어도,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다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어느 누구의 반론이라도 환영하겠습니다.

    유청장님이 항상 건승하시기를 바라며, 못난 사람 난필 맺습니다.
     
    신형준 올림

     

     

    유홍준이 제시한 그림- 왼쪽 그림에는 '요네다가 그린 측량도면/석굴구조의 치밀한 수리적 관계가 한눈에 증명되고 있다'는 설명을 달았고, 오른쪽 그림에는 '요네다가 그린 본존불의 측량도면/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 대각선 √2의 연속적인 전개를 보여준다'는 설명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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