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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항문학 시대를 연 시인 유희경과 도봉계곡작가의 고향 2024. 3. 19. 18:26
두 번째 다시 만난 그 열흘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생전에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속되게 이해하자면 그간 변해버린 외모에 상호 실망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유희경의 문집인 을 보면 두 사람의 재회는 처음 만나고 나서 적어도 15년이 흐른 뒤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매창에게 20살 때의 아름다움이 남았을 리 만무하다. 매창보다 28살이 많았던 유희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빌려온 가정이지만 두 사람이 이렇듯 저급했을 리 없을 터, 그보다는 사회적 신분이 끝내 제약이 되었을 것이다. 나이로 볼 때 매창은 그때 현역에서 물러난 퇴기(退妓)였을 것이나 여전히 관비나 관기 신분이었을 터, 특별히 면천(免賤)되지 않는 한 유희경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모르긴 해도 유희경 또한 소실을 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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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시인 매창이 떠오르는 청계천 매화작가의 고향 2024. 3. 18. 21:22
앞서 말한 허난설헌의 예를 보면 조선시대에 문재(文才)를 누리려면 차라리 기녀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 법 싶다. 물론 규방문학이라는 게 있기는 했지만 문자 그대로 방 안에 머물렀다. 그래서 안타깝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조침문'(弔針文)이라는 고전 수필을 보더라도 이 여인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지만 작자의 이름은 물론 인적사항도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확인되는 것은 이 여인이 바늘 하나에 의지해 27년 동안 삯바느질을 해온 과부라는 것뿐이다. '조침문'의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이 여인은 자신이 아끼던 바늘이 부러지자 "모년 모월 모일 미망인 모씨가 두어 자(字)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하노라"로 시작되는 조문(弔文) 형식의 글을 지어 부러진 침자(바늘)를 애도하는데, 비장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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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와 춘원 이광수가 살던 세검정작가의 고향 2024. 3. 17. 00:36
작가 박종화의 호 월탄(月灘)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아호이다. 그 여울(灘)이 저 월(月)세계의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달빛 비추는 여울을 말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그저 멋지게 여겨진다. 작가라고 모두 다 작명에 능한 것은 아닐 것임에도 그는 작명에 있어서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의 집 사랑채에는 조수루(釣水樓)라는 당호를 붙였다. 물의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물을 낚자는 것인데, 월탄과도 상통하는 당호(堂號)이다. 세검정(서울 종로구 평창11길 80)에 있는 월탄의 집은 그가 죽기 6년 전 구입해 살던 곳이다. 사실 오고 싶어 온 것은 아니고 충신동 55-5번지의 옛집이 1975년 동대문~이화동 간 도로확장 공사 구간에 포함되며 어쩔 수 없이 이사하게 된 것인데, 오면서 충신동 집을 그대로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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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사산비명과 좌절된 개혁작가의 고향 2024. 3. 15. 18:12
고운(孤雲) 최치원은 통일신라 헌안왕 1년(857년) 금성(경주시) 사량부에서 6두품 최견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그는 6년 만에 당의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관리의 적체가 심해 임용되지 못하다가 2년 후 남경 부근 율수현의 하급 관리로 발령난다. 만족하지 못한 최치원은 사직하고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의 응시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운이 없었으니 875년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시험이 취소된다. 막연해진 그는 난의 진압에 나선 회남절도사 고병(高駢)의 막하로 들어가 진압 격문인 '토 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는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바로그 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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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사카오 탁본이 됐든 주운태 탁본이 됐든.잃어버린 왕국 '왜' 2024. 3. 13. 00:27
앞서 중국인 금석학자 잉씨(榮禧)가 광서 8년(1882) 임오년에 산동 사람 변단산(卞丹山)을 고용해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만족할만한 탁본을 얻은 사실을 말한 바 있다. 이때 얻은 탁본은 필시 석회가 덧입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떴을 것인즉 일본인 학자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는 이것을 유명한 역사 매거진 에 소개하며 '정확한 것임'을 더불어 강조했다. * 동경제국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는 독일 랑케 사학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엄격한 실증주의와 사료비판을 추구한 학자였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주관적 편견이 우선 작용하였던 바, '조선반도' 북부에 거주하는 예맥족을 '만주민족'으로 인식하였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 역사에 편입시키기는 했으되 중국 이주민이 세운 국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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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의 용은 승천할까? 능곡 혹은 아홉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12. 00:10
우리나라에서 아홉 마리의 용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구룡리, 구룡산, 구룡사, 구룡골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제껏 내가 다닌 여행지 중에서는 남원 구룡계곡이 최고의 절경으로 기억에 남는다. 정식명칭은 지리산국립공원 구룡계곡이나 지리산과는 멀리 떨어져 오히려 시내에서 가깝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의 비경(秘景)이기 때문일까? 남원사람들조차 구룡계곡을 물으면 잘 모른다. 까닭에 내비를 켜거나 물어 가기 위해서는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六茅亭)을 기억해야 한다. 육모정은 육각형 형태의 정자로 전국에 흔하지만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아홉 곳의 절경은 9경인 구룡폭과 구룡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구룡담은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좁아 보이나 오랜 세월 굽이친 급류가 암반을 깎아 만든 모양새는 확실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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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공동묘지 변천사와 개포동 구룡마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4. 3. 10. 00:09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구룡마을 재개발이 확정되었다는 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랫동안 강남땅을 지켜왔던 개포동 구룡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그간 꾸물대다 놓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어서 (최근엔 집에서 멀지 않은 상봉 시외버스터미널의 마지막 모습도 담지 못했다) 이번에는 곧장 현장으로 갔다. 어쩌면 구룡마을은 옴봄이 가기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가면서 논현동 사거리, 강남 개포아파트, 도곡동 그랑프리 백화점, 타워팰리스를 지났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두가 크고 작은 역사가 새겨진 장소들이다. 논현 사거리는 1990년 초까지만 해도 학동이던 곳으로 일대의 야산에 학(鶴)이 많아 학동으로 불리었다. 그 야산은 논현동 고개로 흔적을 남겼지만 학동이라는 지명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