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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항미원조전쟁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12. 10:21
전쟁기념사업회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준비한 교육프로그램에서 6·25전쟁이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실어 논란이 되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운영하는 단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 국방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서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하고, 국민에게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을 알리기 위해 1994년 개관하여 지금껏 운영되고 있다.

용산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참수리 호 /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북한군과의 교전 중 침몰한 고속정이다. 
전쟁기념관 마당의 모뉴먼트 
이번에 문제가 된 포스터 
6.25전쟁이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그대로 실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금번 6.25전쟁 76주년을 맞아 ''6·25전쟁, 서로 다른 해석'이란 주제로 전쟁기념관 특화해설 프로그램을 지난 5월 30일 시작하며, 그 홍보 포스터에 '6·25전쟁 서로 다른 해석, 압록강을 바라보는 두 시선'이라는 소개와 함께 태극기 배경의 '6·25전쟁' 문구와 오성홍기 배경의 '항미원조' 주장을 양옆에 나란히 배치해 문제가 됐다. 항미원조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돕는다는 뜻으로, 중국당국이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됐단 점을 강조하기 위해 남침 일자를 딴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에서 중국의 '항미원조' 주장을 소개함으로써 중국의 주장이 수용 가능한 시각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인(Sign)이 던져진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사업회 관계자는 "6·25전쟁이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중국의 왜곡된 주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번 교육의 취지"라며, 중국의 시각으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변경된 해당 게시물 이어 전쟁기념사업회는 "교육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이나 관련 홍보물은 표현 방식이 적절치 못했다고 판단해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이에 관한 국방부 대변인의 답변은 언제나 그렇듯 모호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나는 이 여성 대변인의 태도에 불만이 있는지 오래라 아예 청취를 않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게 듣게 되었다. 나는 이 자가 '항미원조'에 대해 알고 있기나 한지, 알고 있다면 그 시각이 좌파적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 기자 : "국방부는 6.25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계세요?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보고 계세요?"
국방부 대변인 : "제가 아직 보도 내용을 자세히 보지 못해 답변이 제한됩니다."
* 이 여성 대변인은 "답변이 제한된다"라는 답변이 주특기이다. 하도 궁금해 AI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그와 같은 수동태 형식으로 표현으로써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규정이나 상황 같은 외적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답을 못한다'는 인상을 주어 거부감을 희석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 국방부가 문제라는 얘기다.
차제에 '항미원조'에 대해 분명하고자 아래의 글을 게시한다. 이미 5년 전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이나 시의가 적절한 듯해 내용의 일부를 옮겨 보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잊을만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복장을 긁는 소리를 한마디씩 해대 분노가 삭히지 않는데, 이번 일의 시작은 2020년 10월 19일, 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항미원조(抗米援朝) 작전 70주년 전시'를 참관하며 "(항미원조 전쟁은)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여 이룩한 정의와 평화의 승리"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항미원조'란 중국이 6.25 전쟁을 이르는 말로, '침략자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란 뜻이다.
시진핑은 이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군 항미원조 참전 70주년 행사' 연설에서 "미국 정부는 국제 전략과 냉전 사고에서 출발해 한국 내전에 무력 간섭키로 결정했으며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북중 접경까지 끌고 왔다"며 6.25가 북침으로 비롯된 전쟁임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25일, 한국전쟁 참전 노병들을 초청해 열린 '항미원조전쟁 참전 좌담회'에서 "위대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재차 피력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연합해 북침했다는 북한의 주장과 다를 게 없는 언급이었는데, 나아가 그는 "중·조(중국·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가 흘린 피로서 맺어진 위대한 우정"을 언급하는 등 북·중 혈맹 관계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자 곧 중국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共産主義靑年團, 약칭 공천단)은 이상의 내용을 일반인에게 알렸다. 조선전쟁(한국전쟁)은 내전(內戰)에서 비화된 북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지금까지 교과서 등에서 명확한 표현을 피하던 관례와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항미원조 7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한국전쟁은 남침이 아니라고 말하는 공청단 / 공청단은 단원이 8000만명이 넘는 중국 공산당 내 최대 조직 중 하나이다. 공청단은 25일 중국의 트위터 격인 웨이보(微博)에 올린 글에서 "한국전쟁은 북한이 한국을 침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아니다"(不)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이어 "당시 북한과 한국은 서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이 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 한 국가의 내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진 "항미원조 전쟁에서 이겼느냐"는 물음에는 "이겼다"고 답했고, "항미원조의 기점은 압록강이었는데 세계 1강국(미국)을 압록강에서 38선으로 물리쳤으며, 미국의 북한 전역에 대한 무력 점령 시도를 송두리째 부숴버렸다"라고 덧붙였다.
중국 정부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6.25전쟁이 남침이 아니라는 공청단의 주장에 동의하는가"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6.25전쟁은 본래 한반도에서 남북 쌍방간에 발생한 것으로 내전에 속한다"고 전제하며, "한국전쟁은 그 내전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의 성질이 (국제전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6.25는 남북한 간의 내전이었음에도 미국이 개입해 북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시진핑 주석의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발언을 덧붙이면 "(남북한 내전 중) 북한을 침범한 미국 전투기는 중국 동북 지역을 여러 차례 폭격했다" 이에 "중국 지원군은 북한 전장에 들어갔고 이는 정의로운 행위 중의 정의로운 행동"이었으며 "전쟁 기간 중국 공산당은 북한군과 힘을 합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고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했다.(점입가경으로, 우첸 중국 국방부 대변인은 29일 월례 브리핑에서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은 반드시 영원히 전승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상은 모두 궤변이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이기자 북한의 김일성은 크게 고무되어 남침을 계획했다. 이어 1950년 1월 미국의 태평양방위선인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자 6월 25일 4시 김일성은 7개 사단 9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그 선봉에 섰던 부대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중공군 2개 사단이다. 하지만 그들 중공군과 북한군은 전세가 역전되며 궤멸되었고, 한국군과 UN군이 북상하여 평안북도에 이르자 드디어 진짜 중공군이 출현했다. 10월 19일의 일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18개 사단 26만여 명이, 11월 초에는 12개 사단 12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공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제15연대를 기습공격했다. 뜻밖의 일격을 당한 국군은 크게 당황하여 패퇴했는데 중국은 한국군에 첫 승리를 한 이 날을 항미원조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이후로도 중공군의 공격은 화력이 약한 한국군에 집중됐다) 그 공격이 있고 얼마 후, 두꺼운 흰색 솜옷을 입고 중국 광동어를 쓰는 적군 한 명 생포됐다. 중국계 조선인이냐 묻자 그는 중국인이라고 답했다. 중국의 개입이 드러나는 순간이자 목전에 이르렀던 남북통일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붙잡힌 중공군 포로 마오쩌뚱은 참전 직전인 10월 13일 10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낸 '출병결정통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오강(高崗)과 펑더화이(彭德懷) 두 동지 및 기타 정치국 동지들과 논의한 결과, 전원이 우리 군대가 조선으로 출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괴뢰군(한국군)하고만 싸운다. 우리 군대는 괴뢰군과의 싸움에는 자신이 있다. 조선의 평양-원산 이북의 넓은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조선인민을 분발시켜 인민군을 재조직할 것이다. 2개월 후에는 소련 공군의 지원이 가능하며 6개월 후에 소련이 제공한 대포와 탱크로 훈련을 마치면 그때에 미군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전쟁에는 우리가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이익이 아주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아주 크다."
그러나 이것은 마오쩌뚱의 오산이었다. 스탈린은 대대적으로 중공군을 도울 것처럼 꼬셔 마오쩌뚱의 참전을 이끌어냈지만 중공군은 그저 총알받이일 뿐이었고, 아울러 중국은 손해가 매우 컸으니 결정적으로는 자국의 경제를 20년 이상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뚱은 편지에서 가오강과 펑더화이가 참전에 찬성했다고 말했으나 사실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비록 한국전 사령관으로 참전은 했지만 펑더화이는 처음부터 반전론자였던 바, 그가 회의에 참석했다면 중공군의 참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펑더화이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날 회의에 불참했고 대신 그의 참모였던 시중쉰(習仲勳)이 참석해 찬성표를 던졌다. 훗날 마오쩌뚱은 이를 평가절하해 "출병에 찬성한 사람은 1.5명"이라고 했다. 자신을 한 표로, 시중쉰을 0.5표로 계산했던 것인데, 시중쉰의 찬성표는 그저 마오의 눈치를 살핀 결과라는 것이 후세 정치가와 역사가의 중론이다. 이 시중쉰이 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아버지다.
펑더화이와 시중쉰(오른쪽) 
펑더화이(왼쪽에서 두 번째)와 시중쉰(왼쪽에서 세 번째) 
대를 이어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시진핑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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