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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와 이재명 대통령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7. 9. 16:35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포기한 을사조약, 즉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포기한 을사조약에 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를 배웠나 하는 것은 그 잘못된 역사의 자료가 주입된 AI의 답변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한제국의 조약에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가 요구한 을사조약에 관해 직접적인 답을 안하고 그 결정을 신하들에게 미루었다. 일국의 황제답지 않은 매우 비겁한 행위였다.
그러나 AI에게 "고종은 을사조약에 관한 협상을 신하들에게 미루었나?"라고 물어보면 사실과 다른 답을 한다.
아닙니다. 고종은 협상을 신하들에게 미룬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극심한 군사적 위협과 강압 속에서 조약 체결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무력 강요: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은 총칼로 경운궁(덕수궁)을 포위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고종의 완강한 거부: 고종은 회의에서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조약에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조약 체결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일부 기록에서 고종이 신병을 이유로 물러나 있었다고 묘사되기도 하나, 이는 협상을 떠넘긴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였습니다.
불법적인 조약 체결: 결국 고종이 최종적인 비준(동의)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을 매수하고 협박하여 불법적으로 조약을 강제 체결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그래서 우리는 을사조약이라는 말 대신 1905년 11월 15일 대한제국이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던 그 조약을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부른다. '을사년에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까? 고종은 조약 체결을 끝까지 거부했고, 대신하여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체결되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얘기다. 고종은 1899년 반포한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통해 대한제국이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임을 명시했다. 즉 당시 고종은 러시아 짜르를 흉내 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군 통수권, 외교권 등 모든 통치권을 황제 1인에게 집중시키는 법을 만들어 반포했던 것이다. 까닭에 고종이 을사조약을 반대했다면 조약은 성사될 수가 없었다.
일각에서는 고종은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 문서에는 고종의 국새 대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혔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박제순을 이완용과 동급의 매국노로 취급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고종이 조약이 체결되기 몇 시간 전인 1905년 11월 15일 오후 3시, 중명전을 찾아온 이토 히로부미를 알현했다. 그리고 외교권을 놓고 4시간 동안 언쟁을 벌이는데, 이토는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의 결정에 대해 "확고하고 전혀 변경할 수 없는" 최종안임을 못박았다.
AI의 설명대로라면 이때 고종은 "차라리 내 목을 벨지언정 이 엉터리 조약은 절대 진행할 수 없다"고 버티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과 이토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이러하다.
이토: 폐하께서는 오늘 밤 즉시 외부대신을 불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의 제안을 기초로 협의해 속히 조인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의 칙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고종: 어쨌든 외부대신에게 교섭과 타협에 힘쓰라는 뜻을 전하겠소.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의 연구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망국의 길목에서, 1904-1907>/기파랑)
그렇게 고종이 결정을 미루고 마련된 자리가 아래 사진이다. 우리는 흔히 이 자리에서 참정대신 한규설만이 반대하고 이완용 · 권중현 · 이근택 · 박제순 · 이지용의 이른바 '을사오적'이 찬성함으로써 조인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한규설 ·박제순 · 민영기 · 이하영이 반대표를 던졌던 바, 찬반이 4:4로 팽팽히 맞섰다. 특히 발언권이 큰 의정부 참정대신(현 국무총리 격) 한규설과 외부대신 박제순이 강력히 반대했다.

중명전에 재현된 역사의 현장 / 가운데가 이토 히로부미, 그 오른쪽이 박제순, 왼쪽이 하야시 곤스케이다. 중명전 현장에서 한규설은 박제순과 더불어 끝까지 분투하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물어보겠다며 회의장을 나섰다가 일본헌병에 붙잡혀 골방에 구금된다. 이후 박제순은 한규설의 행방도 모른 채 홀로 싸우다가 자정 너머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자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말과 함께 결국 굴복하고 만다. 앞서도 말했지만 박제순은 한규설과 더불어 이토가 내민 조약문 원안 자체를 부정해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唯二)한 사람이기도 하다. 조약문에 끝내 날인하지 않아 체결 직후 일제가 그의 외부대신관인을 훔쳐 강제로 서명날인했다는 말도 전한다.

을사조약문의 박제순 날인 
박제순을 매국노로 못박은 중명전의 안내문 이렇게 조약은 11월 15일을 지나 16일 자정 너머 체결됐다. 그리고 이날 고종의 속내가 비로소 드러나니, 고종은 조약에 끝까지 반대해 구금된 한규설을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며 파직시키고, 날인을 한 박제순을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보자면, 과연 대신들이 황제의 뜻과 다르게 일본과 조약 체결을 했던 것인가? 하는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위 책의 저자 한상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을사조약 당시 고종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미 조약 체결을 기정사실화한 뒤 신하들에게 문구 수위 조절을 지시한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아울러 중명전에 게시된 위 안내문의 내용에도 외부대신 박제순이 을사조약은 고종의 명령이므로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뉘앙스의 "(나는) 본 협약안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외교담판으로써 타협한다는 것은 감히 하지 못할 일이지만 만약 황제의 명령이라면 별수 없는 일이다"라는 <고종실록>의 내용이 쓰여 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이토는 이 조약의 체결을 위해 11월 9일 서울에 왔다. 그리고 이튿날 고종을 알현하고 일왕의 친서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화근이 돼 온 대한제국의 대외 관계를 일본이 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져온 10만원 중 먼저 고종에게 2만원을 주었다. 2만원은 당시 도시노동자의 100년치 월급에 해당한다. 기타 이완용에게 1만원, 이지용과 이근택 등에게 5000원을 주었다.
뇌물의 덕분인지 불가능할 듯했던 조약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국민들은 이 비극을 까맣게 모르다가 이틀 후 <황성신문>의 보도로 비로소 인지하였다. 백성들은 울분을 터뜨리며 경운궁(덕수궁) 앞에 모여 조약 파기와 조약 체결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군중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저 거기까지 였으니, 고종의 태도는 불변이었고 대한제국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1905년 12월 11일자 기밀 제 119호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황제 고종에게 2만원을 주는 등 대한제국 고위층에 거액의 뇌물을 뿌렸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불량한 정치 지도자가 국민에게 피해를 준 예는 고금에 적지 않다. 그러나 외교권과 같은 큰 사안을 포기한 예는 많지 않을 듯 한데, 그만큼 중요한 사안으로 여겨지는 검찰청 폐지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 검찰청 폐지는 수사권과 기소권의 완전 분리를 의미하는 형사사법체계의 대변혁으로서, 수사 역량 저하 및 사건 처리 지연, 혹은 이번의 장윤기 사건과 같은 은폐 등의 문제로 인한 국민들의 지대한 피해가 예상됨에도 여당에서는 오로지 정치적 셈법으로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검찰청 폐지를 골자로 한 수사·기소 분리 법안(공소청법 및 중대범죄수사청법)은 2026년 3월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10월 시행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위의 문제 외에도, 수사기관 간(경찰 및 중대범죄수사청 등) 권한 다툼이나 업무 협조 미비로 인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고, 국민들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 수단이 축소될 수 있다는 염려 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광주 광산경찰서 수사팀장 A 경감는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로 결국 구속되었다. / 광주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은 경찰이 조직적 은폐 의혹을 기도하였으나 검찰의 보완수사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졌다. 이에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 추진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피해자 고(故) 이채원 양의 어머니와 유가족은 "누구보다 엄정하게 수사하고 우리 채원이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경찰이 우리 편이 아니라 살인마의 편이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뒤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며 울부짖었다. 검찰의 보완수사권이란 경찰이 수사한 사건을 검찰에 넘겼을 때, 검사가 기록을 검토하여 부족하거나 미진한 부분을 찾아내고 이를 보충하도록 수사기관에 지시하거나 직접 추가 수사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보완수사권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의 의견도 다르지 않으니, 그는 과거 검찰의 보완수사권에 대해 '예외적인 필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올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최근 보완수사권을 포함한 검찰 개혁의 최종 결론을 국회의 논의와 권한에 맡기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하며 폐지 쪽으로 말을 바꾸어 탔는데, 이번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신이 밀고 있는 김민석 후보에 대한 강성 당원들의 지지를 소구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 즉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신을 바꾸는 무척이나 비겁하고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준 것인데, 과연 한 나라의 지도자가 택할 선택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가는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중앙지 사설도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보완수사권'이라며 긍적적인 사각으로 다뤘다. 
중앙일보 사설은 '예외적 보완수사권이 필요하다'는 대통령 발언을 국민 인권과 실효적 관점을 고려한 현실적 인식으로서 지속적으로 긍정 평가했다. 하지만 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 대통령의 말이 바뀌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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