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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혜석의 수원 그림
    미학(美學) 2023. 6. 26. 19:51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경기도 수원군 신풍면 신창리(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5번지)에서 태어났다. 근자에 복원된 화성행궁 바로 옆이다. 그가 태어난 해에 무능한 임금 고종이 저 혼자 살겠다고 러시아대사관으로 도망갔고, 그러면서 분풀이의 대상으로써 4차례씩이나 총리대신이 되어 난국을 이끌었던 김홍집에 대한 타살(打殺) 명령을 내려 결국은 길거리에서 맞아 죽게 만들었다. 서방 외교관들이 몹시 무능하게 본 고종은 도망가 목숨을 늘였고, 반면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출중하다 평가했던 김홍집은 친러군인과 보부상에게 맞아 죽었다. 정월(晶月) 나혜석이 태어난 해는 그렇듯 조선이 본격적으로 망가지던 무렵이었다. 

     

    나혜석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으로, 증조부가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참판 댁, 혹은 나부잣집이라 불렸다고 한다. 아버지 나기정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일제강점기에는 시흥 군수와 용인 군수를 지낸, 한마디로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집안이었다. 그는 딸이었지만(5남매 중 넷째, 딸로서는 둘째) 다른 형제들과 같이 평등하게 교육을 받았고, 가장 우수했다. 혜석은 수원 삼일여학교를 거쳐 서울 진명여자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평균성적 99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졸업을 해 신문에도 났다. 당연히 수석졸업이었다. 이에 그의 아버지 기정은 조선 최초의 여판사를 꿈꾸었다고 하나 혜석은 뜻밖에도 미대에 진학했다.  

     

     

    수원 나혜석 생가 터
    그곳을 지금 정재환씨가 북카페로 활용하는 듯.
    부근 담장에 수원과 관련 있는 나혜석의 그림을 모사해놨다.
    바로 옆에 수원행궁이 위치한다.
    행궁 담벼락에 기념비 비슷한 것이 세워졌다.

     

    나혜석은 1910년에 바로 밑 여동생과 함께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자매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했는데, 평균성적 99점이었으니 모든 과목에 뛰어난 학생이었음에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그는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바, 당시 도쿄공대에 유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 이에 그는 정식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최초의 조선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다.  

     

    나혜석은 도쿄여자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여자유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하고, 동인지 〈여자계(女子界)〉를 발간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했다. 그리고 김일엽이 발행한 <신여자(新女子)>에도 글을 실어 여성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고 독려했다. 그는 귀국 후 자신의 모교인 진명여학교 미술선생으로 재직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1922년 제1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농가'와 '봄'을 출품하였다. 이후 1923년 제2회 선전과 이듬해 3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과 '가을의 정원'이 4등 수상했다. 이어 1925년 4회 선전에서 '낭랑묘(娘娘廟)'가 3등 수상하고, 이듬해 제5회 선전에는 '천후궁(天后宮)'으로 특선하였다.

     

    나혜석이 발행한 <여자계>
    서울 효자동의 진명여중고 터 표석
    '봉황성의 남문'
    제5회 선전 특선작 '천후궁(天后宮)'

     

    '천후궁'은 중국 안동(현재의 단동)에 있는 천비(天妃), 또는 천후낙랑(天后娘娘)으로 불렸던 송나라 귀비의 궁전이며, 4회 입선작 '낙랑묘'는 안동에 있는 그녀의 사당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으로써 나혜석이 남편 김우영과 만주 안동에서 생활하던 신혼초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920년 스물네 살 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유명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을 하며 세간에 화제를 뿌렸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친구로서 수원 경석의 집에 드나들다 혜석을 보고 반해 2년간 끈질긴 구애를 하였다. 나혜석은 내내 냉랭했지만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가 혼인 경력이 있으며 애도 딸린 몸이라는 것이었다. 혜석은 결혼 조건으로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따로 살게 해주시오"의 세 가지를 내걸었다.

     

     

    신혼시절의 나혜석과 김우영
    당시 두 사람의 범상치 않은 패션

     

    김우영은 1921년 일본 외무성의 발령을 받아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했고 혜석은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이주했는데, 그때 그린 그림이 '낭랑묘'와 '천후궁'인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농촌 풍경'도 당시 중국의 농촌을 그린 작품이다. 이후 두 사람은 김우영의 임기가 끝남과 함께 일본 정부의 배려에 의해 세계일주를 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니, 이에 그녀는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을 한 한국여성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대중에게 익숙한 '불란서 마을 풍경',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항구', '무희' 등은 그때 그린 그림이다. ('무희'는 위작 시비를 겪고 있는데, 거의 위작으로 결론난 듯)

     

     

    농촌 풍경' / 캔버스에 유채, 27x39cm
    '불란서 마을 풍경' / 유채, 30x45.5cm
    '스페인 국경' / 목판에 유채, 23.5x33cm
    '스페인 항구' / 합판에 유채, 37x44cm
    '무희' / 캔버스에 유채, 41x33cm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녀에게 불행이기도 하였으니 그때 파리에서 만난 최린('민족대표 33인'이자 변절자이기도 한 놈)과의 인연은 그녀의 일생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된다. 혜석은 1930년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돼 결국 이혼하고, 그녀의 그림 역시 대중에게 외면 받음으로써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건강도 나빠지게 된다. 이후 극도로 어려워진 혜석이 먼저 불문(佛門)에 귀의한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에 왔을 때, 불가 입문을 거절당했다는 것과, 그때 일엽의 버려진 아들 김태산을 거둬 화가로 키운 이야기는 앞서 '김일엽의 청춘'에서 한 바 있다.

     

    그래서 김일엽이 좀 얄밉다. 만일 그때 일엽이 혜석을 받아주었다면 행려병자로서의 사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혜석이 행려병자로서 배고프게 죽은 것은 죽음로써 자존심을 지킨 때문이었으니, 불가에의 귀의는 비록 도피나마 자존심을 지키며 천수를 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에.... 그는 1948년 원효로 시립자제원에 행려병자로 들어와 영양실조로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앞서 어떤 댓글에 청량리 시립병원이라고 잘못 썼는데 차제에 정정한다)  

     

    나혜석은 그렇게 갔지만 그의 그림은 현재 사랑받는다. 어떤 자료를 보니 1920~1940년 도쿄여자미술학교를  다닌 조선인 여학생은 무려 133명이나 된다. 하지만 그중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이 나혜석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투철한 민족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니, 신사참배령이 내려졌을 때 불교신자임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친일을 미끼로 내건 치료비와 집과 화실 제공을 거부했다. 아울러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하였다아래는 수원시의 히트 행정 인계동 나혜석거리 풍경과 그가 수원을 그린 2점의 그림이다. 

     

     

    수원 서호 / 목판에 유채, 30 x 39 cm
    수원 화홍문 / 캔버스에 유채, 60.5x72.7cm, 1939년 작
    그림 같은 화홍문 풍경
    수원시의 히트 상품 인계동 나혜석 거리
    나혜석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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