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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온 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6. 9. 23:33
고구려 제24대 왕인 양원왕(재위 545~559) 때 고구려는 북방 강국 돌궐의 대대적인 침입을 겪는다. 돌궐은 고구려 서쪽 요새 백암성과 신성 일대까지 내려와 공격하는 등 일시 기세를 올렸지만 고흘(高紇) 장군이 백암성 전투에서 돌궐군을 크게 무찌름으로써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이때 돌궐군 1천 명을 척살하고 3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551년) 그러나 이를 기화로 쳐들어 온 나제연합군에게는 패하였으니 백제에게 6군, 신라에게 10군을 빼앗기며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고구려 오골성 전경 
치성(雉城)이 돋보이는 백암성 전경 
망대(望臺) 
성벽 
자연 해자(垓子) 전경 
백암성 부감 
운무 속의 백암성 
백암성 성벽 부감 
구리 아차산 고구려 4보루 
아차산 4보루 치(雉) 
치에서 바라본 서울 동부 
아차산 보루에서 바라본 한강 / 백제는 이 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옛 영토를 수복하지만 
나제동맹을 깨고 공격해 온 신라 진흥왕에게 다시 빼앗긴다. / 위는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복제비)이다. 고구려의 외환(外患)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제54대 왕인 평원왕 때는 북주(北周)의 침입을 겪는다. 577년 이른바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 제국(諸國)을 통일한 북주의 황제 우문용은 천하통일의 야심으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이때 고구려에서는 소그디아(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장수 온달(溫達, 소그디아어 Ondar)이 나아가 배산벌 전투에서 북주의 대군을 물리친다. 온달의 승전이 기록된 아래 <삼국사기>의 후주(後周)는 북주를 말한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치자 왕(평원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벌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그 선봉을 맡아 힘을 다해 싸우니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이에 그 여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기니 전공을 논함에 있어 온달을 첫 번째로 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길 "이자는 나의 사위다"하며 예로써 온달을 맞이하니 대형(大兄)의 작위를 주었다. 이로부터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으니 위엄과 권세가 날로 더해졌다.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寵榮尤渥 威權日盛.

주무제 우문용(543~579) / 천하통일의 야망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한 후 병사했다. 
고구려 기병 / 전쟁기념관 
배산벌은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이현(易縣)으로 추정된다. 
이현의 위치 / 고구려의 영토가 북경까지 미쳤다고 하면 발작하는 무리들이 나탄나다. 아마도 친중 사대주의자이거나 중국인일 것이다. 북주를 물리치자 평원왕은 위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그동안 반대하던 평강공주와의 혼인을 인정하고 비로소 자신의 사위로 받아들인 후,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하사한다. 이에 감읍한 온달은 보은의 의지를 피력하는 바, 다음 왕인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표를 올려 40여년 전 양원왕 때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출정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기필코 우리 땅을 되찾아오겠습니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이때 그가 한 말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는 다짐이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파죽지세로 남하한 온달은 일차로 한강 이북의 고토를 수복한 후 계립현과 죽령 서쪽 영토의 수복을 서둘렀다. 하지만 한강을 건너기 전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한강에 연접한 아차산성으로, 과거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이래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기록됨)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나 지금은 북한산성이라는 이름의 신라 요새가 된 성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온달은 아차산성 공격에 나섰다가 성 위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너무도 원통하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고구려군들이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이송하려 했으나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히 아차산성으로 달려왔다.
평강공주는 어릴적 자주 울었고 그때마다 그렇게 울면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한 혼혈아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에 온달을 자신의 배필로 여겨왔고, 나이가 이르자 이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다. 이후 온달을 연마시켜 장군에 오르게 만든 매우 현명한 여자였던 바, 원한 사무친 온달의 혼을 달래는 데도 현명하였다. <삼국사기/온달전>에는 평강공주가 남편의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옵소서(死生決矣, 於乎歸矣)"라고 애원했고, 그러자 비로소 관이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다고 쓰여 있다.
그 아차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리시 아차산에 고구려식 횡혈식 석실분이 남아 있다. 어쩌면 온달 장군의 가장(假葬地)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무덤인데, 그밖에 평강공주가 걸었을 법한 길에서 본 이채로운 사진들을 함께 포스팅해 본다.

아차산성 망대(望臺) 
아차산성 망대 
아차산성 성벽 
성벽 오르는 길 
아차산성 출토 유물 
아차산성의 형태와 유물 발굴 장소 
동문 쪽은 사진으로 보기보다 훨씬 급한 경사지를 이룬다. 
아차산성에서 광장동 쪽으로 내려오다 볼 수 있는 급경사 암반 위의 산책로 구름다리 
아차산성 가는 길의 온달· 평강공주 부부상 
아차산 횡혈식 석실고분 (앞) 
아차산 횡혈식 석실고분 (뒤) 
아차산성 부근 광장동의 정자 
아차산성 부근 광장동의 정자 
광장동 동네에 남은 우물의 흔적 
아차산에서 본 한강의 낙조 / 이희동 사진 
지금은 다리가 하나 더 생겼다. 
북한은 평양 진파리 4호분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로 꾸몄다. / 뉴시스 사진 
진파리 4호분 무덤방의 수목도 /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를 그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화로 평가받는다. 
진파리 1호분은 고흘 장군의 묘로 꾸몄다. / 왕릉이 전쟁에 이긴 장수 묘가 되는 것도 북한식 사고방식이다. 
진파리 1호분 무덤방 입구의 주작도 
진파리 1호분 백호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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