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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귀포와 통영의 바다, 그리고 이중섭
    미학(美學) 2022. 8. 29. 05:58

     

    과거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생활할 때 이중섭 미술관을 자주 찾았다. 서울에서 지인들이 왔을 때 반나절 코스로 구경거리로 가장 알맞은 곳이 「천지연 폭포ㅡ이중섭 미술관이 있는 이중섭 거리ㅡ서귀포 해변ㅡ칠십리음식특화거리」라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모두 지척이므로 걸어다닐 수도 있고, 그럼으로 해서 구 도심 관광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이 코스는 누구나 만족하며, 특히 해질 무렵 해변에 노을이라도 예쁘게 들면 (거의 매일 예쁘게 든다. 그래서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모두 기절한다. 그러면 나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 짓도 몇 번 하다보니 스스로는 심드렁하기 그지없으니 이중섭 초가(草家)에 살던 늙고 순한 잡종개의 마음을 알 듯도 하다. 걔는 복작대는 관광객 속에서도 늘 무표정하니 심드렁하게 배를 길게 깔고 앉아 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서. (아직 살아 있는지 궁금하다)

     

    그 집 맞은 편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은 사실 전시된 그림 그 자체보다 옥상에서 보는 해변이 그만이라 동행한 사람들은 거의가 "과연 이중섭 화백의 고향답다"고 입을 모은다. 그럴 때 "사실 이중섭 화백은 여기가 고향이 아니며 산 지도 1년이 채 안 된다"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그것을 포함해 주절주절 이것저것을 떠들었다. 바닷가와 함께 조망되는 에조틱한 성당에 대해서도 '이재수에 난'에 얽힌 폭력적인 과거까지를 들먹여가며)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이중섭 화백이 살던 곳 / 한국일보 사진
    그곳에 남은 전부
    이 집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중섭이 살던 흔적은 오른쪽 문 열린 방에 국한된다. 6.25전쟁 피난 시절, 그는 이 작은 방에서 가족과 함께 기거했다.
    이중섭 미술관
    미술관 입구의 황소
    미술관 옥상에서 본 섶섬 풍경

     

    그럼에도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특별한 곳이니, 그는 이곳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36년 일본 제국미술학교(현 무시시노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재능, 그리고 부잣집 아들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국미술학교의 획일적인 교육이 싫어 동경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는데, 이 시절 훗날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마사코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5년 5월 한국으로 와 이남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며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이중섭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둘이 태어났던 바, 이때까지는 마냥 행복할 것 같은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나며 모든 것이 흐뜨러지기 시작했으니 흘러흘러 제주까지 피난 온 이중섭 일가는 매일 매일을 궁핍과 싸워야 하는 힘겨운 삶을 보내게 된다. 아래의 그림들은 그와 같은 힘겨운 삶 속에서 이중섭이 건진 행복들이다. 그래서 그림만큼은 풍요롭고 따뜻하다. 

     

     

    이중섭의 결혼
    이중섭의 가족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 일본의 가족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이기도 하다.
    '물고기와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56x92cm)
    이중섭 은지화 '게와 아이들'(8.5x15㎝) / 이중섭의 그림에는 게(蟹)가 자주 등장한다. 당시 먹을 게 없어 게를 자주 잡아 먹었는데, 그것을 늘 미안해하며 자주 그렸다고 이중섭의 아내는 회고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32.8x58㎝)

     

    하지만 이 작은 행복과도 곧 이별을 해야 했다. 극심한 가난에 쫓긴 중섭은 부두 노동이라도 할 요량으로 부산으로 왔으나 즈음하여 장인의 사망 전보를 받는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1952년 부산항에서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이후 가족과의 만남은 중섭이 부두 하역으로 마련한 여비와 선원증을 가지고 이듬해 도일(渡日)해 1주일을 함께 한 것이 전부였다.

     

     

    지금의 부산 범일동과 이중섭이 그린 '범일동 풍경'

     

    중섭은 이후 통영으로 가 부두 노동을 하며 더불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중섭의 대작은 거의가 이때 탄생한 것으로, 위에서 소개한 대표작 '황소' 및 '흰 소', '통영 풍경',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세병관 풍경', '까치가 보이는 풍경', '가족', '달과 까마귀' 등이 모두 통영에서 그려진 것이다. (통영의 문화인들이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그림의 통영 유치를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흰 소'
    '세병관 풍경'
    '달과 까마귀'
    '까치가 보이는 풍경'

     

    그리고 서울로 와 미도파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림들은 호평 속에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후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수금이 잘 되지 않아 금전적 수익은 얻지 못했다. 이를 만회하고자 했던 이어 대구 전람회에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중섭은 기대했던 전람회가 뭉그러지고 더불어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또한 뭉그러지자 절망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에 그린 그림들 또한 매우 어두우며 깊은 절망이 배어난다. 

     

     

    이중섭의 슬픈 자화상 '피 뭍은 소'
    '투계' (싸우는 닭)
    '춤 추는 가족' / 그럼에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장으로서의 자책과 그로 인한 심인성(心因性) 거식증을 앓게 된다. 나아가 조현병 증세까지 보였고 결국은 1956년 간염으로 사망한다. 겨우 41살에 불과한 나이였다.

     

     

    1955년 연필로 그린 '자화상' / 이미 병색이 완연하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합동 전시회를 가졌을 때 「소품으로도 빛을 발하는 천재적인 작가」라는 일본 신문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곳이 위에서 말한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이다. 거기에는 대작이 드물고 담배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가 대종을 이루지만 그 그림들은 모두 빛난다.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지만, 최근에는 그가 환경에 맞는 새로운 회화를 추구했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런데 작년 이곳에서 고(故)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모았던 이중섭의 비교적 대작에 속하는 그림들이  '70년 만의 서귀포 귀향'이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이 열린 적이 있다. 위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도 그때 전시됐다 기증된 그림이라고 하는데,  마침 그때도 제주도에 있었던지라 꼭 가봐야 겠다 마음 먹었지만, 차일피일하다 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그때는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었던지라 (솔직히 말하면 오는 사람들을 기피했던지라) 기회가 안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ㅡ 이중섭'은 꼭 가볼 예정이다. 무려 90점이 전시되는 흔치 않은 기회임에도 지금은 예약이 밀려 엄두도 못내고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한가해 질 테니..... 기간은 2023년 4월 23까지 예정돼 있다. 그러면서, 만일 이 전시회가 통영에서 열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나는 갔을까? 아마도 갔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갔을 것이다. 이중섭이 그린 바다를 보기 위해서라도.....

     

    이중섭의 '통영 풍경'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ㅡ 이중섭' 포스터
    2012년 부인 이남덕은 서귀포 시절 가족이 함께 살던 위의 초가를 찾아 회상에 잠겼다. 들고 있는 팔레트는 1953년 헤어질 때 건네준 것인데 2012년 방한 때 서귀포 시에 기증했다. 이 팔레트는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 2005년 이중섭의 아들 이태성이 일본에서 가져 온 이중섭의 그림 8점을 경매에 내놓았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고가에 팔렸지만 모두 위작으로 판명났다.  이중섭 화백이 그렇게 사랑하고 사무치게 그리워 한 아들이었건만 그가 한 짓은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해 세상을 속인 일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의 생은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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