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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굶어죽은 천재 천체물리학자 김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29. 20:50

     

    종로 종묘 앞 도로를 걸어가다 보면 앙부일구(仰釜日晷) 대(臺)를 볼 수 있다. 종묘 앞 앙부일구 대는 세종 16년(1434년) 백성들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종로 혜정교와 함께 종묘 앞에 최초로 설치했던 공중 해시계의 설치 흔적을 보존한 곳이다. 조선시대의 해시계를 이르는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하늘을 우러러보는(仰) 가마솥(釜)의 해 그림자(日晷)'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마비 뒤로 앙부일구 대가 보인다.
    앙부일구 대 / 이 위에 해시계가 놓였다. 과거 종로에 전차 철로를 부설할 당시 땅에 묻혔다가 1930년대에 발굴되었으며, 이후 탑골공원에 놓였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즉, 문자 그대로 솥에 비치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끔 만든 시계이다. 제작 시기는 세종조로, 세종대왕은 이천과 장영실로 하여금 해시계를 만들게 한 후 궐내의 보루각(報漏閣)과 흠경각(欽敬閣) 등에 두었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의 왕래가 많은 궐 밖의 혜정교(惠政橋, 현 종로 광화문우체국 부근에 있던 다리 )와 종묘 앞에도 설치하여 백성들도 시간을 인지해 활용하게 하였으니 <세종실록>에는 세종대왕의 그와 같은 애민정신과 실용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모든 일에 있어 시간을 맞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가리키는 방향)과 오방(午方,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를 가리키는 방향)이 서로 마주 보았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 12지신)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를 만들아 혜정교와 종묘 앞 두 곳에 설치되었던 것이니, 생활의 편리는 물론 농사에도 보탬이 되도록 시계의 수영면(受影面, 해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는 시각선과 함께 절기선을 두었다. 아울러 시계의 시각을 글자로 표시하지 않고 12지신상 동물그림을 새겨 넣었다고 돼 있는 바,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설치된 날은 세종 16년(1434년) 10월 2일이나 당시의 앙부일구는 전해지지 않는다. 

     

     

    창경궁 앙부일구 / 바깥지름 35.2cm, 안지름 24.3cm, 높이 14cm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궁박물관 소장 앙부일구(보물 845호)의 모사품이다.
    경복궁 흠경각 / 조선시대 앙부일구를 비롯한 각종 과학기구가 설치됐던 곳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상과 앙부일구

     

    세종 때 설치된 이와 같은 공공 해시계는 이후 100년간 백성들에게 생활의 편리를 제공하였으나 설치된 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인 1533년 10월에 어떤 놈이 뜯어 훔쳐가 버렸다. 연산군·중종 때의  혼란을 거치며 사회 기강이 무너진 틈을 타 벌어진 일이었다. 앙부일구는 필시 녹여 다른 재료로 쓰였을 것일 터, 중종실록 28년(1533년) 10월 18일 기사는 이에 대해 탄식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요즘 재변이 잇따랐는데 혜성과 성운(星隕)은 예전에도 드물던 것입니다..... 또 도둑이 1백여 년이나 전해 내려온 일영대(앙부일구)를 뜯어 훔쳐갔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국법이 있다면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강을 힘써 세우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당시 기록에는 빈번한 혜성과 성운에 대한 관상감의 대처 또한 나타나 있지 않으니, 세종조 때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던 천문역법은 증발해 버리고, 한양의 북극출지(위도)를 38도 4분 1초라고 규정하는 등 코페르니쿠스보다도 100년 앞선 천문 업적을 쌓았던 이순지(李純之, 1406~1465)와 같은 학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 <세조실록>에는 "(세종이) 이순지에게 명해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 세종 때 제작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기구), 규표(圭表, 방위·절기 등을 측정하는 천문 관측기구), 대평(大平, 큰 저울), 앙부일구와 보루각·흠경각은 모두 이순지가 임금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라고 돼 있는 바, 해시계 제작을 감독한 이천과 장영실 위에 천재 천문학자 이순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칠정산> /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와 김담이 함께 편찬한 역법서(曆法書)로, 태양과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7개 천체의 움직임, 즉 '칠정'과 함께 1년을 365일 2,425분으로 규정한 책력을 실었다.
    경기도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번지의 이순지 묘

     

    이리하여, 지구의 둘레는 9만 리이며 하루 12시간 동안 한 번 돈다고 말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 같은 천재 천문학자가 나타나기까지 다시 300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다행히도 정조 때 김영(金泳, 1749~1817)이라는 인천 출신의 천재 수학자가 등장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스승도 없이 에우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독학하였는데, 그 수준이 관상감 산학자(수학자) 서호수(徐浩修)를 능가했다. 

     

     

    중국에서 번역된 에우클리드의 〈기하원본〉
    계동 현대사옥 내의 관상감 흔적

     

    당시 관상감 제거(提擧)였던 서호수는 김영의 명성을 듣고 만나 대화를 나눠본 뒤 그의 실력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정조 임금에게 추천해 관상감에 특채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선은 빈한한 가정의 고아 출신이라는 신분이 걸렸고 용모도 보잘것없었으며 게다가 박눌한(말 더듬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이 기회를 주었던 바,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일대인 양주 배봉산 기슭에서 수원 현륭원으로 이장하려 하는 대사(大事)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 중한 날의 길일(吉日)을 선택해야 하는데, 날짜 선정의 기준이 되는 중성(中星)이 관측을 소홀히 한 지난 50년간 1˚ 가까이 별자리가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해시계와 물시계도 차이가 나 도무지 기준점을 잡을 수 없었다. 

     

    * 중성(中星)은 특정 별자리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24절기에 따라 해 질 녘이나 새벽에 정남쪽 하늘 한가운데(자오선)에 떠오르는 별자리를 뜻하는 천문학 및 점성술 용어이다. 옛 선조들은 이 별자리들의 위치를 기준으로 삼아 계절의 변화를 파악하고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이에 관상감사 김익은 정조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권했다.

     

    근본적으로 중성의 위치를 추산하여 그 궤도와 도수를 정해야 되는데, 만약 관측기구가 없으면 측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먼저 지평의(地坪儀)와 상한의(象限儀) 및 새로운 해시계를 만들어 제대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상감의 관원 가운데는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역상(曆象)에 제법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을 관상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참여토록 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김영은 관상감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영은 우선 기준점이 되는 해시계부터 새로 만들었는데, 기존에 전해 내려오던 솥모양의 앙부일구가 아닌 수영면(受影面, 해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 평면인 지평일구(地平日晷)를 만들었다. 지평일구의 과학성은 여러 산술이 증명하나 여기서는 싣지 않겠고, 다만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제 해시계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인 신법지평일구는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가져온 여러 서양 물건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이 소현세자에게 직접 선물한 것이다. (흰 대리석 재질로 가로 120.3cm, 세로 57.5cm, 두께 16.5cm이며, 무게는 310kg이다. 중국의 시헌력법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평평한 수영면에 시각선과 절기선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신법지평일구 (보물 839호)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순치(順治)신법지평일구
    숭정 15년(1642) 제작된 신법지평일구의 수영면
    1789년 김영이 제작한 지평일구 (보물 840호/국립고궁박물관)

     

    김영이 자신이 만든 지평일구를 바탕으로 정확한 길일을 산출해내자 감탄한 정조가 그를 관상감에 특채했다. 이에 관상감 관원들의 반대가 극심하였으니, 제자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잡과인 천문학과)도 거치지 않은 근본 없는 자를 역관(曆官)으로 채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실력을 중시하는 정조는 개의치 않고 김영을 역관으로 특채하였다. 이후 김영은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역상산수'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신법중성기>, <신법누주통의> 등의 천문역서를 편찬하였고 신법지평일구, 적도경위 등의 서구식 천문관측기구를 제작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고 뒷받침 해주던 서호수도 죽자 김영의 처지는 급전직하하였으니 관상감에서 쫓겨나 자신의 재능과는 아무 상관없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을 맡아보는 관청인 사재감으로 좌천됐다. 이후 그는 1807년과 1811년 혜성이 나타났을 때 잠시 복직되었다. 조정에서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고 관상감에 명했으나 관원 중에서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바, 김영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김영은 관상감 관원들의 질시를 받았는데, 나아가 어떤 놈은 여러 사람이 보는 면전에서 그를 욕했고 또 어떤 놈은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서유본의 글) 그는 결국 그 일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그만두었고 마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삶을 이어가다가 1815년 을해(乙亥)대기근이 들었을 때 서울의 한 낡은 집에서 굶어 죽었다. 하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나 사망 소식을 들은 관상감 생도가 김영의 집을 찾아가 그가 작성한 원고를 상자채 통째로 들고 가버렸던 바, 그의 필생의 유고는 사라지고 <국조역상고>와 <칠정보법>의 끝머리에 그의 이론이 잠깐 등장할 뿐이다.  

     

     

    <성변측후단자> / 1759년(조선 영조 35) 관상감이 25일 동안 핼리혜성을 관측한 기록으로 왕실의 공식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국가적으로 이렇게 성변(星變, 별의 변화)을 기록한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없다. /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핼리혜성의 모습을 묘사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안내문

     

    ※ 조선 최대 민란인 홍경래 난의 격문에도 쓰여 있는 1811년의 대혜성은 세계 여러 나라의 기록에 재앙과 공포의 대상으로 소상히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은 홍경래 격문의 내용처럼 어느 날 서천(西天)에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돼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초고속으로 돌진해온 것으로 짐작되며 이로 인해 분류상 태양계 밖에서 날아온 '태양계 외 행성'으로 분류된다.(태양계 외 행성은 태양계 내 행성에 비해 지구권으로의 진입 속도가 현저히 빠르다고 알려졌는데, 얘네들은 거의가 한번 가면 다시는 안 온다. 아무튼 '1811년의 대혜성'은 홍경래만큼 화끈한 녀석이다)

     

    ~ 이 혜성은 지금까지 재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200년 이상의 주기를 가진 '장주기 혜성'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혹자는 그 주기가 3100년이라 말한다. 4910년에 되돌아올는지 두고 볼 일이다.(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통칭 '1811년의 대혜성(일명 플라우게르게스 혜성)'이라 불리는 이 놈은 76년 주기의 '핼리 혜성', '1843년 대혜성'과 함께 역사상의 '3대 혜성'으로 알려져 있다. 육안으로 관찰된 이 대혜성의 코마(coma: 혜성의 본체인 핵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는 최대 160만 km로 태양의 코마보다 컸으며 최장 관찰기록은 9개월이다. 

     

    ~ 또 이 혜성은 일명 '대혜성 와인'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1811년 프랑스 와인 명산지인 보르도 지방에서 생산된 샤또 디켐(chateau d'yquem)이란 와인이 $117,000(약 1억 3천만 원)의 사상 최고가로 거래된 것이다. 이는 혜성이 지나간 해의 와인 맛이 특출하다는 속설 때문으로 1811년의 혜성이 역대 최고의 혜성인 까닭에 값도 가장 비싸게 매겨지게 된 것이었다. 그해 보르도 지방이 이례적으로 고온건조했다고도 한다. 그 와인을 마신 행복한 사내가 아래에 있다.(병이 까매서 그렇지 화이트 와인이란다)

     

     

    2011년 런던 경매에서 7만 5천 파운드에 낙찰된 샤토디켐 1811년산 빈티지
    런던 경매에서 이 와인을 구입한 크리스티앙 바네케 / 와인 감정가이자 개인 수집가라고 한다.

     

    ~ 김영이 자신이 관찰한 1807년과 1811년의 대혜성을 기록에 담지 않았을 리 없다. 까닭에 관상감의 공식 천문 관측 기록인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1807년 10월 4일(음력 9월 4일)부터 섭제성(攝提星, 목동자리) 남쪽이자 북극성으로부터 84도 떨어진 위치에서 관측된 길이 약 1척(尺)의 흰빛 혜성 기록과, 1811년 10월 20일 북두칠성 방향인 인지(寅地)에 나타나 꼬리가 서남쪽을 가리키며 날아간 길이 약 4척의 밝고 흰 혜성 기록은 필시 김영의 관측기록이 아닐까 한다. 

     

     

    1811년 10월 15일 영국 윈체스터에서 관측된 플라우게르게스 혜성
    1811년 3월 프랑스의 아마추어 천문학자 오노레 플라우게르게스(Honoré Flaugergues)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이 붙었다.
    위 그림의 배경이 된 윈체스터 성
    '로렐라이의 도시(Die Loreleystadt)' 독일 세인트 고아르샤우젠에서 관측된 플라우게르게스 혜성
    위 그림의 배경이 된 세인트 고아르샤우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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