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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쇄도감, 체질화된 노예근성? 부당해도 저항하지 않는 21세기의 백성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13. 20:57

     
    구한말 조선에 간첩으로 온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라는 사람이 있다. 후쿠오카 낮은 신분의 사무라이였던 그는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지식인 대열에 편승했고 정한론(征韓論) 쪽 인사가 됐다. 이후 한반도와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찾기 위한 일환으로써 조선에 건너와 약장수 등으로 위장해 전국을 돌며 견문하고 정탐했다. 이후 자신의 경험을 적은 <조선잡기>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내용 중에는 조선에 노예가 존재함에 놀라는 대목도 등장한다.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와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에 아직도 노예제도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조선의 사정을 깊이 조사할 때 실로 놀랄만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큰것이 노예제도이다. 조선에서는 중류 이상의 양반이라면 모두 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데리고 있다....  
     
    이들은 봉급을 받고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돈을 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력에 눌려서 인질이 된 자로, 일단 이렇게 되면 자자손손 영구히 주인집의 천한 일에 복종하고, 개나 말과 같이 일을 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그리고 저들 노예는 이러한 나쁜 습관에 속박되어 평생 주인집에 묶인 바가 된다. 장가를 가도 자식을 결혼시켜도 내 의사대로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하거나, 쉬거나, 말하거나 하는 일까지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계속해서 먹을 수도 없다. 추워도 옷을 껴입을 수가 없다. 만사를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하인이 된 자는 하늘로부터 받은 정신을 주인에게 바치고 개나 말과 같은 지경에 떨어져도, 참담한 슬픈 눈으로 눈물을 머금고 일생을 마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생 대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자자손손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막힌 운명에 빠지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인의 대우가 가혹하며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몰래 탈주하여 유민이 되는 자가 많다. 그러다 불행히도 다시 주인에게 사로잡히면 신의를 배반한 불충의 죄를 받아 한층 더 잔혹한 대우를 견뎌내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들은 불쌍한 무고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가 대략 1893년(고종 30)으로 규스케는 그때까지도 조선에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고 크게 놀라고 있다. 이는 1873년 러시아주재 일본공사로 파견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가 당시까지도 남아 있는 러시아의 농노제를 보고 놀랐다는 기록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구 제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시민사회를 이룩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받는 사회가 돼 있었음에도 러시아는 아직 중세의 농노제가 존속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울러 조선은 러시아와 함께 자국민을 노예로 부렸던 세계 유이(唯二)의 나라였다는 설도 존재하는데, 다만 규스케는 조선의 노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조선의 노예는 위 혼마 규스케의 설명과 달리 스스로 노비가 된 경우가 많았다. 부유한 주인에게 예속되지 않고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남의 노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부자인 사람은 이른바 양반으로 불리는 관료였다. 앞서 황희 정승에 대한 포스팅에서도 설명헸지만 조선시대 문무 관료들에게 기본적으로 과전(科田)이 지급됐고, 그중 당상관(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절충장군 이상)은 100결의 토지를 받았다. 100결을 현대의 평방미터(㎡)로 환산하면 토지의 등급(비옥도)에 따라 약 100만㎡에서 400만㎡ 사이의 넓이를 나타낸다.
     
     

    광화문광장 세종문화회관 앞의 장예원 터 표석 / 장예원은 조선시대 노비 장부를 관리하고 노비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거기에 1품인 정승까지 오르면 과전이 150결까지 뛰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고위관료는 부자일 수밖에 없었고, 그 땅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하인, 즉 많은 노비를 필요로 하였다. 물론 땅을 빌려주어 소작을 붙일 수도 있었지만 양반들은 이런 방법을 극히 꺼렸다. 소작농이라 할지라도 땅을 가진 사람은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했기 때문이니 노비를 두고 직영하는 쪽을 선호했던 것이다.
     
    다만 그 노비들은 주인집에 거주하면서 가내 노동이나 경작을 하던 솔거노비와, 밖에 살며 비교적 자유가 주어지는 외거노비로 나뉘었는데, 양반의 집에 예속된 신분이라는 것은 같았다. 지금껏 우리나라에 관료사회의 풍습이 남아 있는 것도 필시 조선시대 600년 동안 이어져온 노예제도의 영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려시대에는 완전 천민취급을 받던 향,소, 부곡민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포함한 천민보다 백정이라 불리던 양민이 훨씬 더 많은 사회였다)  
     
    그 풍습이 남아 있을 만큼, 그래서 지금도 혹간 국민들을 개 돼지 취급하고, (법을 무시하고 이재명에 대한 공소취소를 해도) 열 명 중 여덟, 아홉 명은 공소 취소의 뜻을 잘 모른다(그래서 해도 괜찮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국민을 개무시한 발언이 아닐 수 없는 바, 혹 한 두 명이 모를 수 있을까, 열에 여덟, 아홉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이 얘기는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한 '조작 기소 특검법'과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박성준 의원이 한 말이다)
     
     

    이 자는 '추미애 아들이 안중근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해 사회주의 혁명으로써 황제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이룬 러시아 농노들과 달리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저항에도 소극적이었다. 노비들이 취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 방법은 도망이었다. 도망간 노비들을 잡는 일은 예조에 딸린 장예원(掌隷院)이 맡아 했으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혼란기에 있어서는 도망간 노비들이 급증했던 바, 임시 특설관청인 추쇄도감(推刷都監)이 운영되기도 했다.
     
     

    추쇄도감이 있던 곳 / 왕실 별궁이었던 남별궁(南別宮) 내에 추쇄도감이 꾸려졌다. 지금의 웨스턴조선호텔과 황궁우가 위치한 곳이다.

     
    하지만 폐쇄주의 사회인 조선에 있어 도망에는 상당한 용기가 뒤따라야 했다. 결국 노비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다 갔는데, 더러는 애꿎은 무생물에 화풀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조 때의 서얼 출신의 관료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노비들이 혜화문 밖 불상을 훼철해 없앤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 동부의 노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분풀이성 놀이로써 혜화문 밖 불천(佛川, 성북천으로 추정됨)에 있던 불상을 훼손해 결국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 돌부처가 힘 없는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부처의 이름도 노불(奴佛, 노비부처)이었다. 저자인 성대중은 자신이 젊었을 때만 해도 노불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즉 나이가 먹은 지금은 돌부처가 없어졌다는 뜻인데, 그의 생몰연대가 1732~1812년인 것을 보면 순조 무렵 사라진 듯하다. 그리고 이후로는 민란의 시대로 돌입하니 드디어 홍경래의 난(1811)과 진주민란(1862), 동학난 같은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게 된다.
     
     

    용인 경기도박물관 앞의 부처 / 안내판에는 '선돌'이라고 돼 있으니 망가진 부처의 형태를 살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노력이 초석이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써 신분제와 노비제도가 법적으로 전면 폐지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근대 사회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21세기인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권력가에게 휘둘리는 노비가 존재하는 듯하다. 이미 16세기 프랑스에 살던 사상가 에티엔 드 라 보에시(Étienne de La Boétie)가 <자발적 복종론>에서 "국민 스스로가 굴종을 선택하기에 독재자가 군림한다"고 경고했음에도 말이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악마가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독재자와 악마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아부하지 않고 굴종하지 않으며, 돌부처의 얼굴이나 갈아대는 헛수고를 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어서야 한다. 아무리 아무 것도 하기 싫어도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인 선거가 훼손되었거나 참정권이 침탈당한 경우는 일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자가 국민들을 개 돼지로 여겨 군림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굴종을 거부했다.
    '국가의 죽음은 국민의 침묵이다'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침묵을 깨고, 일어나 외쳐달라'고 호소하는 구호들
    김현태 단장과 전한길 쌤의 얼굴도 보이다.
    이 얼음물은 지원받은 것으로 누구나 가져가 마셔도 된다.
    의료지원 팀도 있다.
    바닥에 화장실 안내 표시를 해놓았다.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것은 기본이다.
    이 친구들은 거의 하루종일 쓰레기 치우는 봉사만 하는 듯하다.
    핸드볼경기장 1-3 게이트 앞의 열기는 변함없이 뜨겁다.
    1-2 게이트 쪽은 조금 한가해 보였지만
    계단을 오르니 마찬가지로 뜨겁다.
    그 열기를 피해 잠시 올림픽공원 양귀비 밭을 거닐었다.
    올림픽공원 제8경 들꽃마루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최인수 작가의 '대지의 귀'(Ear of the earth)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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