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낙산성곽의 동쪽으로 가면 창신동이고 서쪽으로 가면 충신동이다. 창신동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 소개한 바 있으나 충신동은 좀 박했다. 그래서 어제 일요일 오후 한 나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다음 주부터 추워진다 해서 괜히 급한 마음으로 나선 길이다. 먼저 찾아보고 싶은 곳은 선조 때의 인물 김효원(金孝元, 1532~1590)의 집이었다. 김효원은 선조 때 이루어진 동서 분당에 있어 동인(東人)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김효원이 서울 동쪽 낙산 밑에 살았다 하여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동인이라 불렸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릉방(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하여 그들 일파가 서인으로 불렸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심의겸의 집은 정동 서울시립미술관 아래 있었다 하는데, 부근에 김장생, 김집 생가 터 표석은 있으나, 당파 싸움의 부정적 인식 때문인 듯 심의겸의 것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효원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니 그의 집은 어디 있었는지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심의겸의 집으로 가는 길 / 심의겸의 집은 현 덕수궁 돌담길 끝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아래 있었다.낙산 성벽 아래의 왠지 김효원의 집일 것 같은 곳
김효원의 집에 대해 전혀 전하는 것이 없는 이유는 우선은 그가 검소한 생활을 한 까닭인 듯하다. 그는 정의감에 불 타 치열한 당파싸움은 했어도 앞선 권력자 윤임이나 윤형원과 달리 부(富)를 탐하지는 않았으며, 당상관에 올랐어도 작은 집에 살았다고 한다. 까닭에 김효원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던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을 탄핵함에 있어 떳떳할 수 있었다. 김효원은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문정왕후의 동생으로서 20년간 권세를 누리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던 윤원형을 탄핵했다.
이에 결국 윤원형과 첩 정난정은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진하였으며, 이로써 기존 부패 권력들의 시대가 마감됐다. 당시 김효원의 직책은 요즘의 서울지검장이나 중수부장쯤에 해당되는 정5품의 사헌부 지평이었다. 그러한 자가 권력의 대가리를 쳐냈던 바, 곧바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명종 말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요즘이야 말로 그와 같은 기개 있는 검사가 요구되는 시절이나 모두 겁먹은 강아지 마냥 꼬리를 말고 있은 바, 현대의 의로운 사헌부 관리는 차마 기대조차 어렵다.
파주시 교하면 윤원형의 묘 / 묘는 초라하며 묘표조차 망실되어 최근에 다시 세워졌다. 오른쪽 작은 봉분이 정난정의 무덤이다.애첩 정난정의 묘 / '초계(草溪) 정난정의 묘'라 쓰여 있어 아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첩이었던 그는 윤원형의 정실부인을 독살하고 와이프가 되었으나 묘표 뒷면 음기(陰記)에는 '첩실'이라 명기됐다.
잘 알려진 대로 1575년(선조 8년)의 동서 분당은 관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사람파의 김효원과 심의겸이 다투다 동·서로 갈라선 것이 시발이었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은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 5급 사무관 정도로, 당대에도 정5품 품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삼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리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권한이 주어졌다. (대신들이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여 인사를 전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의 인사권을 판서나 참판에게 주지 않고 전임 전랑이 이직할 때 후임자를 자천토록 했다) .
따지자면 지금의 대통령실 인사비서관급에 해당하는 끗발 있는 자리였으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김효원과 심의겸은 과거에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알력이 있었다. 1572년(선조 5)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됐을 때 과거 건천방 중부(현 서울시 중구청 자리)에 살던 윤원형의 집에 들락거리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에게 까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됐던 바, 김효원은 기다렸다는 듯 퇴짜를 놓았다.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명종의 와이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임금에 올랐으므로 그의 반대 주장이 먹혔다. 이렇게 심충겸을 밀어낸 김효원은 자기 쪽 사람인 이발(李潑)을 이조전랑에 올렸다. 이후 반목이 더욱 심해지며 동·서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굳이 편을 들자면 나는 김효원의 동인 쪽이다. <선조실록>에 실린 영흥 부사 김효원의 졸기(卒記)가 워낙에 클리어하기 때문이다. (평가에 박한 졸기의 특성상 이만한 내용도 드물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효원이 졸하였다. 효원은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로서 전례대로 자급을 올려 (함경남도) 영흥 부사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지나서 고을에서 졸하였다. 효원은 벼슬살이에 있어서 청렴 결백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정결하고 민첩하게 하였으며 세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젊었을 때 날렵하여 일을 좋아하였고 논의가 과격하였으므로 동류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그의 밑에 있었는데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도 하여 끝내 당파의 괴수라는 명목으로 죄를 얻어 외직에 보임되었다. 한직(閑職)에 있으면서 잘못을 반성하여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시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며, 친구에게 보내는 서찰 내용에도 조정의 득실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늘 탄식하면서 '당초 전조(銓曹)의 석상에서 발언한 한 마디 말은 단지 나라를 위해서였는데 어찌 이토록 분란이 생길 줄이야 생각했으랴. 나로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그의 부친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었는데 늘 문안갈 적마다 개성을 거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심의겸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매우 다정스럽게 그를 영접하여 주자 효원도 그곳에서 하루 이틀 묵어가며 친구인 것처럼 즐겁게 지냈다.
그 후 효원이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여 관아에 좌기(坐起)했을 때 심의겸의 부음(訃音)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의 친구를 잃었구나' 하고, 이틀간 좌기를 파하고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아마도 깊이 후회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 4월 기사)
<선조실록>김효원의 묘가 있던 남양주시 화접면 풍경 / 산24-4에 있었으나 주변 개발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226으로 이장됐다.
흔히 정당을 가리켜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정의는 예전의 동서 붕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효원은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심효원과 달라 서로 치열히 싸우기는 했으되 심효원이 죽자 한없이 슬퍼하였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지방관을 자임하였고, 이후로는 정치와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상대방의 비난을 위해 주둥이를 털기 바쁜 요즘의 잡것 정치인들과 너무도 비견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지방관으로 재임하며 사사로운 일로는 한 번도 도성을 밟지 않았으며 행정에 힘써 청백리이자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헌신적이며 유능한 관리로서 명망이 높았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장인이기도 한 그는 지방관으로서는 안악군수와 삼척부사를 지냈고 더 먼 임지인 영흥부사를 자청해 나갔다가 1590년 임지에서 58세로 졸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이후로도 당쟁이 지속되다 김효원 사망 2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았다.
▼ 충신동의 전망 좋은 집들 창신동과 충신동 두 곳은 과거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 추진된 도시재생 사업을 대표하는 곳이다. 까닭에 서울 도시재생 1호로 선정돼 많은 예산이 투입돼 골목이 정비되고 갖가지 벽화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하여 골목을 구경하려는 오버투어리즘으로 인해 오히려 주민들이 고통을 겪기도 해 지금은 그림들이 거의 지워졌다. 아울러 충신동은 '벽화 그리는 게 재생이냐'는 비난을 받으며 실패한 도시재생의 상징적인 동네가 됐다.
그러나 재개발 추진을 우선으로 하는 오세훈 시장이 취임한 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창신동은 오 시장이 도입한 민간 재개발 지원제도인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 후보지로 선정돼 재개발을목전에 두었고, 옆동네 충신동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필시 조만간 이곳도 신통기획 후보지로 선정될 것이 틀림 없는 바, 머잖아 상전벽해가 되어 아래의 풍경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보지 못하게 될 충신동 풍경을 이 기회에 담아 보았다.
충신동 입구 계단계단을 올라 가 또 만난 계단계단을 올라 만난 집그 옆집집 앞 계단 위의 고양이 두 마리고양이가 있는 계단에서 본 충신동 길과 북한산굴다리 아랫집바로 그 윗집굴다리 동네 풍경그 중의 한 집그 동네보다 더 위에 있는 집들굴다리 동네의 디테일굴다리 동네에서 내려 본 풍경거기서 다시 오르는 길을 만났다.그 길에서 마주한 골목그 골목의 이름드디어 나타난 낙산 성곽낙산 성곽에서 본 창신동흥인지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내려가는 길에서 본 남산내려가는 길에서 본 충신동한양도성박물관 / 과거 이 자리에 있던 이화여대병원 건물 중의 한 동을 살려 리노베이션했다.흥인지문 거리의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