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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민공동회와 이승만 & 올림픽공원 집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7. 12. 23:54

     
    40일 넘게 지속되고 있는 올림픽공원 집회를 보노라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준법투쟁을 하며 한시도 쉬지 않고 "부정선거 재선거!"와 "당일투표 수개표!"를 외치고 있다. 이들을 보노라면 마치 철옹성을 지키는 군사들처럼도 보이기도 하고, 또 구한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지키겠다며 모인 만민공동회의 민초들을 보는 듯도 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투철한 시민의식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아래는 엊그제 찍은 메인 집회장소인 핸드볼경기장 1-3 게이트 앞에 모인 사람들이다. 언뜻 감소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모여 외치는 사람들이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의 주도 하에 서울 종로 광장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이자 민중 대회이다. 신분과 계층을 초월하여 일반 시민, 상인, 지식인 등이 대거 참여했으며, 외세의 이권 침탈 저지와 자유 민권 신장을 목적으로 전개된, 가히 민중집회의 신기원을 이룬 대회이다.
     
    이 집회는 종로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만 해도 과연 무슨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 집회에 모인 사람들 스스로도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들의 집회는 뜻밖에도 큰 성과를 이루었으니 첫 집회였던 1898년 3월 10일 대회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시위를 벌인 끝에 러시아의 절영도(영도) 조차(租借, 빌림)와 저탄소(貯炭所, 석탄 저장창고) 기지 건설을 저지시켰고, 한러은행을 폐쇄하는 등 열강의 이권 침탈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만민공동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주로 독립협회의 임원들로서 윤치호, 이상재, 서재필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중 윤치호와 이상재는 미국과 일본 등에 유학하여 선진 자유주의 사상을 터득한 사람들이었고, 특히 서재필은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현 조지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을 나와 의사로 활동하다 귀국해 독립협회의 고문이 되었다.
     
     

    부산 영도 / 구한말 러시아와 일본은 군함 연료 보급을 위해 절영도 조차 및 석탄창고 건립을 추진했다.
    말년의 필립 서(서재필) 부부 / 아내인 뮤리엘 암스트롱은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의 조카딸이자 미국 우정청장을 지낸 조지 암스트롱의 딸이다.
    1898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이상재
    종묘공원의 이상재 상

     
    뿐만 아니라 자유 민권(民權) 운동도 추진하였으니 신체의 자유, 재산권 보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인 민권 신장을 요구했다. 이는 지금과 비교해도 놀라운 것이니, 뻔히 표현의 자유의 제약이 예견되는 정보통신망법이 시행되었음에도 아무런 단체행동을 보이지 않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보다 앞선 사고를 보였던 것이다. 
     
    나아가 만민공동회는 국민의 참정권을 확립하기 위해 근대적인 의회 정치를 도입하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백성들의 호응을 얻은 만민공동회는 1898년 10월 정부 관료들까지 참여하는 '관민공동회'로 발전했고, 이 자리에서 의회 설립과 재정 일원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시급한 개혁안인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고종 황제의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중 제3조는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은 국민에게 공표할 것'을 내용을 했다.
     
    '헌의 6조'가 모두 중요하였지만 재정 일원화 및 투명성을 요구하는 제3조는 특히 중요하였으니, 그간 내탕금(왕실의 돈)과 국고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해 온 고종에 대한 민중의 강력한 제약이었다. 당시 고종은 자신이 신임하는 보부상 출신의 이용익을 금고지기인 내장원경에 임명하고 그를 다시 호조(戶曹)를 이은 탁지부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인 돈과 국고를 분별없이 써 왔던 바, 이에 대해 브레이크를 건 것이었다. (※ 대한민국 국민들도 대통령 특활비에 대한 공개를 요구해야 옳다) 
     
    이와 같은 만민공동회의 청년 조직을 이끈 사람은 당 23세의 청년 이승만이었다. 당시 배재학당(현 배재고)을 졸업한 후 독립협회의 청년 간부로 활동하던 그는 만민공동회에서 빼어난 연설로써 민중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는 종로 등지에서 열린 집회에서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 보장을 주장했으며, 고종 황제에게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것을 역설하는 연설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발행해 여론을 이끌었다. 
     
     

    1898년 이승만이 발행한 <매일신문>

     
    고종은 처음에는 당근책으로 만민공동회의 주장을 수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냈으니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거짓 벽보(익명서)를 기화로 만민공동회의 해산과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민중들은 반발하여 자발적인 철야 시위를 벌였고, 1898년 12월 고종이 있는 경운궁 대안문(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대대적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자금으로 보자면 청와대 정문 앞에서 철야 시위를 펼친 셈이었다. 
     
     

    1898년 12월 대한문 앞 만민공동회

     
    그러자 조정은 군인 및 국가의 혜택을 받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폭력으로 짓밟게 했다. 이에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해산되었고 이승만은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임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소문감옥에 수감되었다.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사람들 / 왼쪽 위부터 이승만, 이승인(이상재 아들), 유동근, 김린, 안국선, 아버지를 대신한 소년수. 아래줄 왼쪽부터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이상재, 이정식.
    서소문 감옥에서의 이승만 (가운데 키 큰 사람) / 성서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기독교인들인 듯하다.


    하지만 이승만은 1899년 1월 30일 <매일신문> 동료였던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탈옥을 감행하였던 바, 미리 간수들의 눈을 피해 감옥 안으로 육혈포(권총) 두 자루를 은밀히 반입했다. 그리고 간수를 위협해 감옥을 빠져나왔으나 외부에서 대기하기로 했던 조력자들과 시간 오차가 생겨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총을 든 상태였으나 발사하지 못한 채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서 시위대 군인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운이 다하지 않았는지 한성감옥(현 종로 영풍문고 언저리)으로 이감된 후 열린 1899년 7월 11일의 상고심에서 평리원(당시 고등재판소) 재판장 홍종우에게 종신형과 태형 100대를 선고받는다.(판결 선고는 7월 27일). 재판관 홍종우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1894년 상해 호텔에서 암살한 자로서 이후 승승장구하여 평리원 재판장이 되었다. 홍종우는 탈옥 당시 동료 최정식은 총을 쏘았으나 이승만은 총을 쏘지 않은 점과 선교사들의 대규모 청원 등을 감형의 사유로 들었다. (최정식은 사형당했다)  
     
    이승만은 종신형을 먹었지만 홍종우의 덕에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신형 선고 대략 6개월 후인 1899년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고,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아 석방되었다. 총 5년 7개월의 수감생활이었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선교사 언더우드·벙커·어비슨 등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언더우드는 국사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다 풀려난 청년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래와 같은 추천서를 8장 써 주었다.
     
     

    출감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그의 조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수년간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저도 감옥에서 수감자들과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미국에 갔는데, 그에게 진학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회나 조언을 주신다면 제게는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 추천서를 써 준 언더우드 (조선일보 DB)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하버드대학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5년 내로 박사까지 받아 조국에 돌아가 큰 일을 하려 합니다. 부디 저의 입학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미국에서 5년 6개월간 수학하며 하버드대학에서 문학 석사(Master of Arts) 학위를 취득했지만 박사 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그의 의지는 무지에서 온 것이니 제도상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도합해서 11년 1개월을 공부했다. 하지만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윌슨 총장(뒷날 대통령)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다.
     
    "나는 준비가 끝났는데, 내 할 일을 해야 할 나라가 사라졌구나." 이것이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의 소회였다. 그해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올림픽공원 집회는 특별한 지도자 없이 오직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 투표 수개표"의 일념으로 매진하고 있다. 앞으로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몰라도 나는 이곳에 모인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향후 자유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이승만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출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올공에 모인 모든 사람의 믿음일 것이다.  
     
     

    서재필과 군축회의 참석한 이승만 /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이승만(왼쪽) 한국 대표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이승만 46세, 서재필 57세 때의 사진이다. (국사편찬위원회 DB)
    태극기를 흔드는 우리의 미래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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