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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사상의 한반도 유입 과정 & 좌빨 결성 장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23. 21:57
해방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는 좌파세력이 발호하며 우파세력을 압도했다. 나는 좌·우파가 반반 정도였다고 늘 말하지만, 60:40으로 좌파 우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더 나아가 80:20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좌파가 백중세거나 많았던 듯하다. 아무튼 그래서 신기하다. 그 대한민국 사람들은 불과 36년 전까지만 해도 왕정(王政) 체제 아래 있던 한복 입은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백성들이 36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해방 후에는 양장(洋裝)의 시티즌스가 되었던 것이니 일제가 한반도에 가져온 사회변혁은 어찌됐든 지대한 것이었다. 아울러 해방 후 왕정 복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바, 600년간의 조선 왕정이 얼마나 패악적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이씨왕조의 패악질은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전국에서 백성들의 반대 소요가 일절 없이 조용했던 것으로도 증명되니 그 침잠함은 일본정부도 놀랄 정도였다.
당시 조선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을 1907년 이위종 헤이그 특사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황제의 특사 일원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갔던 이위종은 회담에 참석해 일본의 불법적인 대한제국 침탈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담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위종은 회담장이던 비넨호프(국회) 앞에서 각국 기자들에게 일본을 지탄하는 일장 연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었던지라 일본인들을 기대를 가지고 맞이했다 (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우리 백성들은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백성에게 정의를 구현해 주리라고 믿었으나 일본은 그런 신뢰를 배반하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조선을 불법적으로 병탄하려 하고 있다.

1907년 7월 5일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 사진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순이다. 
1907년 8월 22일 자 미국 '인디펜던트' 지에 실린 호소문 A Plea for Korea /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던 백성들이 기대를 가지고 일본울 맞이했다"는 이위종의 발언 내용이 실려 있다. (색칠한 부분)
공산주의는 그렇듯 암울한 시기에 한반도로 들어왔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씨왕정, 일제의 식민통치를 대신할 대안으로 미국이나 서구제국이 채택한 민주주의보다 러시아의 레닌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10월 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세계 최초로 등장하게 된 공산주의를 선호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토지와 빵을 균등히 분배하는 공산주의의 이론만큼은 강력한 소구력으로써 와닿았던 까닭이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사회주의) 사상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에 의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는데, 주요 유입 경로는 다음과 같다.
1. 러시아 연해주 및 시베리아 루트 (가장 빠른 유입)
배경: 1910년대 후반,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는 많은 한인 이주민과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볼셰비키 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경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사회주의자들(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이 레닌 정부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한인사회당 등을 조직하여 국내로 유입시켰는데, 주로 만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2. 중국 상하이 및 베이징 루트 (임시정부 계열)
배경: 3·1 운동(1919)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주의 노선에 한계를 느끼고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경로: 상하이의 '고려공산당' 등과 연계하여 국내에 사상이 유입되었고, 중국 내 유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국내로 들여왔다.
3. 일본 유학 루트 (사회주의 사상 수용)
배경: 1920년대 들어 일본 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으로 유학 간 조선인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경로: 일본 유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귀국하여 국내 청년·노동 운동 단체(예: 북성회, 일월회 등)를 조직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확산시켰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하고자 상해로 갔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니 당시의 신사조(新思潮)인 사회주의에 경도돼 고려공산당청년회 설립에 나섰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때 여성공산주의자였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박헌영 부부와 딸 박 비비안나 박헌영은 공산주의를 국내에 입식시키기 위해 1922년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며 투옥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돼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김재봉 등 십 여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이로 인하여 1925년 11월 다시 체포돼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얻은 병으로 1927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중국음식점 아서원 / <매일신보> 1927년 9월 13일자의 보도사진으로, 왼쪽 아래에 보이는 도안은 조선공산당 마크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Corea로 표기된 까닭에 중국공산당을 뜻하는 CCP(Chinese Communist Party)와 영문 표기가 같다. 민족문제연구소 사진 
전해지는 아서원 사진은 이 2장 뿐이다. / 박헌영은 화요파의 김재봉, 박헌영, 조봉암, 북풍회의 김약수 등과 함께 이곳 아서원에서 비밀 창당대회를 열었다. 
1960년 찍은 반도호텔 /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아서원은 1936년 반도호텔이 착공되며 사라졌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운동 조직)에 공식 정당으로 승인받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수많은 당원이 체포되며 해체되었다. 
반도호텔 자리에는 지금의 롯데호텔이 들어섰던 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곳은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라고 해야 할 듯하다.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은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개월가량 갇혀 고문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다시 한 달 간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나오자 두 사람은 1928년 8월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스톡으로의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그때 주세죽은 만삭의 몸이었다) 연해주의 박헌영은 1929년 2월 망명 혁명가로 인정받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도 들어가게 된다.
주세죽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추운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딸(박 비비안나)을 낳았으며 이듬해인 1929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 입학했다. 주세죽은 졸업 후 모스크바 외국인노동자출판부 교정원으로 근무하다가 스탈린 공포정치가 만들어낸 숙청 광풍에 휘말려 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수용소 농장으로 갔다. 주세죽은 크즐오르다에서 1953년 사망했으며 200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수여됐다. 훈장은 딸 박 비비안나가 대신 받았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모스크바에 설립됐던 공산주의 혁명가 양성을 위한 특수대학으로 등소평, 호치민, 김단야 등이 수학했다. 
주세죽과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졸업 후 1932년 다시 상해로 왔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3년 국내로 압송,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한 그는 조선공산당의 한 조직인 '경성 콤뮨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1940년 초에 불어닥친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청주로 피신했고, 다시 전라남도 광주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에 김성삼이란 이름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다 8·15해방을 맞는다. 이후 경성 콤뮨그룹을 재건하고 남한 좌익세력의 우두머리 빨갱이가 되었다.

국제레닌대학교 /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를 비롯한 유명 공산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1932년 12월 상하이에서 체포돼 압송되는 박헌영 / 왼쪽의 잘 생긴 남자가 아닌 오른쪽의 몬생긴 넘. 서울 종로2가 YMCA 옆에 있는 4층짜리 장안빌딩은 1945년 8월 15일 밤 '장안파 공산당'이 결성된 곳이다. 장안파 공산당은 해방 직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결성된 정당으로서 장안빌딩의 이름을 따 정당 이름을 붙였다. 장안파 공산당을 결성한 인물들은 8·15 직후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 거주하고 있어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곧바로 공산당을 조직할 수 있었으며, 책임비서에 서울파(상하이파)의 이영, 제2비서에 화요회(이르쿠츠크파)의 이승엽(후에 ML계의 최익한)이 선임되었다.
공산당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서울파(상하이파), 화요회(이르쿠츠크파), 북풍회(일본유학생 출신) 간의 알력이 심했으나 어쨌든 이들이 주축이 돼 발빠르게 '장안파 공산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1940년대 초반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중도 하차하거나 전향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로서, 줄기차게 공산주의 활동을 해 온 박헌영 계열의 경성 코뮨그룹(이하 콤그룹)에 비해 약점이 있었다.

종로2가 장안빌딩 / 이곳에서 '해방 후 최초의 정당'인 장안파 공산당이 결성됐다. 
장안빌딩은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로 1923년 1월 12일 밤 의열단 김상옥 의사가 폭탄를 투척했다. / 오른쪽 건물은 YMCA이다. 
장안빌딩 앞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서 있다. 박헌영은 8월 19일 서울에 올라와 콤그룹의 김삼룡과 힘을 합쳤다. 박헌영은 다음 날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후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되는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이른바 8월테제)를 발표하였다. 재건위원회가 발족되자 장안파공산당은 박헌영·김삼룡의 이름값에 눌려는지 8월 24일 당을 해체하고,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재건위원회와의 통합문제를 논의하였다. 열성자대회는 장안파 공산당이 주도하여 열었지만, 회의 내용의 결과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모든 공산당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는 드디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던 바, 주요 부서와 간부는 총비서에 박헌영(화요회계, 콤그룹), 정치국 임원에 박헌영·김일성·이주하·무정(독립동맹)·강진(ML계)·최창익(ML계, 독립동맹)·이승엽(화요회계)·권오설(화요회계), 조직국 임원에 박헌영·이현상(콤그룹계)·김삼룡(콤그룹계)·김형선(화요회계), 서기국 임원에 이주하·허성택(콤그룹계)·김태준(독립동맹, 콤그룹계)·이구훈(콤그룹계)·이순금(콤그룹계)·강문석(콤그룹계)을 임명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재건된 공산당은 화요회 계열과 콤그룹 계열 일색이었으니, 박헌영 쪽이 아닌 사람들은 당시 귀국하지 않았거나 38선 이남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김일성·무정·최창익밖에 없었다. 이러한 당의 구성에 대하여 내부 반발이 없을 수 없었으니 그중에서도 장안파의 반발이 가장 컸다. 하지만 박헌영 체제를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바, 이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유일한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박헌영은 다시 신민당과 안민당의 좌파 세력을 규합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라는 보다 큰 조직을 만드는 과정에서 1946년 5월 발생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해방 후 최대 사회혼란사건인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 번복된 판결')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했다. 박헌영은 1946년 8월 1차 월북 후에도 수시로 남북을 비밀리에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김일성과 박헌영 / 1946년 여름 '평양 국제여성총회' 당시 찍은 사진이다. 박헌영은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이 출범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으며, 김일성과 함께 소련을 설득해 남침전쟁을 일으켰으나 종전 후인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미제(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이라는 죄로써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했다. 박헌영은 야산에서 총살당해 그 자리에 묻혔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지만, 당시에는 셰퍼드에 물어뜯겨 죽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진위를 떠나 이런 얘기들은 그가 북한에서 철저히 버려졌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즈음하여 남한에서는 반공 체제가 강화되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완전 와해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을 비롯한 남한 좌빨들의 그간의 피땀 어린 노력이 무색하게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기업의 이윤을 정부가 빼앗아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진짜 공산주의가 너무 쉽게 태동하고 있는 바, 어리둥절하기고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택해 안정적 성장을 거듭해온 대한민국 호(號)가 얼치기 좌파 항해사들의 운행으로 좌초하지는 않을까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브리핑하는 김용범 정책실장 / 그는 기업 초과이윤을 국민에게 환원하는 '국민배당금' 구상을 언급하며 포플리즘 정책을 이어가려 했으나 반대여론이 급등하자 급히 꼬리를 내렸다. (연합뉴스 DB)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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