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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을 지킨 벽암각성대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25. 23:04

     

    어젯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보다 문득 병자호란 때의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대사가 생각났다. 조선 헌종 때의 문신 홍경모가 간행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라는 광주부 읍지를 보면 인조 2년(1624)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한산성 축성에는 전국 8도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때 벽암각성 스님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아 성 쌓는 일을 전담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그들이 자발적으로 왔을 리는 만무하고 강제적으로 동원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벽암각성의 통솔 아래 상당히 열심히 일을 했는데, 아마도 그에 대한 보상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보상이 주어졌으니 현존하는 조선조 최대 당우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그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지어진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나 벽암각성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휘하에서 승병을 이끌고 수군으로 종군하였으며, 이때 명나라 제독 진린으로부터 용맹성을 칭찬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화엄사 각황전 / 1699년(숙종 2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703년 완성하였다.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각황전 이름도 숙종이 하사했고 현판글씨도 그의 것이다. / 각황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으며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 남아있는 석등 중 가장 크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파괴된 보은 법주사, 순천 송광사, 합천 해인사, 안변 석왕사, 속초 신흥사 등도 그에 대한 보답으로 중창불사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하동 쌍계사는 벽암각성이 65세 때 직접 불사를 지휘해 완성한 절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 해 8월에는 전라도관찰사 원두표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 사고(史庫)를 중수하고 지켰다. 벽암은 85세 화엄사에서 입적했으며 완주 송광사, 해인사, 화엄사, 법주사에 승탑이 있다. 

     

     

    쌍계사 대웅전 / 가운데 석비는 최치원의 4산비명 중의 하나인 진감대사탑비이다.

     

    남한산성의 축성에 전국 승려들이 동원된 만큼 산성 내에는 사찰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장경사, 개원사, 망월사, 국청사 등 4개의 사찰만이 남았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축성 당시에는 개원사를 본영으로 삼아 경기지역 승려들은 망월사에, 충청도 승려는 장경사, 강원도 승려는 국청사, 전라도 승려는 천주사, 경상도 승려는 한흥사, 황해도 승려는 옥정사에 각각 머물며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성을 쌓았을 뿐 아니라 수성(守城)의 승병 역할까지 한 것인데, 전부 약 500명으로 각 절에 50명씩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사찰은 거의가 사라지고 국청사를 비롯한 남아 있는 절도 실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작년 겨울, 벽암이 머물렀다고 하는 개원사와 국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선 적이 있어 그중의 국청사의 흔적을 올려본다. 국청사는 당시 승병의 무기고(武器庫)도 겸하였다고 하며 구한말 의병의 은거지였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파괴는 그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남한산성 내 국청사지
    국청사지 표석
    우물지
    국청사 우물물의 효험에 관한 전설을 적은 돌
    국청사지 부근의 성벽
    성벽 부근의 국청사지 안내문 / 국청사의 승병은 서문 일대의 수비를 담당했다고 쓰여 있다.
    성벽에서 바라본 송파
    눈 덮힌 전승문 (남한산성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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