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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 · 병자호란의 원인 & 심집이라는 인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25. 13:00
역사에서의 가정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지만 나쁘게 전개된 역사로써 반면교사를 삼을 수는 있다. 1623년의 인조반정도 그러하다. 인조반정은 여러 가지로 이유로써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으니 무엇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불러왔다. 새로운 임금 인조와 반정세력이 기존 광해군 정부가 취한 여진과의 교린정책을 버리고 철저히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돌아선 것이 원인이었다.
정묘호란은 1627년 음력 2월, 장수 아민이 이끄는 3만여 명의 후금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기습 침략하며 시작됐다. 후금군은 압록강을 넘자마자 의주성을 하루 만에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남하, 불과 보름 만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점령했다. 놀란 조정은 서둘러 강화도로 도망간 후 후금과 협상에 나섰고, 후금도 선뜻 협상에 임했다. 원래 겁을 주기 위한 침공일뿐 정복을 위한 원정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쉽게 공파된 '해동제일관' 의주성 협상은 조선 측에서 보낸 국서에 쓰인 명나라 연호 '천계'(天啓)가 문제시된 것 외에는 그럭저럭 풀려, 향후 양국이 형제의 나라로 지낼 것,(물론 조선이 동생이다) 은과 면포 등으로 구성된 배상금을 낼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이 합의 되었고, 이후 후금군은 조선 땅에서 물러갔다. 인조는 제 아들이나 동생 대신 성종의 14남인 운천군(雲川君) 이인(李𪬦)의 증손자인 이구(李玖)를 급히 원창군(原昌君)으로 봉하고 왕의 친동생이라 속여 보냈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대청국(大淸國)으로 바꾸었다. 더불어 임금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하며 황제 즉위식에 주변의 나라들을 초청했는데, 그 위세에 눌린 조선 역시 사신을 보내 참석했다. 하지만 조선 사신은 홍타이지에게 절 하기를 거부했다. 조선은 오직 명나라만을 황제국으로 받들 뿐이므로 홍타이지, 너는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 사신이 하례를 거부하자 청나라 관원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무릎을 꿇리었다.
이 과정에서 사신들은 구타를 당하고 옷이 찢기고 갓이 부서졌지만 끝내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뜻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나덕현과 이확, 이 두 명의 조선 사신들로 인해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은 엉망이 되었다. 청나라 관원들은 저 무례한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베야 한다고 했지만 홍타이지는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선물을 안기며 국서를 들려 보냈다. 아울러 조선 사신이 다치지 않게 친위 기병들로 하여금 양국 관문인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위하게 했다.

통원보 풍경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펑청시(鳳城市) 통위안바오 일대를 <울산저널>이 담았다. 봉황성(鳳凰城)과 연산관(連山關) 사이에 위치한다. 
봉황산성 입구 / 통원보 아래에 위치하는 성으로 고구려의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봉황성 아래의 변문진 / 흔히 말하는 책문으로 조선과 중국과의 전통적 관문이다. 고려문으로도 불린다. (울산저널DB) 홍타이지의 생각은 명나라 정벌을 앞두고 있는 만큼 조선과는 척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를 정벌하고 나면 너희들도 별 수 없이 무릎을 꿇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조정은 끝내 호의적이지 않았으니, 황제를 참칭(僭稱)한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은 사신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들고일어났으며, (홍타이지의 국서를 국경 객관의 쓰레기통에 처박고 왔음에도) 이들을 청(淸)에 파견한 영의정 김류(金瑬)에 대한 탄핵 논의까지 일었다.
다행히 김류는 이조판서 김상헌의 도움으로 탄핵을 면했지만 사신들은 삭탈관직과 귀양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조선의 분위기와 자신의 국서가 통원보 객관 쓰레기통에 버려진 사실을 알게 된 홍타이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한 홍타이지는 1636년 음력 12월 8일, 압록강이 얼기 무섭게 5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조선을 향해 치달았고, 선봉장 마부태의 군대는 12월 14일 벌써 서울 홍제원에 도달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넌 7일 후에야 남침을 보고 받았는데, 그때는 벌써 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였다. 크게 놀란 조정은 임금의 두 아들과 세자빈과 원손 및 권문세족의 가족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이어 인조도 12월 13일 밤 숭례문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은 이미 불광동을 지나 홍제원까지 도달해 있었던 바,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청군에 기겁을 일행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벽제관 사진 / 조선시대 국영여관이었던 홍제원은 고양시 벽제관과 비슷한 모양새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해동지도> 속의 홍제원 / 위쪽으로 홍제천과 홍제교가 보인다. 
홍제천 
홍제원이 있던 홍제동 138번지 부근의 홍제원 터 표석 
홍제동 유진상가 앞의 홍제교 터 표석 조정이 공포에 질려 대책조차 못 세우고 있을 때, 이조판서 최명길이 "내가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벌 테니, 그사이 전하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시라"며 위기해결사를 자원했다. 최명길은 시종들에게 술과 고기를 들려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臺)가 진을 친 홍제원 부근 양철평(良鐵坪)으로 갔으나 적진이 가까워지자 시종들은 모두 뒤를 돌아 달아났던 바, 최명길이 직접 술과 고기를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무튼 이 과감한 '시간 벌기 작전' 덕분에 인조와 조정은 청군의 추격 없이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는데,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온 날, 청의 진영을 다녀온 최명길이 가져온 화의조건은 의외로 간단한 것으로 왕제와 대신을 청에 볼모로 보내면 되는 일이었다. 이에 조정은 종친인 능봉군(綾峯君) 이칭(李偁)을 왕의 친제라 속이고 형조판서 심집(沈諿)을 정승으로 속여 보냈다. 이미 1627년 정묘호란 때 종친 원창군 이구를 왕의 동생이라고 속여 보낸 적이 있었던 바, 이번에도 같은 수를 쓴 것이었다.

인조는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기에. 
인조가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볼모로 갔던 원창군은 몇 년 후 조선으로 무사 귀환했다. 이에 이칭이나 심집도 때가 되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청군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바, 대뜸 통역관 박난영(朴蘭英)에게 "이번에는 진짜인가?" 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정묘년 왕제 원창군이 가짜였음을 후금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속은 게 쪽팔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대국의 배포를 보이려 했는지 원창군을 무탈하게 돌려보냈는데,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는 기세가 역력했다. 박난영으로부터 눈을 거둔 마부대가 곧장 심집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 그대는 진짜인가?"
<인조실록>에는 심집이 아무 대답을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나만갑의 <병자록>은 다르게 적고 있으니, 겁에 질린 심집은 "나는 평생 충(忠)과 신(信)을 말했다. 비록 오랑캐라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평생 신의로 살아온 사람이라 오랑캐라 해서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곧 마부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대신이 아니며, 능봉군은 종실 사람이지 왕제가 아니다."
그러자 능봉군이 놀라 심집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오. 이 사람은 실제 정승이고, 나는 왕제임이 분명하오." 그러자 마부대가 박난영을 향해 "누구 말이 맞는가?" 다시 물었는데, 박난영은 끝까지 제 임무를 다하려 "능봉군의 말이 옳다"고 답했다. 그러자 마부대가 제 주위의 부하들에게 "이 자를 끌고 가 목을 쳐라!"고 명령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반드시 왕제가 아닌 왕자를 데려갈 것이라며 능봉군과 심집을 돌려보냈다.

<병자록(丙子錄)> / 병조참의 나만갑이 남한산성 피신 중에 쓴 일기형식의 기록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사실성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날 밤, 얼굴이 허예진 관료들이 이제 어쩔 수 없으니 동궁(왕자)을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 부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예조판서 김상헌은 "맹세컨대 오랑캐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반대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이를 때의 인용구인 '불구대천(不俱戴天)'이 여기서도 통행되었으니 이로써 청나라와의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론은 우리가 다 아는 바 대로였으니, 이후 인조는 40여 일 동안 개고생을 하다 결국은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이 꿇려졌고 조선의 두 왕자와 많은 백성들이 심양으로 붙잡혀갔다.

인조가 나가 항복한 남한산성의 서문 우익문 
석촌호수 부근의 대청황제공덕비 /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했으며 그 장소인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다. 지금은 '삼전도비'라 한다. 
뒷면 / 글은 이경석, 글씨는오준, 각자(刻字)는 신익성에게 돌아갔다가 신익성이 어깨 마비증상을 호소해 이여징으로 바뀌었다. 앞은 만주어와 몽골어, 뒤는 한문으로 새겼다. 
<남한산성도> 속의 삼전도비 / 19세기 그려진 <동국여도> 중의 하나이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마부대 앞에서 이질직고했던 심즙은 어찌 되었을까? 심집은 인조가 환궁한 얼마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의 요지는 다음 같았다.
"심집이 감히 가왕자(假王子. 가짜 왕자)와 가대신(假大臣, 가짜 대신)이라는 말을 청인에게 하여, 박난영이 대답한 진왕제(眞王弟)와 진대신(眞大臣)이라는 말과 서로 어긋나 이 때문에 격노하여 난영이 살해당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은 국가의 죄인일뿐더러 난영의 죄인입니다. 그가 청나라에 끌려감을 면하려고 나라를 팔고 화(禍)를 돋운 일은 참으로 터무니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조정이 가볍게 보여서 법령이 시행되지 않는 탓이니, (사형은 면하게 하고) 극변(極邊, 매우 외진 국경)에 정배(定配, 유배)토록 명하기를 바랍옵니다."
하지만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다가 거듭된 상소에 결국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선시대에 죄인을 도성 밖으로 추방해 도성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형벌)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심집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면됐고, 2년 뒤인 1638년에는 예조판서로 복권되었다. 따라서 당대에는 무탈하였지만 그의 '가짜 신의'는 내내 심판의 대상이 되었으니 계속 까이다가 숙종 7년 드디어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사관의 평가는 박하였다.
"심집은 인조조(仁祖朝) 때 사명(使命)을 받들고 오랑캐의 진중(陣中)에 갔다가, 오랑캐에게 협박받아 스스로 가함(假銜, 가짜 직함)의 실상을 진술하고 구차하게 모면하니, 세상에서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효종 때 사람들의 말로 인해서 추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손자 심유방(沈攸方)이 윗선에 아부하였기 때문에, 대신들이 가뭄이 답답함을 빙자하여 근거 없는 말로 추복(追復)을 허락받아 사사로움을 이루었던 것이다. … 그 조치가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능히 나라가 되었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하여 영조 17년인 1741년에 겨우 심집의 신도비를 시흥 무덤 곁에 세울 수 있었다.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인해 인천 계양산의 서쪽 자락으로 옮겨졌는데, 그 업보 때문일까, 이름 뜻과 달리 모든 게 화(和)하지 않고 오류가 있다. 안내문에 잘못 기재된 이름자를 말하는 것인데, 다시 말하거니와 그의 이름은 즙(楫)이 아니라 집(諿, 화할 집)이다. 청송심씨 족보에도 묘표에도 그러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껏 고쳐지지 않고 있다.

입구의 거듭 잘못 표기된 이정표 
인천 서구 공촌동 산70-3의 청송심씨 묘역 
심집의 묘 (왼쪽) 
묘표 / 부인 남양홍씨와의 힙장묘이다. 
좌우로 늘어선 문석인과 망주석 / 여러 기를 이장하며 교란된 듯하다. 

그래도 뛰어난 석물은 금방 눈에 띈다. 
사후 100년 뒤 세워진 심집 신도비 / 같은 당파였던 송시열이 문장을 지었고, 홍봉조가 글씨를 썼다. 높이 1.9m 너비 0.85m 폭 0.53m이다. 
묘역 가운데의 고인돌 
심집의 아버지 심우정 묘 
심우정 신도비 / 유독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마지막 검찰총장 심우정이 연상된다. 그는 12.3비상계엄의 유탄을 맞긴 했으되 대한민국의 정체절명의 기로에서 제 안전만을 생각함으로써 나라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아마도 영원한 죄인으로 남으리라 본다. 
남자답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던 심우정의 마지막 모습 / 우연찮게도 그도 청송심씨이다. 
계산역 횡단보도에서 우연히 발견한 참군인 김현태의 현수막 / 비겁하지 않았던 사나이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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