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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대 사회혼란사건인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 번복된 판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21. 23:51
서울시 중구 소공동 74번지를 GPS로 검색하면 중구 북창동 74번지가 뜬다. 주소 자체가 없어졌기에 같은 지번을 가진 주변의 동네를 찾아준 것이지만 당연히 두 곳은 다른 곳이다. 이렇듯 소공동 74번지는 교란됐고 현재는 본래의 주소마저 없어진 마당이니 해방 후 그곳에 있었다는 근택(近澤)빌딩, 혹은 그 터를 찾는 것은 언뜻 불가능하게 여겨졌는데, 몇 년 전 운 좋게도 그 위치를 찾았다. 시중에 떠도는 근택빌딩 사진과 옛 주소를 근거로 하여 확인한 것인데, 거두절미 옛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올려본다.

시중에 떠도는 근택빌딩 사진 
한정식 '아리랑'이 들어선 2026년 사진 
전면으로 명동이 보인다.
이 장소를 주목하는 것은 근택빌딩이 해방 후 조선공산당 본부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옥으로 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원래도 치카자와 인사쯔죠(ちかざわ いんさつじょ)라는 이름의 일본인 인쇄소가 있었다. 그 일본인 사장의 성씨가 치카자와(近澤)였는데, 제법 규모가 있어 근방 조선은행의 조선은행권 지폐를 인쇄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행 백원권 / 조선총독부가 1914년부터 발행한 고액권 화폐로 일본 민담의 대흑천상(大黑天像)이 도안되었는데, 해방 후에도 이 노인네는 수노인상(壽老人像)으로 이름만 바꿔 그대로 그려졌다. 
1947년 6월 마지막으로 발행된 조선은행권 백원권 
일제강점기의 조선은행
해방 후 북노당(북조선노동당)은 일제가 남긴 유산(수풍수력발전소, 부전강·장진강·허천강수력발전소, 흥남질소비료공장, 아오지 중화학공장, 황해제철소, 청진제철소, 성진 고주파중공업소, 평양 군수공장 등)으로 윤택하게 운영되었고, 레닌과 스탈린으로부터도 수백만 루불의 자금지원을 받았던 바,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면 이러다 할 수입원이 없던 박헌영 그룹을 비롯한 남한의 공산당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
그리하여 좌빨들이 조직의 운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사상보다 쩐(錢)임을 절감할 즈음 조선공산당 김철수의 귀에 기 막힌 정보가 하나 들어왔다. 미군 진주 후 근택인쇄소의 치카자와 사장이 서둘러 돌아가며 조선은행에서 외주 받아 인쇄하던 일본 지폐의 원판을 그대로 놓고 갔다는 첩보였다. 김철수는 박헌영과는 다른 공산당 계열로, 김철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박헌영은 이르쿠츠크 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좌빨이었다.
이에 김철수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내어 일본으로 날아가 근택빌딩을 건물주인 일본인 치카자와 시게루(近澤茂)에게 20만원을 주고 정식으로 매입했다. 이후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로 개칭하고, 조산공산당 본부를 겸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의 인쇄 시설을 이용해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했지만, 원래 목적이 일제의 원판을 활용한 위조지폐의 발행임은 두 말할 나위없었다.

독립운동가로 투옥됐던 시절의 김철수
광복 직후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이 주요 화폐로 쓰였지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화폐도 여전히 유통되었는데, 지폐인 조선은행권으로는 10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 등이 있었다. 일본 정부가 주조한 10전, 5전, 1전의 주화(鑄貨)도 사용되었다. 미군은 일본 점령지에서 사용할 화폐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바, 엔(¥) 단위로 표시된 군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용할 군포는 따로 제작되지 못했으므로, 포고령 제3호(통화)로 미국 군표와 조선은행권 등을 법화(法貨)로 지정하였다.

해방 후 조선은행 발행 백원권 / 조선 서적 주식회사에서 모조지에 평판으로 인쇄되었다. 
백원권의 뒷면 
미군 군표 / 미군이 한국에 진주한 이후부터 1946년 6월까지 사용하였던 군표로 특정 나라나 인물을 상징하는 도안은 없다.
미군 사령부는 해방 전 통용되던 일본의 군표를 무효로 하였지만 법정통화로 일제강점기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그대로 인정했다. 따로 조선을 위해 발행된 군표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덕분에 김철수의 조선공산당은 떼부자가 되었다. <해방일보> 사주 김철수와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이 주체가 된 좌빨들이 입수한 원판으로써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다.
김철수는 스탈린과 박헌영을 대단히 싫어했지만 (그는 독립운동가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고 연해주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스탈린을 증오했다) 같은 공산당인 박헌영에게 위폐를 전달해 활동비로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수뇌부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는 무제한으로 위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항간에 소문으로 떠도는 화폐 개혁이 현실화될 경우 이 위폐들을 정식 화폐로 교환받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어디나 마찬가지로 공돈이 들어오면 반드시 사고가 터지게 마련이었으니,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내던 김창선을 비롯한 좌빨 인쇄공들이 자신들의 수고에 대한 보답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인쇄한 위폐를 삥땅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동네 작은 술집에 들어가 위조지폐로 술을 마시다가, 점점 간이 커져 비어 바(Beer Bar)와 같은 고급 술집까지 드나들게 되었는데, 급기야 최상류 층만 이용하는 요정까지 출입했다.
백원권 새 돈으로 아낌없이 술을 마시고 여급들의 팁까지도 빳빳한 돈으로 뿌려대던 그들은 요정에서도 VIP였다. 하지만 요정은 그들이 술을 마시던 기존의 술집과는 달랐으니 곧 눈치 빠른 새끼 마담들에게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급기야 요정을 출입하던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이들의 존재가 귀에 들어갔다.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이 필시 기름밥을 먹는 듯한 자들인데, 꼴에 어울리지 않게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것이었다.

장안 3대 요정인 오진암이 있었던 익선동 길 / 이비스 엠베서더 호텔 자리에 오진암이 있었다. 
정판사 사건에 연루된 이관술, 김창선의 집이 익선동에 있었다.
이 같은 첩보를 입수한 경찰청장 장택상은 은밀히 내사를 지시했고 경찰은 소공동의 조선정판사를 덮쳤다. 경찰은 1946년 5월 15일 제1관구경찰청은 장택상(張澤相) 청장 명의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발표했다. "300만원 이상의 위조지폐로써 남조선 일대를 교란하던 지폐위조단 일당이 일망타진되었다"는 것으로, 이 지폐위조단에는 조선공산당 간부 2명, 조선정판사에 근무하는 조선공산당원 14명이 관련되었다고 말했다.

동아· 조선일보에 앞서 특종을 낸 한성신문 기사 / 1946년 5월 9일자 기사로 동아· 조선에 이틀이나 앞섰다.
아울러 "해방일보를 인쇄하는 조선정판사 소재지 근택빌딩은 조선공산당 본부”라고 위폐 제작 장소를 특정했으며, 아직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40세)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45세)"이라고 신원을 밝혔다. 이들은 머잖아 체포되었으며 이관술(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주모자로 지목됨) 박낙종(조선정판사 사장) 송언필(조선정판사 서무부장) 김창선(조선정판사 기술과장)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아울러 신광범·박상근·정명환에게는 징역 15년, 김상선·홍계훈·김우용에게는 징역 10년 등 관련자들에게 중형이 선고되었는데, 관련자들은 1심 결과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재판장 김용무 대법원장, 대법관 이상기·노진설·김찬영·양대경)은 1947년 4월 11일 상고를 기각했다. 이관술, 송언필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가 발발하자 총살로 학살됐고, 박낙종은 목포형무소 복역 중 바다에 빠뜨려져 수장됐다.※ 앞서 말한 김철수는 사건이 터지기 전 낙향해 구속을 면했다. 그 무렵 김철수는 극심해지는 남한의 좌우 갈등과 세력 싸움에 깊은 환멸을 느낀 나머지 모든 정치 활동을 접고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했다. 이후 농사로 생계를 이었는데, 6.25전쟁 중에도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잔류하며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과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거물이었던 만큼 감시와 고초를 피할 수 없었는데, 그러함에도 끝까지 전원 생활을 영위하다 1986년 3월 16일 별세했다. 당시 나이 92세로 장수한 편이다.
이상이 내가 알고 있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전모이다. 하지만 최근 알고 보니 크게 두 가지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우선은 소공동 조선정판사의 위치로서, 그것이 현재의 한정식 '아리랑' 자리가 아니라 바로 옆 롯데백화점 주차타워 (소공동 76-3) 자리라고 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위치를 바로잡아 주셨다.(2023년 3월 별세했다) 아울러 이 사건이 작년 12월 재심에서 무죄 선고됨으로써 나의 기존 생각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됐던 '조선정판사' 건물 입구 / 지상 5층, 지하 1층의 고층건물이었다. 
현재는 롯데백화점 주차타워가 들어섰다. / '아리랑' 한정식점의 바로 옆 건물이다.
2025년 12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관술의 유족들이 청구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재심에서 당시 경찰의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으며, 유죄를 입증할 만한 합법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고 판단하여 주범인 이관술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았다. 이관술은 79년 만에 무죄가 입증된 셈이다.
당시 경찰은 일제강점기 경성콤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골수 공산주의자로 당시 김철수 다음의 위치인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이던 이관술을 제거함으로써 남한 공산주의자의 힘을 빼았는데 성공했고, (박헌영은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함)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미군의 공산당 불법화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까지는 공산당이 합법적이었다)

동덕여자보통학교 교사 시절의 이관술과 복역 신상카드 사진 
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의 이관술 신상카드
아직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 조작이 아닌 진실이라 말하는 사람이있지만, 나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그것은 작금의 이른바 '윤석열 내란사건'에서의 판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해지는 사법부에 대한 외압이니 (과거에는 좌파 판사, 지금은 우파 판사들에 대한) 나는 얼마 전 (2026.5.6) 서울 법원 청사에서 투신자살한 신종오 판사의 죽음 뒤에도 권력을 외압이 있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안타까운 사건에 대한 <한겨레신문>의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항소심을 담당했던 신종오 부장판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법원과 경찰 등 설명을 6일 들어보면, 신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1시 서울 법원 청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타살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신 부장판사가 재판장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5-2부는 지난달 28일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서 징역 4년 및 벌금 5천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주가조작과 샤넬 가방 수수 혐의 등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뒤집고 이를 유죄로 판단했다.
가족들 신고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신 부장판사가 남긴 유서를 발견했다. 유서에는 최근 재판과 관련된 언급은 담기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 내용 비공개 원칙에 따라 유서 내용은 알릴 수 없다"고 밝혔다. 신 판사는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2001년 서울지법 의정부지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울산지법, 대구고법, 대전고법 청주재판부 등을 거쳐 올해 2월부터 서울고법에 재직해왔다.
신종오 판사는 휴일임에도 출근을 했고 이곳 서울중앙지법 본관에서 투신했다. 그가 극단적 선택의 장소로 근무지를 택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근무와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본능적 행위가 아니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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