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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간첩 이중업 탈옥 사건과 여간첩 김수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7. 5. 19:12
거물 간첩 이중업 탈옥 사건은 1949년 7월 17일,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남로당 중앙당 군사 책임자 이중업(李重業)이 수감 중이던 용산 육군형무소에서 증발하듯 사라진 희대의 탈옥 사건이다. 나아가 그는 김수임의 도움으로 무사히 월북까지 했다. 당시 이중업은 박헌영 바로 아랫급의 빨갱이로, 여순반란사건 당시 여수 인민위원장의 직책을 지내며 남로당 간부 김백동과 이재복, 여수 14연대 남로당 책임자 지창수 상사에게 명령을 내려 반란을 지휘한 자이다.
여순반란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4·3폭동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상관을 살해한 후 10월 27일까지 여수·순천 및 인근지역을 무력점령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군 지휘관 20여 명이 부하들에 의해 죽었고 주민 2천여 명이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등, 일대는 가히 지옥이 되었다.

여순반란사건으로 불타는 여수 시가지 / 사진작가 이경모가 찍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중업의 사진 이 같은 준동은 약 10일 후 국방경비대 7개 연대가 각 지역에 투입돼 반란을 진압하며 끝이 났고 이중업 등은 수배되었다. 하지만 이중업은 이미 여수를 벗어나 서울에 올라 와 있었는데 홍제동에 숨어 있던 그를 군 대공수사관 김창룡 소령이 석 달의 추적 끝에 1949년 2월 25일 체포했다. 앞서 붙잡힌 남로당 고위 간부 김영식의 진술 중 튀어나온 주소를 찾아가 잠복 끝에 체포한 것으로, 이때 이중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83만 원의 거금을 수사관에게 건네며 회유하기도 했다. (당시 노동자 월급이 수십 원 수준이었다)
이중업은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현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용산 미군형무소에 수감됐다. 용산 미군형무소는 용산주둔 일본군이 군대 내 범죄자와 독립운동가 등을 가두기 위해 지은 위수감옥으로 1909년 건립 이래 중수를 거듭한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옥을 1949년 7월 17일,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이중업이 탈출한 것이었다. 훗날 이 일은 김일성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던 바, 사생결단의 탈출작전이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거물 간첩 이중업이 갇혔던 미8군 내 용산 육군형무소 훗날 고등 간첩 김형육이 기술한 '자유고백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중업을 체포한 자는 살해하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이중업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김형육은 수도경비사령부 법무관인 남로당원 구덕회 대위를 만나 그 자의 도움으로 육군 형무소에 근무하는 이등중사 조병욱을 포섭한다. 조병욱이 술과 여자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중업의 여동생을 조병욱에게 붙여 포섭하는 미인계를 쓴 것이었다.
포섭된 조병욱은 7월 17일 토요일 밤, 이중업을 토사곽란의 환자로 위장해 형무소 입구까지 데려갔다. 물론 포승줄로 묶어서였는데, 그동안 이중업은 내내 죽는 시늉을 했다. 조병욱은 위병에게 상태가 위중하니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며 문을 열게 했다. 당시는 육군형무소 창설 초기로 아무래도 경비 체제가 불완전했던 바, 빨갱이들은 바로 이 점을 노렸다. 이렇게 용산 미군형무소를 나온 이중업을 김형육이 맞았다. 김형육은 준비한 한복과 중절모로 이중업을 위장한 후 죄수복은 땅을 파 묻었다. 그리고 다시 이중업을 포승줄로 묶은 뒤 거리를 걸어 이동했다.
그것이 경찰이든 시민이든, 누가 봐도 정복 헌병과 사복 군인이 죄인을 끌고 가는 모습이었던 바,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았다. 이들은 일단 종로구 내수동 23번지에 위치한 남로당원 대학교수 김용봉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중업은 한의원에서 지어 온 기력회복의 보약을 마시며 약 1주일간 몸을 추스른 후 명륜동에 사는 남로당원 이용원의 집으로 옮겼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내수동보다 흥덕동천 천변 옆 한적한 이용원의 집이 은신하기가 더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는데, 만약을 대비해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열성 당원으로 하여금 주변을 지키게 했다.

내수동 23번지 김용봉의 집 자리에는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이중업이 두 번째 머문 명륜동 1가 32번지의 집 / 당시 집 앞으로는 흥덕동천이 흘렀다. 

혜화로 노면의 흥덕동천 표지 이중업은 명륜동 집에서 45일 동안 은거했다. 그리고 다시 종로구 옥인동 19번지에 위치한 구한말의 매국노 이완용이 살던 집으로 옮겼다. 그곳은 당시 미군 실세였던 존 베어드(John E. Baird) 대령이 남로당 비밀 공작원 김수임과 동거를 하던 집이었는데, 김수임은 동거남 베어드 대령에게 이중업을 자신의 친척 오빠라고 소개했다. 이로써 이중업은 가장 안정적인 은신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중업은 통금 시간 이후로는 베어드의 운전기사 최만용이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김수임이 1930년대말 세브란스병원 통역관으로 근무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치과과장 부스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현재의 옥인동 13번지 저택 ※ 현재의 옥인동 19번지 저택은 1913년 이완용이 건립한 집이 아니며 김수임이 동거생활을 했던 곳도 아니다. 이완용의 집은 한국전쟁 후 철거되었고 현재의 집은 2003년 재일동포 사업가가 땅을 구입해 지은 것인데, 외형적으로는 너무도 비슷해 오해를 받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이완용의 집을 모방한 집주인의 책임도 없다 하지 못하니, 아래의 옛 사진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비슷하게 지었는지 알 수 있다.


1926년 이완용의 장례식 때 촬영된 옥인동 저택 
길에서 바라 본 옥인동 19번지 저택 김수임은 1911년 3월 1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개성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에 쫓긴 김수임의 모친은 불과 11세인 자신의 딸을 중산층 가문의 민며느리로 보냈지만 남편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을 한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개천가에서 고아처럼 살다 미국인 롤(Loehr) 선교사의 눈에 띄어 롤 선교사의 집에 거주하게 되고 사립 동대문여학교(이화고녀)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

동대문여학교시절의 김수임 이후 롤 선교사가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김수임을 당시 이화여전 교수였던 미국인 교사 캐럴(Ardelia Caroll) 여사에게 소개해 주었고 덕분에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이화여전 영문과 입학 후에는 작가지망생 모윤숙과 기숙사 룸메이트로 지냈다. 영문과 학생 중에서도 특히 회화 실력이 뛰어났던 감수임은 광복 전 세브란스병원 미국인 치과과장의 비서이자 통역으로 취직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수임은 1945년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46년 가을, 헌병감 베어드 대령의 특별자문으로 고용돼 1949년 6월까지 미국 정부의 월급을 받았다. 김수임은 모윤숙이 만든 '낙랑클럽'이라는 주한 미군 대상의 사교 클럽에서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베어드와 동거를 시작하며 미군의 힘에 편승한 권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김수임은 1942년 무렵 알게 된 독일 유학생 출신의 좌빨 지식인 이강국에게 푹 빠져 남로당원이 되어 있었던 바, 그의 힘은 모두 공산당을 위해 쓰였다.

김수임과 이강국 / 이강국은 1925년 보성고보를 우등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자산 300만 원의 부호였다는 처가의 도움으로 1932년 독일 베를린대학으로 유학했는데,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과학동맹 등의 단체에 가입하며 좌경화되었다. (중도일보 DB) 이중업은 1949년 10월 월북하라는 지령이 내려지자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까지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월북 지령이 하달되자 이중업은 김수임을 도움을 받아 미국인처럼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그리고 서양 수입 원단으로 만든 고급 양복을 입고 최만용이 모는 고급 승용차에 오르니, 큰 키에 서구적 마스크를 지니고 있던 이중업의 모습은 영락없는 미국인이었다. 운전기사 최민용은 김수임의 의붓동생으로 역시 빨갱이 사상에 물든 자였다.
김수임은 개성의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베어드로부터 미국 대사관의 관용 지프차를 빌렸다. 이후 이중업을 미국인 의사로, 최만용을 조수로 위장해 개성까지 내달았다. 당시 개성은 3.8선 남쪽에 있었지만 개성 부근에서는 여러 차례 검문을 거쳐야 했는데, 미국 대사관 관용차에 탄 미국인 의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가 개성을 지나 접경 지역인 황해도 배천에 이르자 이중업은 차에서 내려 북을 향해 냅다 뛰었다.
이중업의 탈옥과 월북은 이렇듯 영화처럼 성공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직전 다시 지령을 받고 내려와 유언비어 등으로 후방을 교란했다. 이중업의 월북을 도운 김수임은 1950년 4월 체포되어 간첩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당시 39세였다. 이중업의 최후도 비극적이었으니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자신의 우두머리였던 박헌영, 이승엽 등과 함께 '미제 간첩 및 정부 전복 음모'라는 죄목으로 걸려들어 결국 총살로서 생을 마감했다.

법정에서의 김수임 /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절망하고 있다. 당시 김수임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3조 ‘간첩이적행위’였으며 전쟁 발발 10여 일 전인 6월 14일∼16일까지 진행된 군법회의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김수임 사건은 수차례 극화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좌경적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잊힌 사건이 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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