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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은 묻히고 반일(反日)만 남은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3. 09:13
지금은 모두에게 생소한 특무대장 김창룡과 김창룡 암살사건에 대해 AI에게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모든 AI의 대답은 입력된 자료를 정리해 토출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보면 현재 우리나라가 얼마나 좌경화되었는지, 아울러 그간 좌파들의 공작이 얼마나 지대했으며 성공적인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승만 대통령과 김창룡 특무대장이 함께 벌인 반공정책은 말살되고 반일 프레임만 살아남은 것이다. AI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특무대장 김창룡(1920~1956)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항일운동가를 탄압하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특무부대장(방첩대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좌익 색출 및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 역할을 한 군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입니다. 자세한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항일 탄압 헌병보조원 활동으로 집약됩니다. 만주 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며 항일 무장 세력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는 데 앞장섰고, 해방 전까지 50여 개에 달하는 항일 조직을 적발하여 악명을 떨쳤습니다.
광복 이후
군 입대 후 신분 세탁 및 초고속 승진과 특무대장 취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와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탁월한 정보 및 대공 수사 능력을 인정받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특무대의 전신)에서 일하며 군대 내 남로당 등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등 이른바 '숙군 작업'을 주도하며 공을 세워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1951년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이후 소장까지 진급했습니다.
권력의 정점과 악행. 민간 사찰 및 정치 공작
특무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비밀정보기관으로 기능했습니다. 김창룡은 정적 제거, 간첩 조작,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의 배후 연루, 양민학살 등 각종 국가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그는 군과 경찰, 사법 기관을 아우르며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피살과 최후
김창룡은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부하 군인(허태영 대령 등)이 사주한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사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중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발표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현재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의 김창룡 / 당대의 미장센이 묻어 나는 사진이다.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 중이던 육군 특무부대(이하 특무대) 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탄 지프 차를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에서 또 다른 지프 차가 가로 막았다. 번호판도 없는 수상한 차였다. 운전자인 박 중사가 클랙슨을 누르며 비키라는 신호를 하였으나 이 수상한 지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박중사가 다시 클랙슨을 울리려는 찰나, 전신주 뒤에 숨어 있던 괴한 1명과 뒷골목에 숨어 있던 괴한 1명, 그리고 지프 안에 타고 있던 운전자가 권총을 뽑아 차 안의 감창룡 소장을 향해 발사했다.
총알 중 2발은 김 소장의 가슴을 관통하고 1발은 턱에 명중됐으며, 2발은 박 중사가 맞았다. 총을 쏜 자들은 모두 계급장이 미 부착된 군복 차림이었으며 지프도 군용차량을 변색한 듯 녹색 바탕에 청색이 덧칠된 모습이었다. 범인들 그 번호판 없는 지프차를 타고 도주했다. 박 중사는 총을 맞았음에도 필사적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차를 몰았고 다시 수도육군병원으로 갔으나 수도육군병원에 도착했을 때 김창룡은 이미 절명한 후였다.
김창룡 특무대장이 살해된 현장 / 자혜병원이 있던 곳에는 지금은 용산경찰서 민원실이 들어섰다. 암살은 이 민원실 앞 길에서 이루어졌다. 범인이 숨어 있던 전봇대가 당시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고, 그 앞에 선 청년이 바라보는 곳이 또 다른 범인이 숨어 있던 골목길이다. 
민원봉사실은 용산경찰서 정문 왼쪽 길에 위치한다.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옮겨지기도 했던 소격동 수도육군병원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국군기무사령부(보안사)로 쓰이던 옆 동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식이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고인을 중장으로 추서하고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특무대는 전국의 특무부대장들을 모아 수사를 진행했고 그러한 가운데 506특무부대장이 전(前) 특무대원으로 현재는 육군 서울중앙지역병사구사령부 참모장으로 있는 허태영 대령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허태영은 2월 23일 특무대로 연행됐으며, 특무부대의 조사와 추적으로 도피했던 신초식과 송용고 그리고 지프차 운전사 이유회 등이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되었다)허태영은 체포되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내가 했다. 하나에서 백까지 모두 내 책임이다. 송용고와 신초식은 상관인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므로 그들을 닦달하지 말라"고 외쳤다. 허태영은 재판 내내 정치군인·친일군인을 처단한 것은 명예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재판 도중 <김창룡 저격 거사 동기>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김창룡이 만주의 악질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많은 애국지사를 고문하고,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포로를 학대한 친일 전범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지금까지 김창룡에 대해 그릇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근거가 됐다.

암살된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 
김창룡의 암살을 지시한 허태영 대령 허태영이 김창룡을 암살한 이유는 위의 주장 외에, 김창룡의 권력 남용과 군대 정치화에 대한 반발, 그리고 자신의 인사 문제 등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것이 연구가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김창룡이 해방 전 친일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창룡은 함경도 영흥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만주국 정보요원을 하다가 관동군 헌병으로 특채되었다. 이후 악랄한 방법으로 일제 항일투사를 소탕한 공로로 헌병 오장(하사급)으로 진급했다.
해방이 되자 김창룡은 '전범'으로 지목되었고, 이후 고향에 숨었지만 친척의 고발로 붙잡혔다. 그리하여 함흥에 설치됐던 소련 군정(軍政) 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나 청진 감옥으로 이송 중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목숨 건 탈출을 벌여 성공한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내려온 그는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날 육사) 3기생으로 들어가 단기 과정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김창룡은 국군 제1연대 정보소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정보통으로서 빠른 진급을 이루었다. 어디서나 정보를 쥔 자의 출세가 빠른 법이었으니, 정보를 선점한 김창룡은 당시 발호하는 좌익세력을 한발 앞서 척결했고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이로 인해 1949년 소령, 1951년 육군 특무대장, 1953년 준장, 1955년 소장으로 초고속 진급을 거듭했는데, 그가 소장을 달았을 때의 나이가 불과 35살이었다.
빠른 진급이긴 했지만 채병덕이 34살에 소장을 단 적이 있으니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 (채병덕은 6.25 때 하동전투에서 전사) 그런데 이승만의 비호는 그를 계급보다도 높은 위치에 올려놨던 바, 그보다 상관인 육군 참모총장도 그에게 쩔쩔맸다. 하지만 좌익척결이나 빠른 출세가 비난 받을 일은 아니었고 죽어 마땅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 반공을 표방하던 사회에서의 좌익척결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과거 특무대 서울본부가 있던 통의동 금융감독원연수원 일대 
1990년 죽은 유명한 통의동 백송(가운데 밑동만 남은 나무)이 특무대 건물 안에 있었다. 한때 추사 김정희 집 백송이라고 잘못 알려졌던 나무다. 
부근에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옥이던 집들이 남아 있다. 대부분 개조되어 상업공간으로 쓰인다. 그런데 그는 왜 암살을 당한 것일까? 현대사를 연구해온 전 연세대 류석춘 교수가 위와 같은 단편적 분석이 아닌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다방면적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우선 그는 사건이 일어난 1956년 1월 30일 아침이 김창룡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방부 원면(原綿) 부정'과 '군 고위층 축첩(蓄妾)'에 관한 내사 결과를 보고하기 위한 날이었음을 주목한다. 그는 이 사건이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통치의 누수와 균열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 참고로 류석춘 교수는 최근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으로 소송을 당했다가 대법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사건으로 유명세를 탔다. 다만, "위안부 관련 단체(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강제 동원당한 것처럼 거짓 증언하도록 교육했다"고 발언한 부분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이 인정되어 벌금형이 내려졌다.
류 교수는 우선 정치 타임라인에서 1956년 1월 30일이라는 시점이 갖는 의미와 맥락을 거시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승만은 부산 임시수도에서 1952년 7월 직선제 개헌에 성공하고, 8월 압도적 지지로 임기 4년의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아이젠하워 초청으로 미국에 가 소련의 팽창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워싱턴의 겁쟁이들을 비판하며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돌아왔다. (알다시피 그는 한국말보다도 영어에 능통했다)
더불어 왜색 불교를 척결하고 주택건설을 추진하는 등 민생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국민의 점수를 땄는데, 거기에 운도 따랐으니 자유당을 견제하기 위해 1955년 9월 새로 탄생한 거대 야당 민주당이 내세운 대선 후보 신익희가 선거 10일 전인 5월 5일 전라남도 유세를 위해 기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이리(현 익산) 부근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유력한 경쟁자마저 사라진 선거에서 이승만은 1956년 5월 15일 3대 대선에서 투표자 70% 지지를 얻으며 낙승했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 후보 이기붕과 민주당 후보 장면이 맞대결해 이기붕이 근소한 차로 패했다(장면 46%, 이기붕 44%). 차이는 근소했지만, 선거 결과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소속 정당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정국은 끊임없는 파행의 연속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어려움으로 자유당은 그로부터 4년 후 치러진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정·부통령 후보가 함께 승리해야 한다는 당위에 집착하게 됐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 민주당 포스터 
지금도 회자되는 명구 "못 살겠다! 갈아보자!" 공교롭게도 이승만은 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또 한 번 뜻밖의 수혜를 입었다. 유력한 경쟁자인 민주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선거를 한 달 남겨 놓은 2월 15일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무투표 당선이었다. 부통령으로 출마한 자유당의 이기붕이 이번에도 문제였다. 민주당 후보 장면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자유당은 고령의 이승만이 임기 중 유고가 생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문제에 매우 신경썼다. 만약 4년 전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기붕 당선을 위한 관권 동원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감행됐다. 4·19 가 벌어졌고 이승만은 하야해야 했다.이와 같은 거시적 맥락을 고려하면 1960년 이승만의 몰락은 1956년 5월 부통령 선거에서 비롯됐다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김창룡 암살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의 변곡점이 시작되는 시점과 불과 4개월밖에 차이가 없었다. 김창룡의 보고로 만약 이승만의 정치가 민심을 얻는 방향으로 바뀌어 1956년 선거에서 이기붕이 이겼다면, 1960년 이승만의 하야를 부른 부정선거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무부대장 김창룡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류 교수는 김창룡 암살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보다 미시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도 했는데, 앞서 말한 특무대장 김창룡이 1956년 1월 30일 아침 대통령에게 보고할 두 개의 극비 보고서이다. 하나는 장병들에게 입힐 군복을 만드는 원면을 사들이는 국방부의 예산 집행을 둘러싼 비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의 장성들이 첩을 두고 두 집 살림하는 비리에 관한 내사 보고서였다. 두 문제 모두 6·25 이후 비대해진 군, 특히 군의 최상층부 뇌관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남침 전쟁을 막아낸 군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실세 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병력과 무기의 양과 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음은 물론 미국의 원조와 지원이 집중되면서 군은 당시 사회의 가장 선진적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부작용 또한 함께 응축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부산에서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면서 금정산 공비 출몰을 이유로 1952년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당시 참모총장 이종찬에게 병력동원을 명령했었다.
그러나 이종찬은 전시 작전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승만의 지시를 거부했다. 당황한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군복을 벗고 당시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던 원용덕을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했다. 국방장관 이기붕이 신태영으로 교체된 직후의 일이다. 원용덕은 헌병대를 동원해 국회의원 출근 버스를 통째로 연행하는 등 이승만을 도와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이 개헌을 강행하고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국회를 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사건이 일어났다. 개헌을 거쳐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은 군과 관련해 두 가지 인사를 취임 즉시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하나는 이종찬을 육참총장 보직에서 해임해 미국으로 연수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해·공군 헌병을 총괄하는 헌병총사령관 직제를 만들어 원용덕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원용덕은 그 보직을 맡아 반공포로 석방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이종찬의 항명을 겪으며 이승만은 군 수뇌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승만은 휴전 이후 군이 그런 사태를 일으킬 가능성 또한 더욱 커지고 있음도 깨달았다. 이에 더해 국회의 절대 다수당으로 변신한 자유당 또한 이승만의 후계 구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후의 새로운 정치 지형에서 이승만은 자신을 돕는 측근 집단 간에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을 유지·관리하는 고전적 분할통치 전략을 적극 구사했다. 군에서는 이승만 스스로 자신의 '어금니들'이라 부른 4성 장군 셋(정일권·백선엽·이형근)이 그 대상이었다.

정일권(가운데 왼쪽)과 김창룡 이들은 각자 파벌을 형성해 서로 경쟁적으로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시에 이승만은 군의 통상적 활동과는 별도의 계선에 특무부대 및 헌병부대를 각각 설치해 필요한 경우 이들이 군은 물론 검경과 합동으로 민간에 대한 정보와 사찰까지도 시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공업무는 특무대를 책임진 김창룡 그리고 군 비리는 헌병대를 책임진 원용덕에게 각각 맡긴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 둘은 각각 이승만의 왼팔과 오른팔로 대통령의 관심에 따라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김창룡이 군의 재편을 가져올 수 있는 폭탄과 같은 보고서를 둘이나 들고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군 내부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그 결과가 민심에 영향을 미쳐 4개월 후의 부통령 선거 결과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반대편에서는 뭔가 조치가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터, 암살이라는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찾게 된 것이었다.

암살 현장 부근의 손기정 한옥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 1950년대 후반 대목수들에게 의뢰해 지은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도쿄 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자인 이창훈 선수를 비롯한 후학을 양성했다. 현재 도시계획으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 
손기정이 집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당시의 동네 분위기를 알 수 있어 실었다. (손기정기념재단 사진) 
암살 현장과 120m 떨어진 이곳 언덕 위에 김창룡의 집이 있었다. 김칭룡은 고급 적산가옥을 수리해 청기와를 얹었다. 김창룡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감과 당당함이 옅봬는 김창룡의 사진 
바로 옆집은 장도영이 살던 곳이다. 장도영은 5·16 쿠데타 당시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나 나중에 숙청됐다. 
장도영과 박정희 / 동상이몽의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섰다. 장도영은 당시 5.16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정변 후 곧 박정희에게 포섭되었고, 혁명군의 최고사령관 격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혁명 공약'을 발표하게 된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틀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의장과 부의장에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소장이 앉는다. 이 사진은 그 직후의 것이다. 
혁명을 선포하는 장도영 혁명위원회 의장 / 5월 16일 9시 시청 앞에서 사진이다. 박정희 소장은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 우두머리인 장도영을 부추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계엄사령관으로 추대하였지만, 단지 그의 이름값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단순한 장도영은 이를 모르고 우쭐해져 꼬임에 넘어갔고.... 
체포된 장도영 / 결국 예정된 수순에 의해 '팽'당하고 만다. 그는 1961년 7월9일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면제로 풀려났고, 이후 나머지 생을 미국에서 보내다 2012년 별세했다. 
우연찮게도 김창룡의 집 바로 앞에는 김계원이 살던 곳이 있다. / 물론 이 건물이 지어지기 전의 일이다. 김계원은 1969년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10.26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현장의 그때 그 사람들 / 왼쪽 위가 김계원이다. 
법정의 김계원 / 김계원은 신군부에 의해 10.26 당시 김재규와 공모한 혐의(내란목적살인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사면·복권되었고, 2016년 12월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왔다. 오른쪽 전봇대와 골목이 범인들이 숨어 있던 곳이다. 따로 표석을 세우지 않았더라도 대한민국 곳곳은 역사의 현장이 아닌 곳이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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