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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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광희문)에 대한 기억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26. 06:44
어릴 적 퇴계로 입구에 있는 광희문(光熙門) 근방에서 살았다. 그때는 문은 있었지만 문루는 없었고, 까닭에 문의 명칭이 광희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랬으니 당시는 너나없이 시구문이라 불렀다. 동네 어느 유식쟁이의 설명을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4대문으로 시신이 드나들 수 없었고 오직 이 문을 통해 도성 안의 시신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시구문(屍口門?)이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시구문 부근 동네의 이름이 신당동(新堂洞)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죽은 자에 대해 염을 하거나 굿을 하는 신당(神堂=무당집)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다는 것인데, (※ 갑오개혁 때 新堂洞으로 바뀌었다) 도성을 나온 시신들은 성밖 황학리 공동묘지와 무수막(무쇠막=금호동) 산비탈에 묻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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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은 정말로 오간수문으로 탈출했을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19. 01:52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썰은 어느덧 그 옆에 위치한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이어진다. 명종 시대(1545~1567년)의 명화적(明火賊) 임꺽정(林巨正)이 전옥서(典獄署) 옥문을 부수고 일당을 구출한 후 이 오간수문을 통해 탈출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오간수문을 말할 때 매양 붙어 다니는 스토리다. 그런데 그 얘기는 정말일까? 궁금해서 한번 찾아보았다. 우선 임꺽정의 스토리가 등장하는 을 보자. 포도대장 김순고가 아뢰기를, "풍문으로 들으니 황해도의 흉악한 도적 임꺽정의 일당인 서임이란 자가 이름을 엄가이로 바꾸고 숭례문 밖에 와서 산다고 하므로 가만히 엿보다가 잡아서 범한 짓에 대하여 추문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지난 9월 5일에 우리가 장수원(長水院)에 모여서 궁시(弓矢)와 부근(斧斤)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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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이 흥인지문이 된 때는?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17. 05:30
흥인지문을 동대문이라 부르는 게 일제의 잔재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남대문도 같은 이유로 숭례문으로 고쳐 부른 지가 꽤 됐지만,(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때부터)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인문과 동대문, 숭례문과 남대문은 혼용돼 쓰이며 비율도 거의 같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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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II)ㅡ신촌 봉원사 종과 덕산 사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12. 04:50
신촌(新村)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언뜻,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전이 자리 잡으며 이에 따른 대학촌이 형성되었으므로 신촌이라 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니 서울역사박물관의 설명도 그러하고, 또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서울역사박물관은 한편으로는 그 유래를 조선 개국공신 하륜 대감까지 끌어올린다. 국초에 한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할 때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을 펼친 하륜이 새롭게 발견한 이 땅을 '새터말'이라 부른 데서 신촌이 유래됐다는 것이다. 모악(산)은 지금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안산(높이 296m)의 옛 이름으로 이후 안현이 되었다가 지금은 안현과 안산이 같이 쓰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그외도 서울의 많은 '신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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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풍납토성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6. 05:11
에 나오는 백제의 도성(都城)인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일제시대부터 말이 있어 왔다. 앞서도 언급했듯 백제 수도 위례성은 에도 고구려에게 함락되던 그 최후의 날의 그려져 있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었던 바,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웅략천황(雄略天皇) 20년조 까닭에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위례성을 찾아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는데, 1925년 하남위례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그해 여름에 일어난 이른바 '을축 대홍수'였다. 전국적으로 7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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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전설 석촌동 고분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2. 2. 05:48
2015년 잠실 송파 석촌동 고분군에서 다수(多數)의 백제인 뼈와 금제 장식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안이 좀 벙벙했다. 물론 충격적이기도 했으니, 흡사 이장 명령으로 선산의 유해를 화장시켰을 때 발견된 조상의 사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놀람은 잠깐이었고 어안벙벙한 기분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표현이 옳은가는 모르겠지만 백제 최대의 왕릉군인 석촌동 고분군은 사묘(死墓)가 된 지 이미 오래이기에 21세기에 그곳에서 무엇인가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나 불가사의의 범주에 드는 노릇이었다. 혹자는 송파 석촌동 고분군을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대릉원에 비유하기도 한다. 석촌동 고분은 서울 시내에 남겨진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완형(完形)의 무덤이 고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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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을 폭파시킨 3인의 의병과 연트럴파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10. 17. 10:27
호머 헐버트의 에도 실렸고, 일제가 발간한 사진엽서에도 실렸으며, 프랑스와 독일 등의 외신에서도 대서특필된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3인은 술김에 철도시설물을 파손시키거나 운송물자를 훔친 도둑들이 아닌 의병들이란 사실을 앞서 1편에서 설명했다.(☞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조선인 스페셜리스트') 즉 1904년 8월 27일 거사 후 체포되어 9월 20일 재판을 받고 그다음 날인 21일 오전 10시 마포 공덕리 산기슭에서 총살된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의 3인은 러일전쟁의 병참으로 건설 중인 경의선 시설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선로에 폭약을 매설, 군용열차를 폭파시키는 전무후무한 거사를 치른 후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폭파시킨 도로변 철도건널목 부근에서 강제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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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 호텔과 정동구락부(I)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1. 9. 30. 23:52
서울 정동은 구한말 개화기 때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개인적으로는 그곳의 이도 저도 아닌(과거도 아니고 현대도 아닌)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래 지도에서처럼 덕수궁 옆 돌담길로 접어들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고 조금 더 걸으며 옛 이화학당 터, 손탁호텔 터, 옛 미국공사관 자리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경향신문 자료인데 그래서인지 경향신문사도 표시돼 있고 그 옆에 옛 러시아공사관과 미국대사관도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니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된 경운궁의 부속건물인 중명전도 볼 수 있고,(미국대사관저와는 담 하나 사이로 고종이 그곳으로 도망갔다가 쫓겨난 적도 있다) 붙박이 영국대사관, 외톨이가 된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뷰티풀한 대한성공회회관, 구세군 중앙회관, 대한민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