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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산 장기려의 삶과 이광수의 '사랑' 서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1. 17:59

     

    의사 장기려(張起呂, 1911~1995)는 자신의 호를 성산(聖山)이라고 했다. 이는 필시 기독교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니 예수의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이 있었다는 그 산을 말함일지도 모르겠다. <신약성서>에 실려 있는 예수의 산상에서의 가르침은 지고지순 그 자체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자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태복음 5:38-45)

     

    하지만 이런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어려우니, 나는 이제껏 목회자이건 종교인이건 이와 같은 가르침을 몸으로 행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런 일을 행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예수의  이와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어떤 사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바로 장기려다. 

     

    장기려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1923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하고 2년이 지난 후라고 한다. 이때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의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김교신이 발행하던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었다. 그는 훗날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우치무라 간죠의 저서 / 우치무라 간죠는 개화기 일본의 최고 신학자로, 일본 초기 기독교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의 기독교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성서조선 운동'의 김교신, '무교회주의'의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일본에서 발행된 김교신에 관한 책
    종로구 연건동에 있었던 초기 경성의전 건물
    서울대병원 내에 남은 당시의 흔적 / 2021년 찍은 사진으로 제중원 표석은 지금은 치워졌다. 제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던 만큼 정통성을 계승하고 싶었겠지만 세브란스 병원이 선점한 듯싶다.
    1926년 건립된 경성대학 의학부 건물
    지금은 서울대 치의학대학원과 서울대 간호대학 건물로 쓰인다.
    그 무렵의 장기려


    장기려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그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환자를 위해 헌신하다 간 외과의사이다. 의학적 성취로는 1943년 당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간부분절제수술에 성공했고, 1959년에는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위한 대량 간절제술을 성공시켜 한국 간 외과학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을 창설하여 가난한 자들을 도왔다. 그러면서 본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으니 그는 평생 무소유와 박애를 실천하다 갔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의대 전신)를 수석 졸업했다. 그는 6.25 때 단신 월남하며 아내와 자녀를 북에 두고 오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전쟁 중인 1951년 부산에서 피난민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천막 무료치료소를 열어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후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그는 1968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다. (대한민국 건강보험 제도의 효시이다)

     

    그는 평생 개인 사택 없이 병원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월급을 내어주거나 밤래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 탈출을 도우는 등, 지금은 생산 불가능한 여러 일화를 낳았다. 그는 북에서 김일성을 수술해 준 전력이 있어 월남 후 방첩부대에 끌려가 여러 번 문초를 당하기도 했으며, 춘원 이광수를 치료해 준 인연으로, 이후 이광수가 자신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장기려 본인은 '안빈'에 비교될 수도 없는 사람이며 이를 부정했다.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사랑>은 육체적 욕망을 초월한 정신적이고 이타적인 '보편적 사랑'을 탐구한 작품이다. 초간단 시놉을 말하면,

     

    교사였던 '석순옥'은 작가이자 의사인 '안빈'의 사상에 매료되어 간호사 자격증을 따 그의 병원에 취직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당연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그러자 순옥을 짝사랑하는 시인 '허영'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순옥과 안빈이 불륜 관계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로 인해 안빈의 아내인 천옥남은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안빈과 순옥의 숭고한 정신적 사랑을 깨달은 주변 인물들이 이들을 인정하고, 순옥 역시 안빈의 세계를 이해하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완성한다.

     

     

    '옛날물건'에 나온 1938년 <사랑> 초간본
    <사랑> 초간본의 서문
    1968년 영화화된 문희·신영균·김지미 주연의 <사랑>
    <사랑>의 스틸컷

     

    <사랑>은 개신교, 천주교, 불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남녀간의 맹목적인 애욕을 넘어선 인류애적이고 종교적 차원의 이상적인 사랑을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광수도 그것을 자신이 쓴 <사랑>의 서문에 담았다. 아래는 그 서문의 일부이다. 

     

    나는 우리들 중생 중에 때로 뛰어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다. 석가여래라든가 여러 보살이라든가 예수라든가 하는 어른들이시다. 나는 그이들도 본래는 나와 같은 중생이셨더니라고 배울 때에, 너도 나와 같이 될 수 있느니라고 가르치심을 받을 때에 한량없는 고마움과 기쁨을 느낀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몸과 가장 아름다운 음성과 가장 높은 지혜와 한량없는 사랑과 힘과 공덕을 가진 사람이 되어 모든 중생의 사모함을 받고 그들에게 기쁨과 힘과 구원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대흥서원의 영원한 생명으로 중생의 사랑의 의지가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사람들아, 이보다 더한 희망이 또 있겠는가?

     

    ※ 대흥서원(大興誓願)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거대하고 드높은 서원(깨달음을 얻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맹세)'을 뜻한다. 

     

    이광수는 서문의 끝에 '무인(戊寅) 국추(菊秋) 북한산 기슭에서'라고 썼다. 무인은 1938년이고, 국추는 국화꽃이 피는 가을, 즉 음력 9월을 말하며, 북한산 기슭은 아래의 홍지동 별장을 뜻한다. 

     

     

    이광수의 홍지동 별장
    안은 이렇다. (개인 집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다)
    입구의 안내문
    이광수의 별장에서 내려보였을 홍지문
    이광수의 별장에서 내려보였을 오간수문
    부근의 세검정
    종로구 효자동 751-1번지 춘원의 옛 집자리 / 춘원의 옛집은 진즉에 헐렸고 현재는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그의 아내 허영숙이 운영하던 병원이 근방에 있었다. 그는 이 곳에 살 때 아내 허영숙에게 어지간히 바가지를 긁혔다.
    이광수, 허영숙과 아들 봉근 / 허영숙은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이자 여성 개업의이다. 이광수는 고향의 본부인을 버리고 일본유학 중 만난 허영숙과 결혼했으나 이 아들은 8세 되던 해에 잃었고 내내 허영숙의 히스테리칼한 성격에 시달려야 했다.
    춘원이 해방 직전 홀로 살았던 남양주 사릉로 283번길의 집터 / 지금은 표석만 남았다.
    평양 재북인사릉의 이광수 묘 / 춘원은 6.25 때 납북된 후 북한군이 UN군에 쫓기던 때 강계에서 죽었다. 김일성이 의사를 보내주었으나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기려가 묻힌 마석 모란공원 / 그는 주위의 재혼 권유를 물리치고 평생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는 누군가 "왜 평생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미력이나마 남을 도와주면 북에 있는 내 아내와 자식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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