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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흥 탑동의 탑과 보문동 탑골승방의 탑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4. 24. 23:51
돌아다니다 보면 탑동, 탑말, 혹은 탑리(塔里)라는 지명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의외로 그곳에 탑이 없을 적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경주시 탑동으로, 경주가 탑이 흔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근방에는 탑이 없다. 궁금한 마음에 좀 더 알아보니 이곳에 신라 때의 담암사(曇巖寺)라는 절이 있었고 폐사 후에도 탑이 남아 탑리라 불렸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담암사 탑은 근자에까지 존재했던 듯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반면 탑이 흔하지 않은 서울 속 탑동에는 탑이 존재한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서울탑동초등학교 부근 금천구 시흥동 탑골로에 있다는 려말선초(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 삼층석탑을 찾아 나섰는데, 조금 어려웠다. 사실 시흥동 탑골로(路) 탑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GPS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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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임해군 묘와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22. 20:44
좌절된 권력을 보는 것은 승자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기쁘겠으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40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623년 4월 11일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 그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번 설명했던 바, 마찬가지로 길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김류, 이귀, 이괄, 최명길 등의 반란의 무리가 창의문을 깨고 창덕궁으로 향할 당시, 광해군은 이미 반란의 급보를 접했음에도 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는 사육신과 함께 했던 김질이란 자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인조반정 때도 또 같은 일이 일어났던 바, 반정 무리 중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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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선군 이우의 사부곡(思父曲)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20. 22:38
인흥군 묘역에 관해 세 번째로 글을 쓴다. 앞서 '포천 인흥군 묘에 신도비가 두 개 있는 이유'에서 2차에 걸쳐 감행된 묘역의 훼손에 대해 언급한 바도 있지만, 이곳 인흥군·낭선군·전평군 묘역은 조선조 묘지 석조 유물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채롭고 이색적인 석물이 분포돼 있다. 그래서 훼손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게 되는데, 어떤 글에서는 '묘역 내에 인흥군 사후부터 1693년 낭선군이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에 걸쳐 조성한 65점의 석조 유물이 있으며, 그 중 20여 점에 명문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최대 규모이자, 전무후무한 사례로 그 금석문 가치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라고 찬탄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낭선군 이우가 조성한 이 묘역은 조선시대의 다른 무덤군에 비해 확실히 유니크하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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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인흥군 묘에 신도비가 두 개 있는 이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18. 19:15
인흥군(仁興君)의 묘는 포천 산정호수 가는 길에 있는 3.8선 휴게소의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다. 아래 사진은 포천시 김나경 시민기자가 찍은, 지금은 퇴색된 분단의 기억을 리얼하게 되살려주는 사진이다. 사진 속의 3.8정 카페 팔각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추억의 3.8선 휴게소' 붉은 간판은 사라졌다. 아무튼 인흥군의 묘찾기는 이곳부터 시작하면 되는데, GPS에 걸어서 15분 안쪽 거리라고 돼 있음에도 찾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분명 호국로 국도변에 인흥군묘 묘역 표지판이 있었던 듯한데,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건아조경' 석물이 있는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정상적인 코스는 아니지만 어찌 됐든 묘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서 '한글 표기가 있는 포천 인흥군 묘역과 노원구 하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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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표기가 있는 포천 인흥군 묘역과 노원구 하계동의 비석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17. 23:42
1886년, 동양의 코리아라는 미지의 나라에서 영어와 근대교육을 가르칠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명문가의 자제 호머 헐버트는 주저 않고 이에 지원해 조선에 왔다. 그때 헐버트는 이 미개한 나라가 우수한 자체 문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던 바, 훗날 이라는 잡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 한글을 발명한 우수한민족'이라며 한민족을 상찬했다. 그외에도 그는 여러 장소에서 '한글과 견줄 만한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한글을 극찬했는데,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할 때 한문을 아예 폐기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도 했다. 더불어 조선인의 한글 경시 풍조를 지적하기도 했던 바, '배우기 시작한 지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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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의순공주와 그의 아비 금림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4. 15. 22:01
서울시 중구 소공동(小公洞)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궁이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동네를 작은공주골,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洞名)으로 굳어진 것인데, 지금의 조선호텔과 황궁우 자리라 여겨진다. 경정공주와 남편 조대림이 살던 집은 1583년 선조의 아들 의안군이 거주하면서 200여 칸의 대저택으로 개축되었다. 이 대저택은 임진왜란 때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그의 직할군 숙소가 되었고, 다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명군의 숙소로 쓰였다. 이를 계기로 이후 이곳은 명나라 및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인 남별궁(南別宮)이 되어 조선주재 공사관의 역할을 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가 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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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 배신자 친중파 김자점의 최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4. 11. 21:39
앞서 말한 노량진 유원강변아파트와 래미안 트윈파크아파트 단지 앞으로는 바로 한강이다. 그리고 뒤로는 사육신묘 공원이 있는 바, 뷰(VIEW)로서만 따져본 주거환경으로는 가히 서울의 으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육신묘 외에 절의(節義)의 또 다른 표상 박태보의 위패를 모신 노강서원이 있었던 바, (유원강변아파트 103동 자리) 곱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라 하겠다. 이렇게 놓고 보니 갑자기 부동산 영업소의 블로그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부동산 쪽은 평소에도 그리 관심이 없고, 앞서의 소개도 사육신묘를 강조하고 싶음이다. 물론 사육신묘 자체보다는 그 충절을 강조하고자 함인데, 더불어 가슴 아픈 배신의 역사 또한 더듬어 보고 싶었다. 우선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 모두를 형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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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강서원이 있던 노량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4. 9. 21:02
용산에만 머물다 이윽고 눈앞에 보이는 한강대교를 건넜다. 그리고 취지에 맞게 옛 흔적들을 더듬어보았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는 정자로 조선 22대 왕 정조 임금의 화성 행차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혔고 여드레째 되는 날 죽었다. (8일간 버틴 것은 아니고 여드레째 되는 날 확인해 보니 죽어 있었다) 정조는 그렇게 원통히 죽은 아비를 연모해 재위기간 동안(1776~1800) 총 12회에 걸쳐 노량진 쪽의 한강을 건너 사도세자의 묘(현륭원)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에 능행했다. 아래 사진은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에서 발췌한 근세 노량진의 모습으로 '1910년 전후 노량진 일대'라는 제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