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의 관료 황희(1363~1452) 정승을 말할 때 언필칭 청백리나 빈궁한 생활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사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조선시대 문무 관료들에게 기본적으로 과전(科田)이 지급됐기 때문이니, 그중 당상관(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절충장군 이상)은 100결의 토지를 받았다.
100결을 현대의 평방미터(㎡)로 환산하면 토지의 등급(비옥도)에 따라 약 100만 ㎡에서 400만 ㎡ 사이의 넓이를 나타낸다. 아울러 수조권(조세를 거둘 권리)은 당연히 뒤따랐던 바, 빈궁하려야 할 수가 없는 노릇인데, 거기에 1품인 정승까지 오르면 과전이 150결까지 뛰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고위관료는 부자일 수밖에 없었다.
방촌 황희(厖村 黃喜)의 초상화 / 생전(62세 때)에 그려진 현존 유일본으로 비단에 채색화이다. (50.1cm x 47cm)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의 황희 정승 묘초상화를 모신 영정각에서 본 황희 정승 묘
그럼에도 앞서 말한 오리 이원익 대감이나 황희 정승과 같은 이의 청빈(淸貧)이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수익을 빈자(貧者)를 위해 나누었다는 얘기가 되니, 세종 임금이 미복(微服, 일반인 차림)으로 영의정 황희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청빈한 삶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일국의 정승이 집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밥상에 누런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밖에 없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는 일화이다.
이에 황희가 자신의 꼬락서니를 민망해하자 세종이 재치를 발휘해 "경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 좋겠소. 자리에 누워 소처럼 비비기만 하면 될 터이니"라는 농을 건넸다는 것인데, 이 놀라운 이야기가 정말일까 해서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을 찾아보았다. 세종이 정승 집에 잠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실록에 나오지 않을 리 없을 터인즉.
하지만 <세종실록>에 그와 같은 얘기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았고, 오히려 황희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등장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황희의 별명은 우리가 아는 '청백리 재상'과는 거리가 먼 '황금 대사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황금 검찰총장'인 것인데, 그 연유도 대사헌의 독직(瀆職)과 관련 있었다. 현대 검찰총장의 비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지금의 풍속도와 유사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익정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둘 다 승려인 설우(雪牛)로부터 금을 받았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황금 대사헌'이라 불렀다."
사건의 배경은 조계종 소속이었던 승려 설우가 국가에 바쳐야 할 금그릇, 은그릇을 녹여 금괴와 은괴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를 횡령한 사건으로, 설우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신임 대사헌 황희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것이고, 이에 황희는 '황금 대사헌'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외도 황희는 뇌물 수수, 매관매직, 가족 비리 등의 의혹이 <세종실록>에 출현하니 우리가 아는 청백리가 아닌 비리투성이의 공직자로 이해해야 옳을 듯하다.
1591년 안개 속의 사헌부를 그린 <총마계회도> / 호림박물관광화문 광장 사헌부 문 터 흔적
나아가 그의 비리 중에는 (청탁을 위해) 찾아온 역적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대형 스캔들도 출현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적은 박포(朴苞)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2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2등 공신에 책봉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던 바, 이후 이방원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이다. (박포가 주동이 되어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회안대군 이방간 묘 / 이성계의 아들 중 유일하게 조상의 고향에 묻혔다.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며 주동자인 박포는 사형에 처해졌고, 이방간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홀로된 박포의 아내는 사내 노비와 사통했다. 그러자 이를 본 행수노비(우두머리 노비)가 박포의 아내를 협박했다가 살해당했는데, 살인범인 박포의 아내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황희를 찾아왔다가 간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세종실록>에 실어야 되는지 편수관인 정인지도 꽤 고민을 한 듯싶다. 즉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세종실록>을 편찬하려고 사관 이호문 등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들춰 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는 사초에 적힌 위의 사실에 깜짝 놀라 황보인 등 편수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정인지는 황희의 오랜 지기였던 우리도 모르는 내용을 사관인 이호문이 어찌 알고 사초에 기록했겠는가, 이는 사감에 의한 중상모략임에 틀림없으니 삭제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인 · 최항 · 정창손 등은 다른 의견을 내었던 바, "사초를 삭제하는 선례를 만들면 말세의 폐단이 되니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고칠 수 없도록 하자"며 투표를 제의했고 결국 황희의 간통 사실은 <세종실록> 1428년 6월25일자에 실리게 되었다.
황희는 직무에 관한 비리도 여러 건으로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았다"고 기록돼 있다. '형옥을 팔았다'는 것은 형사사건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황희는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재산을 불렸던 것으로 보이니 그가 세종 10년인 1428년 "너무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다"는 의혹을 받은 것도 이와 같은 불투명한 재산 형성과정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1428년은 황희가 공직에 44년째 몸을 담은 해였다. 따라서 그간 받은 녹봉만도 상당했을 터, 이와 같은 장기 근무자가 많은 노비를 보유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설수에 올랐던 것은 노비의 수가 평균을 한참 상회했다는 뜻이고, 그들을 유지할 다른 수입이 있었던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기록에는 황희가 보유한 노비 숫자가 나오지 않아 몇이나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당시에는 보통 1천 명이나 2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하면 '노비를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몇 십 명 정도는 아니었던 듯싶다.
그런데 황희는 왜 그렇게 많은 노비를 거느렸을까? 들려오는 얘기로는 황희가 노비의 어린 자식들을 제 친손주처럼 여겨 사고를 쳐도 나무라지 않았다고 하는 바, 어쩌면 빈민의 생계를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노비를 두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조선시대 노비는 매매의 대상이었으므로 노비를 많이 보유하면 일단 현금 유동성이 좋아진다. 그리고 그 노비들이 비상시에는 모두 사병(私兵)으로 전환되는 것이니 1, 2차 왕자의 난은 모두 당시의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들의 양과 질에 의해 결판이 났다. 즉 노비의 보유 정도가 곧 그 사람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황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결단이 태종 비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탄핵해 유배 보낸 일이다. 그들 형제는 왕자의 난 때 견마지로로 매형을 도왔던 바, 태종 등극 후 막강한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그 권력이 왕실과 다른 신료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터, 척결이 요구되었는데, 태종마저 곤혹스러워 하는 그 사나운 고양이들의 목에 방울 건 자가 바로 황희였다. 세자(양녕대군)마저 끼고 있던 민씨 형제와 대결을 벌이는 일은 실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만큼, 아마도 황희가 거느리는 노비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종은 제주도로 정배된 민무구 · 민무질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3년 후인 1410년 자결을 명했다. 나아가 태종은 1415년 나머지 형제인 민무회와 민무휼도 자결시키니 이후 세상은 황희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태종에게 외척의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탄탄한 입지를 마련해 주고, 그것을 세종 때까지 이어 국왕 운신의 폭을 광장(廣張)시킨 황희였던 바, 두 임금의 사랑이 지극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요암리 산 52-1에 있는 민무질 묘민무질 묘 문석인 / 민씨 4형제 중 유일하게 묘가 전한다.
하지만 제 힘을 너무 믿었던 것일까, 1418년 태종이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교체하려 할 때, 황희는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던 바, 태종의 미움을 받고 유배를 갔다. 처음에는 경기도 교하로 갔으나 도성과 너무 가깝다는 연유로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유명한 누각 광한루는 1419년(세종 1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를 왔을 때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각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춘향전의 무대가 된 남원 광한루
비록 유배 중이라 해도 이때 읊은 아래의 시를 보면 그는 아직 여유롭다.
청계상(淸溪上) 초당(草堂) 밖 봄은 어이 늦었고 배꽃은 흰눈 속에 향기를 피우고 버드나무 색이 아직 황금색으로 어리도다 만학운(萬壑雲) 두견새 울음 소리에 춘사(春思) 망연(茫然)하구나
5년 후 그는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올라가 정승으로 복직했으나 또 다시 독직 사건을 일으키니 1430년(세종 12)의서달(徐達) 사건이 그것이다. 서달 사건은 황희의 사위 서달이 인사를 건성으로 했다는 이유로 하급 관리 표운평을 폭행하여 숨지게 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 좌의정이던 황희는 서달을 처벌하지 않고 서달의 친부인 형조판서 서선과 짜고 범인을 서달의 종으로 바꿔치기하여 조서를 작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을 압박해 합의를 강요하고, 우의정 맹사성까지 끌어들였다.
서달 사건은 수사기록을 조작해 작성하고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조직적으로 덮으려 한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서 내용의 모순을 간파한 세종대왕이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령했고, 결국은 은폐와 조작 정황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던 바, 조작 주모자인 황희와 서선, 형조참판 신개 등이 파직되고 은폐에 가담했던 우의정 맹사성 역시 파직당하니 명재상의 이름을 크게 더립히고 말았다. 황희는 파직에 그치지 않고곤장을 맞고 두번 째로 유배되었다.
카페로 변한 북촌 맹사성 집터맹사성 집터 가는길
그럼에도 황희는 행정가로서는 매우 뛰어났으니 일을 좋아하는 세종에 의해 다시 중용돼 87세까지 봉직했고 90세에 죽었다. 세종에게 책 잡힌 게 많아 퇴직도 못하고 부림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87세 때 겨우 사직 상소가 받아들여진다) 고령의 나이가 되어서도 일을 한 것이 어쩌면 역으로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서에는 그가 나름대로 연마했다는 시력 관리법을 비롯한 건강비법이 전한다. 아무튼 기가 셌던 것은 분명하니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도 꼬리를 내린 일화 등도 전하는데, 황희 역시 6진 개척에 공이 지대한 자였다.
경원 여진글자비 / 함경북도 경원의 옛 절터에 있던 금(金)나라 비석으로 4면에 오롱초사의 창건에 관한 여진 문자가 새겨져 있다. 건립시기는 1156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6진 / 위 비석으로 볼 때 6진 지역이 여진족의 땅을 빼앗아 개척한 곳임이 분명하다.
황희에 관해 대강 훑어보기는 했으나, 그렇게 지저분한 삶을 산 자가 어떻게 청백리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억지로 찾자면 <세종실록>에 나오는 원만한 대인관계, 즉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의논하거나 자문에 응할 때에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세종대왕)에게도 중후하게 보였다"는 내용과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세종대왕이 사람을 붙여 하도 철저하게 감시한 까닭에 뇌물을 받을 수 없었다"는 야사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아들 황보신은 뇌물을 먹고 처벌 받았으니 죽기 1년 전인 89세 때 제 아들의 구명 상소를 문종 임금에게 올렸다. 생각해보니 황희는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조선 문종 때 죽었으며, 조선 태조부터 문종까지 다섯 명의 임금을 모셨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합쳐 총 24년간 정승직을 수행했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는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가장 오래 정승을 지낸 자임은 분명하다. "신의 아들이 장물죄를 범해 관직을 삭탈 당한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신의 나이 지금 89세이니 죽음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습니다. 늙은 소가 새끼를 핥아 주는 심정이고 보니 아들의 일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소되지 못할 고통이옵니다. 부자의 정은 천성인지라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고 죽음을 무릅쓰며 아룁니다." (<문종실록> 1년 2월 2일)
아들의 죄를 구원해달라는 애원하는 구순의 늙은 아버지.... 황희는 권력을 누리며 오래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황희가 이처럼 체면불구하고 애걸복걸한 것은 아들 황보신에 대한 구명의 차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장리(贓吏, 뇌물을 먹은 탐관오리)의 오명을 벗게 해주자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뇌물죄가 특히 엄격했던 바, 장리의 경우는 자손들까지 연좌돼 과거 응시가 금지되는 까닭이었다. 현대에는 연좌제가 없을 뿐더러 뇌물을 먹고도 뭉개면 그만이니 그저 돌아가신 분들만 불쌍할 뿐이다.
묘소 입구의 방촌 황희선생 신도비각비각 안 구(舊) 신도비 / 비문은 신숙주가 지었다고 전하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제각인 원모재와 사당삼단의 계체석 위의 황희 무덤은 크고 우람하며 소박하나마 좌우에 문무 석인상을 두었다,봉분 양쪽에 날개 같은 것이 달린 특이한 형태이다.무덤의 양 날개와 혼유석날개의 형태가 뚜렷한 파주문화원 사진을 추가해 올린다.정면에서 본 혼유석무덤 뒤의 산신석묘표 / 부인 청주양씨와의 합장묘이다.장명등문석인뒤에서 본 전경방촌 황희선생 사당영정각 뒤의 망료위 / 제사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망료위의 후면길 건너에 황희 정승의 셋째 아들인 영의정 남원부원군 황수신(黃守身, 1407~1467) 의 신도비가 있다.근자에 새것이 조형됐다.비긱 위에 황수신의 사당이 있다. / 장수 황씨 가문에서 2대 연속 영의정을 배출한 것을 기념해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