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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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문 60년 세도 정치와 옥호정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4. 28. 22:14
어느 분인가, 일제강점기의 순기능을 말하며, 중세에서 현대로 36년 만에 온 것과 지역감정이 사라진 것을 들었다. 부분적으로는 동감한다. 중세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지만, 바지저고리에 상투 매던 시절에서 양복에 중절모를 쓰는 시절로 특급열차를 타고 온 감은 든다. 1884년의 변복령(變服令, 의복 개혁 명령)과 1885년의 단발령(斷髮令, 두발 개혁 명령) 때 거의 죽을 기세로 항거하던 민중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좌우지간 일제시대에는 강제로라도 머리가 깎여졌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출신지역에 따른 파당(派黨)의식이 정치판에서는 존재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그것이 무용함을 깨달았으니 오직 반일감정과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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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5. 04:31
위의 사진은 낯설 수도 낯익을 수도 있다. 정체부터 밝히자면 서울 종각 사거리로 정면에 있는 건물은 화신백화점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한옥건물은 보신각이다. 앞서 말한 대로 보신각은 1979년에 재건되었으므로 이 사진은 최소한 1979년 이후 1980년대의 사진이다. 놀랍게도 화신백화점 건물은 이후로도 근 10년을 건재하다 1987년 철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5년 전의 일로, 일제시대 세워진 이 건물은 의외로 오랫동안 존속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건 아마도 신신백화점에 교련복을 사러 갔을 때일 것이다. 그때는 고등학교에 교련이라는 군사 과목이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교련복이라고 하는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해야 했는데, 교련복에 관한 추억은 지금도 많은 분이 공유하고 있으리라 본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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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이와 조지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3. 02:01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한양 북쪽 세검정 부근에 있었다. 언뜻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당시로서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삼각산에서 내려오는 수량 많은 물과 종이 재료를 펴서 말리기 쉬운 너럭바위가 많은 이곳은 조지서의 자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조지서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종로구 세검정로 9길에는 아래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6년(세조 12)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箋紙), 지폐 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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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IV)-근정전 향로를 만든 종은 어느 절 것이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0. 05:56
고종 2년(1865) 4월 흥선대원군은 근정전을 비롯한 경복궁 전각의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안동김문 60년 세도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이씨왕조의 권위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270년간 폐허로 남겨진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되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에 전대미문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된 것이니 마찬가지로 전대미문의 권력을 틀어쥔 흥선대원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근정전과 같은 전각은 20세기 말엽에나 복원됐을까?) 문제는 돈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피폐해진 국가 재정으로 인해 공사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원납전(願納錢)을 거두었다. 문자 그대로라면 원하는 사람만 내는 자발적인 돈이었으니 실제로는 세금처럼 강제로 거두어들였던 바, 원망하며 내는 원납전(怨納錢)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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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별궁 자리에 지어진 원구단과 조선호텔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14. 05:09
최근 다시 남별궁(南別宮)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좀 더 포괄적인 정보(/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를 가지고 구글 어스를 검색을 해본 것인데 역시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었다. 호텔 근방의 표지석과 일치하는 셈이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은 남별궁을 허물고 1897년 그 자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원구단을 건립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자리였을까? 남별궁은 대체 어떤 곳이길래.....? 남별궁이 있던 소공동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동네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른 까닭으로, 그 이름이 파생된 사연은 좀 슬프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명나라는 신생국 조선이 혹시라도 북원(北元,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에 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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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9. 05:26
는 1904∼1910년 사이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으로, 당시 발행되던 일간지 가운데서는 거의 유일한 신문다운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이자 사장이던 베델은 놀랍게도 영국인 청년이었다. 그는 22살 때인 1904년 3월 10일, 영국 신문 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내한했다. 베델이 조선에 온 것은 의 임시특파원 자격이었다. 당시 일본 고베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청년 베델은 러일전쟁 취재에 흥미를 느끼고 특파원 모집에 응했는데, 러일전쟁 직후 파견된 토마스 코웬에 이은 두 번째 임시직 특파원이었다. 일본 업체들의 소송과 형제 간 불화 등으로 일시 사업을 접고 있던 베델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조선에 온 것이었다. * 1872년 창간된 은 1930년 와 합병해 로 바뀌었고, 1960년 에 흡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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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서울역과 강우규 의사의 의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 00:16
몇 차례의 내부 변형이 있기는 했지만 서울역은 일제시대인 1925년에 준공된 건물이 지금껏 쓰이고 있다. 서울역에 갈 때면 이 점이 늘 새삼스러운데, 더불어 건물 자체의 미적 아름다움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이 건물은 1923년 현재의 서울역 자리에 있던, 당시에는 남대문역이라 불리던 멋대가리 없는 목조건물을 대신해 지어졌는데, 예산부족으로 처음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되어 완공되었지만 1924년 준공된 도쿄역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훨씬 미려하다. 당시 경성역으로 불리던 이 역사의 시공은 조선철도호텔(☞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을 건설한 아오미 하지메가 했으나 설계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당시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였던 쓰카모토 야쓰시의 유품으로 경성역의 설계입면도 2장이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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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유관순 열사의 흔적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2. 28. 00:28
과거(편의상 20세기라 하자)와 달리 지금 21세기 학생들은 유관순 열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니, 대부분의 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의 항일운동이 기재되지 않은 탓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대략 구시대의 아이콘쯤으로 치부된 듯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은 대략 7천500명인데(박은식의 ) 그중에서 유관순만 특별대접(?)을 받는 것은 좀 이상하다, 20세기에 유행한 영웅 만들기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것 같다. 작금의 조국(曺國) 전 청와대수석 사태가 말해주듯 요즘 젊은이들은 '특혜'에 민감하다. 그들은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극혐과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랄까..... 그것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유관순 열사에 관해서는 독립운동 영웅 중의 한 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