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문종과 그의 딸 경혜공주'에서 언급했던, 당시 근방을 한참 헤매었음에도 찾지 못했던 고양시 경혜공주의 무덤을 오늘 발견했다. 아마도 조선에서 가장 기구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의 무덤이지 않을까 한다.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 빌미가 된 것이 바로 계유정난으로, 세조는 단종을 제거한 후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寧陽尉) 정종은 거열형(車裂刑)으로 죽이고, 누나이자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전라도 나주부의 관노로 보냈다.
드디어 발견한 경혜공주 묘고양시 대자동 경혜공주 묘와 정종의 가묘(오른쪽)경혜공주 묘묘표정종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로서 제단 형식으로 꾸며졌다.쓰러질 듯한 문석인 / 표정도 한없이 슬퍼 보인다.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도 쌓아졌던 듯하나 크게 망가졌다.
그의 기구한 삶은 세종 때 집현전 학자였던 이승소(李承召)가 자신의 시문집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에 '경혜공주 묘'라는 글을 쓰며 전후 사정을 잘 기록해 놓았다. 경혜공주의 삶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해오는 것은 이승소의 공이 크지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의 사후와 경혜공주의 노비 이후의 삶도 기록돼 있어 눈을 끄는데, 얼마 전 공전의 기록을 낳은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도 <연려실기술>에 기인해 만들어졌다.
즉 <세조실록>에는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려실기술>에는 영부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관아의 만류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장사를 치렀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은 훗날 단종이 복위되면서 엄홍도의 6대손인 엄철업 등에게 군역(軍役)과 잡역(雜役)을 영구히 면제해 주는 특권이 기록된 이른바 '엄홍도 완문'(完文)이 발급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역사서 <연려실기술>'엄홍도 완문'
특히 <연려실기술>에는 경혜공주의 큰 배짱이 기록돼 있어 매우 흥미롭다. 경혜공주는 딸 하나를 데리고 만삭의 몸으로 순천부에 내려왔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던 바, 순천부사인 여자신(呂自新)이 정말로 관노로써 노동을 시키려 하자 순천부 동헌 의자에 올라앉아 "네가 진실로 나를 일 시키려 하느냐? 내 비록 귀양을 왔지만 왕의 딸이다. 일개 지방 수령 따위가 어찌 감히 노비의 일을 시키려 든단 말이냐?"며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팩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정도의 배포라면 세조나 그의 모사꾼 한명회에게도 당당히 맞섰을 가능성이 크니 12살 단종의 다섯 살 위 누나 경혜공주는 단종의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문종 왕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다음날 산후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문종은 홀아비로 살았는데, 계비라도 들여 단종의 계모가 존재했다면 수양대군은 감히 쿠데타를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 소헌왕후(세종대왕의 부인)가 생존했더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단종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계모도 할머니도 모두 없었고 오직 경혜공주뿐이었다. 하지만 경혜공주는 겨우 17살로 너무 어렸고 매형인 정종 역시 17살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정종에게 내란죄가 씌워져 유배 갔을 때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아무리 나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지금과는 다르다 해도 무엇을 도모할 나이는 못되었을 터인데, 내란죄가 씌워진 것이다. 인척인 효령대군이나 영응대군이 모두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편에 선 반면, 정종의 집안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경혜공주는 15살인 1450년(세종 32) 전 한성부윤(서울시장)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鄭悰)과 서둘러 혼인하였다. 이유는 세종의 병이 악화되었기 때문으로 세종이 승하하여 삼년상을 맞는다면 자칫 18살을 넘어 가혼연령을 넘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노처녀가 돼 혼처를 놓칠 수도 있기에 서둘러 결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했던 결혼은 단 3년 만에 끝나고 말았던 바,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며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공주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수양대군은 이때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숙청시켜 버렸는데, 그 가운데는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寧陽尉) 정종도 있었다. 정종은 처음에는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금성대군과 친했다는 이유로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가 경기도 양근, 수원, 김포 통진으로 옮겨졌다. 이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에는 멀리 전라도 광주로 이배되었다. 이때 경혜공주도 남편을 따라 광주로 갔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한 삶이었다.
하지만 수양대군 측이 끈질기게 뒤집어 씌운 내란 프레임에서는 헤어날 수 없었으니, 1456년 유배지 광주에서 성탄(性坦)이란 승려와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끌려 올라와 극형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거열형을 당해 죽었다. 성탄스님은 정종과 가까이 지냈다는 죄 아닌 죄로 참수당했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은 4년 뒤였다. 이렇게 하여 경혜공주는 부모, 동생(단종), 남편을 모두 잃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기구한 삶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나 전라도 순천부의 관노비로 추락하였고, 어린 딸, 젖먹이 아들과 함께 노비의 삶을 살았다. 해주정씨 가문에서 전하는 이야기에는 경혜공주가 임신한 몸으로 순천부의 관노로 갔을 때, 세조가 환관에게 이르기를 딸이면 데리고 오고, 아들이라면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인인 정희왕후가 다시 그 환관을 불러 문종의 핏줄이라고는 그 임신한 아이밖에 없으니, 공주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라고 해도 데리고 오라며, 임금을 속인 죄는 자신이 직접 감당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공주는 아들을 낳았고, 환관이 그 아들을 정희왕후에게 데려다 주자 왕후는 그 아이에게 여자 옷을 입혀 궁중에서 길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가 그 아이를 보고 흡사 남자아이와 같다고 하자 그때에서야 왕후가 사실대로 고했고, 세조는 그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눈물을 쏟으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로 공주의 죄를 용서하여 궁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대궐 밖에 집을 지어 살게 하였다고 하는데, 믿을 것은 못돼도 아무튼 이듬해 경혜공주는 1년 만에 사면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미수와 부인 전의이씨 무덤 / 진건읍 사능리 사릉 내에 위치한다. 정미수는 정희왕후의 도움으로 벼슬길에도 나갔고 성종 때인 1473년(성종4) 돈녕부직장을 거쳐 형조정랑에 올랐다.단종 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사능 / 현재 남양주시 진건읍에 정순왕후의 무덤이 마련된 이유는 정미수가 후사가 없던 외숙모 정순왕후(단종의 비)의 시양자(侍養子)가 되었고 정미수의 본관 해주정씨의 선산이 현재의 진건읍 사릉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덮개가 있는 사능 예감 / 제사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고양시 대자동 충민사 / 경혜공주와 정종을 모신 사당이다.정종의 본관인 해주정씨 종친회에서 2025년 건립했다.경혜공주 묘 가는 길중간에 만날 수 있는 영양위(정종) 한글 신도비경혜공주 묘와 정종의 가묘김홍집 묘 가는 길멀지 않은 곳에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의 초라한 묘가 있다. / 김홍집은 광화문광장에서 요즘의 좌빨과 같은 패악한 민중에 맞아 죽었다.가는 길에 김주신의 신도비가 있다. / 김홍집은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의 장인 김주신 (金柱臣)의 5대손이다.그들 경주 김문을 모신 재실이다.재실 앞에 아담하고 예쁜 산중 연못이 있다. 자칫 지나치기 쉽다.다른 방향에서 찍은 사진대자동에는 성녕대군 묘도 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아들로 충녕대군(세종)의 동생이다.성녕대군은 어릴 적 죽어 태종 부부에게 단장의 슬픔을 주었다. 사진은 봉분 주위의 석호와 석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