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
김옥균과 홍종우 (I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1. 23:58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경, 중국 상해 뚱허양행(同和洋行)의 한 호텔 방에서 고균 김옥균은 세 발의 총을 맞고 절명했다. 범인은 일본 동경에서 이곳 상해까지 고균과 동행해서 온 홍종우(1850-1913)로, 협력자가 아닌 자객으로서의 정체를 비로소 드러낸 것이었다. 홍종우는 방문을 연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고균을 향해 그대로 총을 발사했는데, 첫 발은 그의 뺨을 관통했으며 다음 발은 복부, 마지막 한 발은 어깨에 맞았다. 자객 홍종우는 현장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오후 체포됐다. 당시 고균의 나이는 43세였으며 홍종우는 44세였다. 당대의 풍운아는 그렇게 갔다. 고균이 상해로 간 것은 홍종우의 유인책에 빠진 탓이었다. 홍종우는 자신이 중국의 최고 실력자 리훙장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친..
-
김옥균과 홍종우 (I)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9. 23:57
갑신정변의 주역 고균(古筠) 김옥균(1851-1894)은 요즘 말로 스팩이 화려한 인물이었다. 우선은 출신이 명문 안동 김씨 집안으로 아버지 김병태는 관직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절의를 보인 문충공 김상용의 직계 후손이었다. 옥균은 나이 5세 때 '월수소조천하'(月雖小照天下,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춘다)라는 글을 지어 동네 훈장인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옥균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병태는 자식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그 이듬해 옥균을 서울 북촌에 사는 5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보냈다.(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갔을 때 옥균은 그를 따라 강릉으로 갔다가 16살 때 북촌으로 돌아온다) 옥균은 그러한 아비의 뜻을 충분히 발현하였으니 1872년 불과 22살의 나이로 ..
-
전봉준과 서광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8. 23:09
전라도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공주 우금치에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날렸다.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농민군의 희망은 거기서 끝났고 그들 농민군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꿈도 거기서 날아갔다. 수적으로는 4만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으나 대부분이 구식 화포에 죽창을 들었던지라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개틀링 기관총과 무라타 소총을 갈겨대는 일본군의 속사(速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 1894년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약 20일간의 공주 전투는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0월 25일 1차 전투가 끝났을 때 4만이던 병력은 1만으로 줄어 있었고, 2차 전투(우금치 전..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5- 백제 멸망의 수수께끼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4. 23:00
의자왕이 왜 그렇게 쉽게 항복을 했는가는 지난 20세기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로 여러 추측만 난무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중국 낙양 골동품상에서 백제인의 묘지명(墓地銘) 하나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비석의 주인공은 대당 좌위위 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 예식진(祢寔進, 615-672)으로 660년 의자왕 항복 당시 웅진성 방령(方領, 성주)이던 사람이었다. 그 묘지명을 2012년 12월, KBS 역사 프로그램 '충격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비밀'에서 전격 공개함으로써 세인들은 비로소 백제 망국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비밀에 접근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웅천 방령 예식진이 지키던 웅진성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앞뒤)..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4 - 의자왕의 억울한 누명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3. 00:59
일찌기 다산(茶山) 정약용은 자신의 시문집 "여유당 전서"에 '조룡대기'(釣龍臺記)를 적은 바 있다. 거기서 정약용은 패망한 나라의 왜곡된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부정한다. 옛날 서울에서 지낼 때, 한 민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봤다. 황금 투구를 쓰고 무쇠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장수가 쇠줄 한 가닥을 잡고 물 가운데 바위에서 용(龍)을 낚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용은 낚시에 걸려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로 머리를 든 채 앞발로 바위를 밀며 끌려 올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장수와 용은 서로 온힘을 쏟으며 혈전을 벌인다. 나는 물었다. “저것이 무슨 그림이오.” 답이 왔다. “옛날에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백마강에 이르렀는데, 신룡(神龍)이 나타나 짙은 안개와 괴상한 바람을 일으켜 배를 탄 군사들이 ..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3 - 백제 장수 의직의 재발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1. 23:06
660년 당나라의 백제 침공 작전은 의자왕이 죽어다깨도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659년에 당에 들어온 왜(일본)의 견당사(遣唐使) 일행을 661년까지 억류시켜 놓은 일이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백제에 침략 정보를 누설할까 보안을 꾀한 것이다. 이렇듯 당나라는 신라와의 밀약 속에 백제 침공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의자왕은 멸망 1년 전인 659년에도 신라의 독산성(獨山城)과 동잠성(桐岑城, 충북 영동)을 공격하는 등, 국력에 자신감을 보인다. 신라는 이 침공을 극력으로 막았다. 이번만 잘 버티면 당나라의 대군이 당도할 터,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짚고 가고 싶은 것이 있으니, 신라가 외세를 끌..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2 - 진(陳) 마지막 황제 진숙보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19. 01:11
* 1편에서 이어짐.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의 삼국시대는 서기 280년 오의 멸망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위·촉·오 삼국 쟁패의 승자는 뜻하지 않은 진(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웅할거 시대에 대한 교훈이었을까, 진나라의 제왕들은 무(武)를 핍박하고 문(文)을 숭상했던 바, 팔왕(八王)의 난[각주:1]으로 나라가 흔들리게 되고 결국 흉노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만다.(361년) 그런데 다행히 황족인 사마예가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의 명백을 이으니 곧 동진(東晉)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 못했으니 남쪽에서는 589년까지 동진,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다섯 왕조가 명멸하게 된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5호16국[각주:2]의 혼란을 종식시킨 북위(北魏)에 이어 동위(東魏)..
-
의자왕 비운의 스토리 1 -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17. 23:35
백제 의자왕에 대해 쓰려 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후 마지막 왕 의자가 당나라 장안에 끌려가 7일만에 사망한 일, 이것은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의 최대 비극으로 생각하는 일이기에 한번쯤은 다뤄보고 싶었다. 삼전도에서 인조 임금이 청태 종 홍타이지에게 삼두고배(三頭叩拜)를 행한 일,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창덕궁에서의 마지막 공무(公務)도 슬프기 한량없지만, 그 두 사람은 무능의 끝판왕인지라 그리 정이 가진 않는다. 반면 의자왕의 경우는 한없이 슬프다. 망국의 오욕을 뒤집어 쓴 백제탑정림사 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지금껏 선명하다. 삼전도 비(대청황제공덕비) 이 비석은 인조가 항복한 한강 삼전 나루 인근에 세워졌으나 이후 여기 저기 옮겨다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