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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들이 노린 제주도와 연평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28. 21:58

     

    1406년(명나라 영락 4년, 조선 태종 6년) 음력 4월 20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양영(楊寧)·한첩목아(韓帖木兒)·상보사상보(尙寶司尙寶) 등이 와서 제주도 법화사(法華寺)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을 요구한 것이다. 이유인즉 황제(영락제)가 수도 금릉(남경)에 돌아가신 부모를 위한 원찰 대보은사를 건립했는데 그곳에 봉안할 불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국인 명나라에서 겨우 불상을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불상을 요구하는 사신의 변(辯)은 이러했다. 

     

    "제주 법화사의 미타삼존(彌陀三尊)은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濟州法華寺彌陀三尊 元朝時良工所鑄也 某等當徑往取之)

     

    갑자기 찾아온 명나라 사신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태종 임금은 요구의 가벼움에 크게 안심한다. 그리고 그 안도감에 농담까지 곁들이며 허락해 마지않는다. 

     

    "정말 마땅하고 말고. 다만 부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소."(上戲曰 固當 但恐水入耳)

     

    그러자 사신인 첩목아 등이 모두 크게 웃었다.(帖木兒等皆大笑) 명나라가 제주 법화사의 불상을 거리낌 없이 요구한 이유는 사신의 말대로 그것이 원나라 장인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 같이 법화사는 탐라가 원나라의 직할령일 때 흥왕한 절이었다. 따라서 몽골인들의 절이었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데, 이에 불상도 원나라 기술자가 와서 만든 (혹은 원나라에서 가져온) 모양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명나라 사신의 요구인즉, 중국사람이 만든 불상이니 우리가 되돌려 받겠다는 것이었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조선초의 불상 / 서울 조계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조선초의 불상 / 국립중앙박물관

     

    태종 또한 흔쾌히 내주었다. 고려 때라면 얘기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을 국시로 내건 조선이었던 바, 불상 따위야 오히려 가져가면 땡큐였다. 그런데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명나라의 요구 속에 숨어 있는 음모를 캐치해내고 이를 태종에게 고한다.(그 영민한 신하가 누구인지는 실록에도 안 나와 있다)

     

    "황제가 황엄 등을 보낸 것은 (불상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 탐라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필시 (숨은) 뜻이 있습니다."(帝使儼等觀耽羅形勢 意有所在) 

     

    태종은 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탐라가 원래 원나라의 직할령(탐라총관부)이었다는 이유로서 홍무제(명태조 주원장) 때부터 탐내 온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그였다. 이에 심히 걱정한 태종은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명나라 사신들이 제주도에 가지 못하도록)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謀)를 선전관으로 임명해 제주에 급히 가서 법화사 동불상을 모셔 오게 하였다.(上憂之 謀諸群臣 急遣宣差金道生 司直朴謨 馳往濟州 以法華寺銅佛像來)

     

     

    그 긴박한 상황이 기록돼 있는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 4월 20일 경진 4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 박은(朴訔)의 장계에는 당시의 화급함이 실려 있다.

     

    "국가에서 박모 김도생 등을 보내어 동불(銅佛)을 제주에서 가져오게 하오매, 신은 먼저 제주 목관에 이문(移文)하여 법화사의 동불 3좌(座)를 급히 수출(輸出)해서 배로 실어 보내게 하였더니, 제주 목관에서는 신의 이문을 보고 즉시 이졸(吏卒)들을 동원하여 그 동불을 운반하여 바닷가에 막 도달할 무렵, 그 이튿날 박모 등이 잇달아 이르렀습니다. 마침 쾌풍이 불므로 즉시 싣고 나와서 겨우 해안에 이르렀는데, 바람과 물이 순탄치 못하고....."(國家遣朴謨 金道生等 取銅佛於濟州 臣卽先移文濟州牧官 法華寺銅佛三坐 作急輸出 載船送來 濟州官見臣移文 卽發吏卒 輸其銅佛 將至海濱. 翌日 朴謨等繼至 會有快風 卽得押載出來 纔到岸 風水不順.....)

     

    이렇게 태종은 사신들이 제주도에 가지 못하도록 재빨리 사람을 보내 법화사 동불상 3구를 해남으로 서둘러 옮겨왔다. 그리고는 황엄 등의 명나라 사신을 달래 불상과 함께 명나라로 보냈다.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1419년(세종 1년) 명나라 사신 황엄 등이 다시 파견돼 왔다. 이번의 방문 목적은 조선 전역의 불교 사찰에 소장된 불사리를 명나라로 강제 진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태종은 이번에도 그 뜻을 들어주어 전국의 석탑과 사탑 등에 보관된 모든 사리를 빠짐없이 올려보내라고 명했다. 

     

     

    법화사지 출토 명문기와 / 지원(至元)은 원세조 때의 연호이다.
    법화사지 출토 와당과 청자 / 국립제주박물관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뒤에 옛 법화사 터가 남아 있다.

     

    명나라 사신 황엄과 유천 등은 한양에 머물며 조선 측이 수집해 온 진신사리와 정골 등을 낱낱이 검사한 후 명나라로 가져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태종이 순순히 보내지 않았으니, 환송연을 가장해 명나라 사신들을 수강궁(壽康宮, 현 종로구 와룡동 창경궁 일대 자리)에 초대한 후 화산희(火山戱)를 감상케 했다. 화산희는 화포가 쏘는 화약이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놀이로서 형식이 현대의 그것과 다름 없었다.

     

    당시 태종은 상왕(上王) 자격으로 사신들과 함께 화붕(火棚)에서 터지는 불꽃놀이를 구경하였고, 불꽃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폭음이 궁궐을 뒤흔들자, 명나라 사신들은 이를 "심히 기이하게 여겨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실록의 기록이 증언한다. 황엄 등은 조선 화포와 화약의 신묘함에 아마도 등에 땀이 흘렀을 것이다. 이후 사신들은 화포 구경을 청하였고 태종이 이를 손수 보여주었다. 조선의 무기가 이렇듯 가공하니 감히 조선을 넘보거나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었을 터였다. 

     

    1431년(세종 13)에는 윤봉과 창성 등이 명나라 사신으로 왔다. 표면적 목적은 명나라 황제의 칙서(고명 등) 전달과 조공 및 하사품 교환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해동청(매) 같은 진귀한 동물 징발 및 개인적 회뢰(賄賂, 뇌물 수수)가 주된 목적이었다. 이에 세종은 전왕 태종의 예에 따라 화포로써 명나라 사신을 겁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및 의정부 찬성이었던 허조가 이를 반대했다. 조선 화포의 성능이 명나라보다 극히 우수하여 국가 기밀에 해당하므로 이를 사신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또 화약원료(염초)가 매우 귀하므로 쓸데없이 낭비해선 안 된다고도 조언했다. 세종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래도 조선초에는 이런 시원한 장면이 있었다. 

     

     

    조선초의 화포 / 전쟁기념관
    조선초의 총통 / 전쟁기념관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를 향해 기습적으로 포격을 감행한 이른바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정전 협정 이후 적국이 최초로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 피해까지 발생시킨 심각한 무력 도발 사건이다. 연평도 포격 도발은 김정일의 후계자였던 김정은의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 권력 장악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교히 기획된 정치·군사적 사건이었다. 

     

    개요를 살펴보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경, 북한이 서해 연평도 북방 개머리 및 무도 해안포 기지에서 해안포와 곡사포 약 170여 발을 발사하여 그중 80여 발이 연평도 내륙에 떨어졌다. 표면적 원인은 당시 우리 군의 정례적인 해상 사격훈련에 대한 반발로 잠작된다. 이에 해병대 장병 2명 전사(서정호 하사, 문광호 일병), 민간인 2명 사망, 군인 및 민간인 19명이 중경상을 입고, 연평도 내 주택과 산림이 파괴되고 불에 타는 등 심각한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2010년 11월 25일 최초 피격 순간을 담은 사진
    북한의 포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평도

     

    연평도 주둔 해병대는 교전 규칙에 따라 즉각 K-9 자주포로 북측 개머리 및 무도 해안포 진지를 향해 80여 발의 대응 사격을 실시했다. 이에 북한군 해안포 진지가 파괴되고 다수의 북한군이 사상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나는 이때의 대응이 K-9 자주포에 의한 포격이라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다 할 해안포가 없다는 점에 크게 놀라고 실망했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K-9 자주포 포격 결과를 보고 더 커졌다. 야전용 K-9 자주포에 의한 대응사격이다 보니 북한군 해안포 동굴에 대한 정밀타격이 안 되었던 바, 그저 겉만 쏴대는 분풀이성 대응에 그친 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응징에는 미치지 못한 대응사격이었다. 쏘다 만 듯한 대응도 아쉽다. 그래서야 어디 적이 겁을 먹겠는가? 아무튼 이후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창설되고, 연평부대와 백령도 등지에 K-9 자주포 추가 배치 및 차기 다연장로켓(천무), 스파이크(Spike) 정밀유도미사일, 대포병탐지레이더(ARTHUR-K) 등이 보강됐다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긴 하지만 그나마 응징 전력이 보강이 돼 다행이라 여겨진다. 

     

     

    K-9 자주포 포격 광경

     

    이상 연평도에서의 실망감은 엊그제 이재명 대통령이 연평도 해병대 부대를 방문했을 때에 비하자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재명은 지난 6월 24일 해병대 연평부대를 방문해 장병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는데, 이때 한 병장이 연평도 방문 소감을 묻자 "포격전이 벌어졌던 아주 위험한 전방이기도 한데, 헬기에서 내려다보니까 낚시하면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가하게 낚시타령을 했다. 아울러 징집병을 최소화하고 원하는 직장으로 군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적 모병제의 도입 의지도 언급했다. 모두 현 군복무 중인 군인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선택적 모병제라니,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올 초의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2026년 1월 4일 벽두 뉴스의 Top은 "국가에 돈이 없어 일선 군부대와 방산업체에게 지급해야 할 1조 8천억 원에 달하는 국방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으며, 군부대와 방산업체는 당장의 어려움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군부대에 지급할 돈에는 장병 급식비와 피복비 604억 및 군수비용 2,235억이 포함돼 있었다. 그동안 반도체 등의 호황으로 세수(稅收)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병제라니 언감생심도 유분수가 아닐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K9A1 자주포에 탑승해 K-6 중기관총을 잡았다. / 너무나 어설퍼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우스꽝스런 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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