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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선종의 원류 2 - 단속사 대감국사비 속의 남종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3. 13. 21:09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외리의 단속사(斷俗寺)는 앞서 말한 대로 신라 경덕왕 시절쯤에 세워진 절로, '단속'이란 절 이름에는 당시 상대등(국무총리)을 지낸 신충의 입산수도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즉 그가 이곳 지리산 자락에 절을 세워 입산하며 속세와의 연을 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충 이후로는 속세와 가까운 절로 은성한 듯싶으니, 절과 얽힌 이야기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매우 풍성하다. 

     

    흥미로운 이야기들로만 추리자면, 우선 신라의 유명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이곳에 있었고, 신품사현(神品四賢, 신라·고려의 명필 네 사람)으로 불리던 탄연(坦然) 스님이 주석하였으며, 개경에서 내려온 무신정권 최우의 장남 최만종이 주지로써 행패를 일삼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탁영(濯纓) 김일손과 남명(南冥) 조식, 사명당 유정 등이 족적을 남겼는데,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김일손의 지리산기행문인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에 나오는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의 비문이다.

     

     

    대감국사비 탁본(부분)

     

    "5리쯤 가니 뽕나무 밭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장경판각(藏經板閣)을 지나 절 문 앞에 이르니 대감국사(大鑑國師)의 행적비가 있었는데, 고려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쓴 비문으로 대정연간(大定年間, 11611189년) 세워진 것이었다..... 말을 나눠보니 이곳의 석해(釋該) 스님은 제법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가 되었다....." 

     

    젊은 선비 오만함이 배어 있는 그 기행문 속의 절 단속사는 숭유억불의 조선조까지도 은성한 듯싶으나 조선 말에 폐사되었고, 대감국사의 행적비 역시 망실되어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비의 탁본이 문경 금룡사(金龍寺)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는데, 오늘 다루고자 하는, '신라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고 하는 조계종 홈페이지 주장이 바로 그 비문에 근거한다.(비문은 앞의 글 '한국 선종의 원류 1 - 조계종은 어디서 왔는가?'에 실었다)   

     

     

    단속사는 폐사되었고 지금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2기만이 남아 있다.

     

    문제의 글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는 비문의 타이틀과 같은 문장으로 서두에 등장하는데, 조계종 종단에서는 이 글을 근거로 '신라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거니와 이와 같은 주장은 무식의 소치이거나 혹은 조계종의 발생 시점을 구산선문보다 올려 잡으려는 고의적 오류이다.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단속사는 신라 구산선문하고는 무관한 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라는 문장에서 '신라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는 발상이 어떻게 도출될 수가 있는지 묻고 싶다. 이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고려국 조계종은 오히려 사굴산문(闍崛山門, 굴산선문) 아래의 단속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고, 대감국사 탄연(1070-1159) 역시 사굴산문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이는 인종 3년(1125)에  '대선사 조응(祖膺)이 조계선(曹溪選)에 합격했다'는 기록과도 연관된다.

     

    즉 조계종은 보조국사 지눌 이전에도 존재했었으나, 그 시점을 구산선문보다 앞서 잡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탄연스님 시절부터 잡는 게 무난하다 할 수 있는 해석이다. 그 가운데서 단속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북종선) 사찰인 단속사는 신행(神行)* 후 사굴산문에 들었고, 그 절에 1148년 78세의 노국사(老國師) 탄연이 들어와 13년 간을 머물다 입적한다.**

     

    * 잘 알려진 대로 단속사는 당나라에서 북종선(北宗禪)을 배우고 돌아온 신행(神行)이 수행· 입적한 곳이고,(혜공왕 15년/779) 단속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청도 호거산(虎踞山) 법랑(法郞)에게서 북종선의 가르침을 받았던 바,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사찰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신라 하대 선풍을 주도했던 육조혜능 계열의 남종선과는 다른데,  어느 순간 북종선의 종풍(宗風)이 소실되고 구산선문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사굴산문의 계열의 사찰로 편입되었던 것 같다.

     

    ** 비문의 '1148년 늙은 연이 진주 단속사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다'(其德二年丁卯師乞歸老于晋州斷俗寺)라는 내용을 보면 탄연이 젊어서 사굴산문의 단속사에서 수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탄연은 젊은 시절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혜조국사의 계열은 알 수 없고, 다만 '탄연은 임제의 9대손에 해당한다'(師乃臨濟九代孫也)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혜조국사 담진은 임제종을 개창한 임제의현의 문하임을 알 수 있다. 탄연은 중국에서 수학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담진은 그중에서도 특히 임제종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문하였음이 짐작되는데, 이는 탄연이 자신이 지은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법어(上堂法語)를 장사꾼의 배편을 통해 절강성 영파(寧波) 아육왕산 광리사(廣利寺, 현 아육왕사)에 있는 개심(介諶, 1080~1148)에게 보낸 사실로 알 수 있다.

     

    * 개심은 임제종 황룡의 5세손으로, 탄연의 글에 감복하여 인가의 답장을 보낸다. 이때 탄연은 개심으로부터 서면으로 인가를 받았으므로 흔히들 탄연을 '임제종 법맥 9대손'이라 부른다.(이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조국사 지눌(일반적으로 조계종의 개창자라고 알려진) 역시 사굴산문의 승려였다. 앞서 '구산선문과 조계종'에서 언급한 대로 신라말 범일(梵日)이 개창한 강릉의 사굴산문은 크게 번창하여 범일의 문하에서 개청(開淸) · 행적(行寂) 등의 이른바 10대 제자가 나왔고, 개청의 문하에서 다시 신경(神鏡) · 총정 · 월효 · 환언(奐言) · 혜여(惠如) · 명연(明然) · 홍림(弘琳) 외 수백인의 제자들이 나왔으며, 행적의 문하에도 신종(信宗) · 주해(周解) · 임엄(林儼) · 양경(讓景) 등 500여 명의 제자가 나와 종파를 전승하였다. 지눌은 이중 개청의 문하였던 종휘(宗輝) 아래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이색이 쓴 진각(眞覺)국사 천희(千熙) 비문에 '보조국사는 대감국사 탄연을 계승하고…'라고 한 것도 두 사람이 모두 사굴산파인 까닭인 바,(탄연이 입적하기 1년 전 보조 지눌이 탄생했으므로 직접적으로 법이 이어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볼 때 조계종은 사굴산문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신라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는 조계종 홈페이지의 설명은 전혀 터무니 없다 하겠다.

     

    조계(曹溪)란 중국 남종선의 개창자인 육조혜능의 별호로서, 그가 중국 소주부성(韶州府城) 동남을 흐르는 '조계' 부근의 남화사(南華寺)에서 수행한 데서 유래되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비문에 '조계의 한 파가 동쪽 땅으로 건너왔다'고 써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나 그것이 지금의 조계종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화사 조계문
    남화사 보림문 /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이 조계이다.
    남화사 천왕보전
    아육왕사 천왕전 / 중국 동진시대 창건된 선종 5산의 하나로 탄현과 교류한 개심이 머물던 절이다.
    아육왕사 대웅보전 / 아육왕은 인도의 아쇼카 왕을 말한다.
    아육왕사 묘승지전 / 석가모니의 정골사리(두개골)를 모셨다는 곳이나 실제로 사리는 따로 보관된 듯.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비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비 세부
    일연스님의 승탑인 인각사 보각국사탑
    보각국사비의 선조 때 탁본(부분)
    복원된 보각국사비의 머릿글
    파손된 보각국사비(보물 제428호)
    복원된 보각국사탑 / 일연스님의 승탑인 보각국사비는 1289년(충렬왕 15) 왕명으로 세워졌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민지(閔漬)가 지었고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었으니 조선조에는 습자(習字)에의 학구열에 불타는 선비들이 마구잡이 탁본을 떠대어 훼손됐고 금세기에 들어서는 비(碑)를 아예 통째로 들어가려는 도둑놈에 의해 완전히 파손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오대산 월정사에 완본의 탁본이 있었던 바, 2006년 일연스님 탄생 800주년을 맞이해 복원되었으나 결과는 영 아니었다. 무슨 글자인지도 알 수 없는 글자가 수두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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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