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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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3. 17. 21:12
임진왜란 때 깡그리 불탄 창경궁은 광해군 8년(1616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재건된다. 하지만 그 7년 후인 인조반정 때 일부 전각이 불타고 인조 2년(1624년 2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며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정전인 명정전(明政殿)만 남기고 다시 불타버린다. 이후 창경궁은 다시 재건되나 영조대왕 시절에 다시 대다수의 전각이 불타게 되는데, 이번에 방화범으로 몰린 사람은 공교롭게도 부왕(父王) 영조에게 늘 구박만 받던 세자 이선(李愃, 사도세자, 1735~1762)이었다. 영조 32년(1756) 5월 1일, 창덕궁에 살던 영조는 뭐 트집잡을 게 없나 하여 창경궁 낙선당에 살던 아들 이선을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선은 내시의 전갈에 놀라 일어나 다급히 아비를 맞으러 문을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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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근방에 남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3. 11. 22:30
사도세자의 비극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은 글이 포스팅되어 있어 내가 따로 부언할 거리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암 완치 기념으로(6개월 후의 검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간 서울대병원 일원에서 눈에 익은 사도세자의 흔적들에 대해 사진과 함께 몇 자 글을 올리려 한다. 가장 먼저 말할 장소는 병원 입구의 함춘원지(含春苑址)이다. 함춘원은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위치한 창경궁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인조대왕 재위시절 사복시(司僕寺)의 마장(馬場)으로 쓰여지며 잠식됐고, 구한말 때 대한의원(大韓醫院)이 세워지며 뒷마당으로 쓰였다.(지금 조금 남아 있는 함춘원지는 사적 237호로 지정됐다) 함춘원지 경모궁 중문(내삼문)과 영희전 기단이 남아 있다. ~ 대한의원은 1899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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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뒤안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2. 27. 23:57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한말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차별당한 구식군대(훈련도감 등)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왕후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옹립한 사건이 1882년 임오년(고종 19) 6월 9일(음력)에 일어난 임오군란이다. 하지만 이들 구식군대들은 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척살되고 흥선대원군은 중국 천진(天津)으로 압송되니 쿠데타는 3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고종은 비로소 두 다리를 뻗고 자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일에, 그것도 국가 간의 일에 공짜가 어디 있으랴?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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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 - 시간(屍姦)은 정말로 있었나?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25. 00:37
명성황후가 시해된 건청궁과 그 옆 쪽에 있던 고종의 서재 집옥재, 그리고 빈전(殯殿)으로 사용된 태원전 지역은 예전(2009년 이전)에는 군인과 고위관료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쿠데타의 무리들이 청와대 보호의 명목으로 신무문과 통하는 그 일대에 30경비단 사령부를 두고 계속 군사를 주둔시켰기 때문인데,(이른바 5160 부대) 그 사령부에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12. 12 쿠테타까지 모의했으니 애써 좋게 표현하자면 혁명의 요람이요 성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당시 30경비단의 면적은 약 2만 평, 장세동 대령이 단장이었다) 이에 1979년 신군부가 12. 12 쿠테타를 일으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할 때 필동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지금 남산한옥마을 일대)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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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9. 05:30
비단 명성황후 시해사건뿐만이 아니라 구한말 개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비극이었다. 위로는 국왕 고종과 왕비 민왕후(명성황후)가 오직 왕권에만 집착해 부국강병의 길을 저버렸고, 밑으로는 백성들의 자주의식이 없었다. 1894~5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관한 우위를 점하려 이 땅에서 박 터지게 싸울 때, 이 땅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곤 제 집 방 문짝을 떼어 산으로 지고 올라갔다 밤에 가지고 내려온 일뿐이었다. 전투 중에 혹여 방문이 훼손되면 찬바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상태로 가면 국가의 문이 송두리째 없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나라 · 일본 간의 전투에서 의외로 일본이 이겼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고 타이완과 요동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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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V) - 순종황제의 국토순행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1. 1. 23:40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 황태자 이척(李坧)이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즉위부터가 일제에 의한 것이었으니 꼭두각시 신세를 면할 수 없었는데, 그는 즉위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하라는대로 전국을 순행하며 황제의 얼굴을 백성들에게 디밀었다. 황실이 일제에 의해 핍박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동요하는 백성들을 진무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쇼였다. 아무튼 대항할 힘이 없었던 순종은 1909년 1월 4일, 아래와 같은 조칙을 발표하고 지방 순행길에 오른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어찌 한시인들 모른 체하고 나 혼자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有司)들을 인솔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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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I) - 마지막 어전회의와 통감부 합병 비화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30. 00:07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 의해서 미리 작성된 아래의 조칙에 어보(御寶)를 눌렀다. 국가의 주권을 일본제국의 황제에게 넘길 것이니 이에 대한 제반 문제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한일 합병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서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위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민생 복리를 보장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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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날(II) - 남대문 전투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20. 00:16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 I'에서 언급했듯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잃어버린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통감부의 지배를 받았던 바, 조선의 국권은 1905년 망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1907년(융희 원년) 7월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통감부의 통치가 합법화되었고, 이어 8월 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나는 1907년 8월 1일을 실제적으로 대한제국의 호흡기가 뽑힌 날이라고 보고 있다. 그 전날,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병무와 함께 창덕궁의 순종 황제를 겁박해 군대해산조칙서의 사인을 받아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그 조칙에 의거, 무기를 무기고에 반납한 후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