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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불국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이유(II)
    미학(美學) 2020. 7. 8. 00:00

     

    김대성이 불국사를 조영할 때 가장 염두에 둔 곳은 자하문과 청운교 백운교 구간으로 그의 노력과 정성은 지금도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뜻은 전달되지 않는다. 앞서 I편에서 말한 대로 구품연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니 보랏빛 물안개가 피어난다는 자하문(紫霞門)이나 물 위에 뜬 누각 같다는 범영루(泛影樓), 물 위의 흰 구름과 푸른 구름 같은 다리, 백운교(白雲橋) 청운교(淸雲橋)도 그 맛이 살아나지가 않는 것이다.

     
     

    자하문과 백운교 청운교 / 아래 홍예교가 백운교, 그 위쪽이 청운교로 신라 시대 이 다리 밑은 모두 연못이었다. 백운교 청운교는 따로 국보 23호로 지정됐다.
    구품연지에 물을 공급하던 수구(水口)
    수구로 물이 쏟아지는 사진 / '안장현의 문화유산과 사진 이야기'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과거에는 수곽을 만들어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왔고 지금도 비가 오면 경내의 빗물이 수구로 흘러나온다고 하는데 그것을 찍은 것인지 포토샵 사진인지는 알 수 없다.

     
    구품연지의 상실은 그외에도 또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그중 하나는 이곳이 원래부터 올라갈 수 없는 다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없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백운교와 청운교는 연못 속에 섬처럼 떠 있는 곳으로 처음부터 오를 수 없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탑이 이 연못에 비췄다는 점과* 연못의 이름이 구품연지라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 백운교와 청운교가 섬 처럼 떠 있을 정도의 넓이가 아니면 경내의 탑이 비출 수가 없다. 또한 이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회랑이 개방형일 때만 가능하다.
     
    말한 바와 같이 구품연지라는 이름은 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수무량수경>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연못은 부처님이 설법을 행하는 장소이기에 따로 '연화장(蓮華藏) 바다'로 불리기도 한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전에 이르게 되지만 김대성은 그곳에 연못을 둘러 다리에 오르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구품연지의 세계를 보여주기는 하되 그것을 직접 경험하려면 먼저 칠보교와 연화교를 올라 극락전에 계시는 일승(一乘)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받거나 그와 경전을 논해 이겨야만 한다. 

     

     

    안양문과 칠보교 연화교 /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는 계단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리를 말함이다. 이 또한 구품연지가 있기에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모두 바랬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극락전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건물을 1750년(영조 26) 복원했다. 하지만 초석과 기단은 신라시대 것으로 추측된다.
    극락전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 / 창건 당시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라시대 것은 맞다. 당시의 불상이 제 자리에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김연숙의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님이시여' 라는 노래에는 '연화장 바다에 돌아가겠다'는 가사가 등장한다. 부처님에게 귀의하겠다는 뜻이다.

    노래 듣기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열반에 들지 않은 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다. 까닭에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에 들어서면 이미 극락에 든 것과 다름없다.(안양 또한 극락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그 전각의 이름도 극락전이다. 지금의 관광객들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대웅전 일곽에만 몰리고 별로 볼 것 없는 극락전 일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곳이 되었지만 신라시대에는 이 극락전 구역에 훨씬 많은 참배객이 몰렸다. 어느 정도의 가르침을 터득하기 전에는 감히 대웅전 일곽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며, 또 괜히 가봐야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에 신라시대에는 극락전 일곽이 대웅전 일곽만큼 컸으니 아래의 사진에서는 이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위쪽 대웅전 회랑(계단이 있는 쪽)과 T자 형태로 얽혀 있는 회랑은 본래 회랑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다. 즉 이곳은 극락전 뒤에 있던 법화전(法華殿)의 앞마당 같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대웅전 석축을 뚫고 나온 듯한 보기 흉한 회랑으로 가로막혀 있다.(아래 사진 초석만 놓인 빈 터가 법화전 자리다)
     
    이 보기 흉한 결합은 극락전 앞에서도 발견되는데, 현재 대웅전 서쪽 석축과의 L자 형 회랑 결합이 된 곳은 행랑이 있던 자리로<불국사고금창기>에 기록된 극락전 26칸 행랑채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법화전은 기단도 초석도 망실되어 복원 자체를 엄두낼 수 없던 까닭에 나름대로의 고육책으로 회랑을 만들어 격리시켜 버렸지만, 어찌 됐든 극락전 일곽은 관음전 일곽과 더불어 불국사 전체에서 가장 이상하고 제멋대로 복원된 장소임에 틀림없다.  

     
     

    법화전 터 / 그 앞으로 대웅전 석축과 회랑을 뚫고 나온 듯한 높이가 맞지 않는 회랑이 보인다. 이쯤되면 복원이 아니라 엉터리 창작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사실 법화전 터도 본래부터 있었는지 불국사 정비 때 나온 돌들을 모아 놓은 곳인지 불분명한 건물지이다.
    극락전에서 대웅전 오르는 계단 / 이 3열을 지어 쌓은 계단이 각각 16개이므로 모두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이 전생에 수행자 시절 세웠던 48가지의 서원(誓願)을 의미하는데, 48원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건립한 법장비구의 뜻을 기린 것이다. 좌측의 회랑이 위에서 말한 문제의 회랑으로 규칙을 깨며 억지로 만든 탓에 불국사 전체에서 가장 보기 흉한 공간이 됐다. 이 뒤에 바로 법화전 터가 있다.(아래 배치도 참조)

     

    극락전 아미타불의 도움으로 대웅전 일곽으로 오르게 되면 비로서 석가모니의 연화장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바로 뒤가 무설전(無說殿)인데 설법보다는 주로 참선을 행하는 문자 그대로의 무설(無說)의 전각이다. 극락전에서 충분히 가르침을 받고 대웅전 일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만큼(I편 참조) 더 이상의 가르침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선종(禪宗)은 신라 하대에 유학승(留學僧)들이 들어왔다는 통설과 달리 중기(中期)에 들어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이건 그냥 개인적 견해임)

     
    하지만 설법이 전혀 행해지지 않았을 리는 없으리니 671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유학승 의상대사가 이곳 무설전에서 행했다는 설법은 석가모니의 녹야원(鹿野苑) 초전법륜만큼이나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까 한다. 그 외에도 오진(悟眞) · 신림(新琳) · 표훈(表訓)대사의 설법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무설전은 확실히 김대성의 건립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듯 단계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대웅전·무설전 일곽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관람객들은 처음부터 대웅전 회랑 옆구리에 뚫린 개구멍 같은 문을 통해 곧장 들어오게 되는 바, 이로 인해 아무것도 느낀 게 없게 되는 뒤죽박죽 관람의 문제점을 I편에서 피력한 바 있다.
     
     

    오른쪽 화살표는 지금의 출입구다.
    불국사 부감
    대웅전 / 2011년 12월 30일 보물 1744호가 됨으로써 문화재 지정 막차를 탔다. 1909년 복원한 아래 대웅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양쪽 바깥칸이 나무판자에서 문으로 바뀐 것 외에 외양이 그대로 보존됐음을 알 수 있다. 의미적으로 불국사 대웅전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상을 뜻한다고 한다.
    1924년 대웅전 사진 / 일제에 의해 수리된 모습이다.
    대웅전 앞 석등 / 백과사전 등에는 완형의 신라시대 석등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국보나 보물이 아니고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했다. 완형의 신라 석등이 아니라는, 쉽게 말해 제 짝이 아니라는 뜻이다.

     

    과거에 비로전은 대웅전·무설전과 거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의 발굴로 터전이 확인되어 1973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중건했다. 비로전 속의 비로자나불은 연화장 세계와 우주 전체를 관할하는 최고의 부처님으로 석가모니불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자마자 비로자나불과 일체를 이루었다 한다. 모든 부처의 근본이요 중심으로 간주되는 까닭에 불국사 비로전은 대웅전 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 다른 절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혹은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부르는데,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협시할 정도로 끗발(?)있다. 법당에 빛 광(光)자가 들어가는 이유는 비로자나의 뜻이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불은 설법하지 않는 부처님이라는 특징도 갖는다.
     
     

    비로전 / 1805년 비로전을 수리했다는 사적(史籍)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불국사의 역사적 기록은 사라진다. 사적에 의하면 최초의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건립했다. 지금의 3배 규모였다는 얘기다.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 좌상(국보 26호) / 최치원이 찬한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 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 )>에 진성여 왕이 화엄 사상에 입각해 조성했다고 한 바로 그 불상이다. 대좌와 광배는 없어지고 몸체만 남았으나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가 석굴암 본존불에 맞먹는 불상이다.
    비로전 옆 광학(光學)부도 /  유니크한 아름다움에 반한 일본인에 의해 1906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33년 천운으로 되돌아왔다. 이 부도는 세이요켄(精養軒)이라는 요릿집 정원의 장식품이 되었다가 다시 와카모토 제약회사 사장 나가오 긴야(長尾欽彌)에게 고가에 팔려갔으나 그가 조선총독부에 기증함으로써 되돌아오게 되었다.
    세이요켄에 있을 때의 광학부도 /  세이요켄은 도쿄 우에노 공원 근방의 유명 요릿집이다.(지금도 있다)  '광학'은 헌강왕비(妃)의 법명이다. 나는 이 사리탑을 볼 때마다 신라왕비가 일본인에 능욕을 당한 듯한 치욕스러움을 느끼나 이것이 광학부도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니(광학부도가 이것이 아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말)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아니면 되돌아 온 것을 위안 삼아야 하나?

     

    관음전 일곽이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은 <법화경>과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의거해 보타락산(補陀落山)의 세계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복원에 참여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산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계단식으로 조성돼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관음전 석축 역시 신라 시대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관음전 앞에는 보락교(補落橋)라는 다리가 해안문(海岸門) 아래 있었고,(관음보살이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임) 명부전 앞에는 육도교(六道橋)가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가 관음전과 명부전 앞을 흘렀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물이 대웅전, 극락전의 지하를 흘러 구품연지로 유입됐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명부전은 지금 사라졌고* 관음전 해안문 앞에는 보락교 대신 멋대가리 없는 가파른 돌계단이 놓여 있다.**
     
     

    해안문 앞의 돌계단(2015년 사진) /  낙가교(洛迦僑)라 이름 붙여진 관음전 계단은 지금은 난간까지 만들어 더욱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차라리 난간이 없던 2015년 이전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사진출처: '서울신문')

     

    * 기타 오백성중전, 천불전 일곽이 사라졌고 시왕전, 십륙응진전, 문수전 등의 전각도 사라졌다. 기타 승방으로 여겨지는 동당, 서당, 동별실, 서별실, 청풍료, 명월료, 영빈료, 객실 등도 소실됐으며 문(門), 고(庫), 누각, 종각 등 없어진 부속건물과 암자도 부지기수다.
     

    ** 원래 해안문에는 좌우로 회랑이 있었고 그 양쪽에 취죽루(翠竹樓)와 녹양각(綠楊閣)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취죽은 검은 대나무이고 녹양은 푸른 버드나무로서 이 또한 관음보살의 거처를 상징한다.

     
    높은 곳에 자리한 보락교와 육도교, 그리고 그 다리를 타고 흘렀을 명경지수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환상적이지만 그것을 재현할 방법은 없다. 또 관음전 안에는 922년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만든 전단향목(栴檀香木)의 관음보살상이 있었다 하나 없어졌고, 지금의 것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새로 조영한 것이다. 사적에 따르면 관음전 관음보살상은 1674년, 1701년, 1769년 세 차례에 걸쳐 개금되었다. 따라서 이 보살상은 18세기 중엽까지도 존재했음이 분명한데,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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