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
청와대 터에 얽힌 여러 헛소리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5. 25. 00:35
남들이 간다 하기에 나 또한 가서 주인 없는 청와대를 구경했다. 하지만 평소 관심 가는 곳이 없지 않았으니 첫째는 청와대 터가 일제강점기 총독관저로 쓰일 때 옮겨졌다는 일명 '미남 부처'로 불리는 통일신라 석불이고, 둘째는 1990년 청와대를 신축할 때 관저 부근에서 발견됐다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암각 각자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찾아도 그 각자 바위는 찾을 수 없었고, '청와대, 국민 품으로'라는 제목의 안내 브로셔에도 없었으며, 안내를 맡은 직원들조차 몰랐다. (심지어 엉뚱한 곳을 가르쳐주기까지) 그래서 언뜻 음모론까지 떠오름에(^^) 첫 번째 관심사였던 '미남 부처'에 대한 비화(秘話)는 뒤로 미루고 '천하제일복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요점을 말하자..
-
임오군란과 진령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5. 22. 01:18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의 사졸(士卒)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쉽게 제압했다. 그리고 선혜청 습격에 이어 궁궐까지 쳐들어오니 주적(主敵) 1호로 지목된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가장 먼저 끌려와 흥선대원군이 좌정한 창덕궁 중희당 계단 아래서 주살되고, 주적 3호였던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도 역시 이곳으로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주적 2호였던 영돈녕부사 이최응은 그들에 앞서 저 세상으로 갔다. 민왕후의 척족(戚族)과 수족이던 자들을 제거하고 나니 다음 목표는 자연히 민왕후가 되었다. 이에 궁 안은 중궁을 잡으라는 소리로 시끄러웠으며 실제로도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민왕후는 일단 북촌 윤태준의 집(지금의 정독도서관 부근)에 숨..
-
귀신에 홀린 듯 사라진 율곡 이이의 서울 집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5. 11. 23:39
유명한 율곡 선생의 '십만양병설'이 구라라는 사실을 앞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과 파주 화석정'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곡 선생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은 아니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은 실로 빼어나다. 그래서 5천원 권 화폐 인물로도 채택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 5천원 권 화폐에 그려진 율곡 이이의 탄생지 오죽헌에 대해서는 앞서 '영실오름 까마귀에 대한 오해'에서 일차로 썰을 풀었는데, 조금 미진한 듯해 서울에 와 다시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이 또한 오해가 있을 듯해서이니 율곡 선생의 고향은 강릉이라기보다는 경기도 파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앞서 말했듯 오죽헌은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외할아버지 이사온(李思溫)의 집 별당으로, 당시 사..
-
어영부영했던 군대 어영청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5. 1. 00:37
지난 토요일, 시인 기형도의 흔적을 찾아 옛 파고다 극장 자리에서 종묘공원까지 걷다 종묘공원 옆 길에서 우연히 어영청의 표석을 발견했다. 갑자기 '어영부영'이란 말이 생각났다. 어영부영이 어영청에서 기인된 말이라 하기에..... 어영부영을 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적극성 없이 아무렇게나 어물어물 세월을 보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어영청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후금(後金)의 공격을 두려워해 설치한 친위군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前) 왕인 광해군은 후금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정군은 다시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으로 돌아섰던 바, 겉으로는 명분을 회복한 듯 보였지만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인조는 1623년 반정세력 이귀(李貴)를 사령으로 하는 친위대..
-
안동김문 60년 세도 정치와 옥호정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4. 28. 22:14
어느 분인가, 일제강점기의 순기능을 말하며, 중세에서 현대로 36년 만에 온 것과 지역감정이 사라진 것을 들었다. 부분적으로는 동감한다. 중세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지만, 바지저고리에 상투 매던 시절에서 양복에 중절모를 쓰는 시절로 특급열차를 타고 온 감은 든다. 1884년의 변복령(變服令, 의복 개혁 명령)과 1885년의 단발령(斷髮令, 두발 개혁 명령) 때 거의 죽을 기세로 항거하던 민중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좌우지간 일제시대에는 강제로라도 머리가 깎여졌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양상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출신지역에 따른 파당(派黨)의식이 정치판에서는 존재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그것이 무용함을 깨달았으니 오직 반일감정과 독..
-
화신백화점 & 박흥식의 빛과 그림자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5. 04:31
위의 사진은 낯설 수도 낯익을 수도 있다. 정체부터 밝히자면 서울 종각 사거리로 정면에 있는 건물은 화신백화점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한옥건물은 보신각이다. 앞서 말한 대로 보신각은 1979년에 재건되었으므로 이 사진은 최소한 1979년 이후 1980년대의 사진이다. 놀랍게도 화신백화점 건물은 이후로도 근 10년을 건재하다 1987년 철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5년 전의 일로, 일제시대 세워진 이 건물은 의외로 오랫동안 존속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곳에 간 건 아마도 신신백화점에 교련복을 사러 갔을 때일 것이다. 그때는 고등학교에 교련이라는 군사 과목이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교련복이라고 하는 군복 비슷한 복장을 해야 했는데, 교련복에 관한 추억은 지금도 많은 분이 공유하고 있으리라 본다. 고..
-
한국의 종이와 조지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3. 02:01
조지서(造紙署)는 조선시대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한양 북쪽 세검정 부근에 있었다. 언뜻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당시로서는 최적의 장소였으니 삼각산에서 내려오는 수량 많은 물과 종이 재료를 펴서 말리기 쉬운 너럭바위가 많은 이곳은 조지서의 자리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조지서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종로구 세검정로 9길에는 아래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으로 1415년(태종 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6년(세조 12)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箋紙), 지폐 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에..
-
종의 기원(IV)-근정전 향로를 만든 종은 어느 절 것이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3. 20. 05:56
고종 2년(1865) 4월 흥선대원군은 근정전을 비롯한 경복궁 전각의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안동김문 60년 세도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이씨왕조의 권위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270년간 폐허로 남겨진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되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에 전대미문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된 것이니 마찬가지로 전대미문의 권력을 틀어쥔 흥선대원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근정전과 같은 전각은 20세기 말엽에나 복원됐을까?) 문제는 돈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피폐해진 국가 재정으로 인해 공사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원납전(願納錢)을 거두었다. 문자 그대로라면 원하는 사람만 내는 자발적인 돈이었으니 실제로는 세금처럼 강제로 거두어들였던 바, 원망하며 내는 원납전(怨納錢)이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