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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촌의 숨겨진 역사 IV ㅡ 안평대군의 비해당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1. 22. 23:06

     
    안평대군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자주 들어왔다. 가장 익숙한 말은 '명필'이라는 것으로, 봉래 양사언 · 석봉 한호 ·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흔히 조선 4대 명필로 불린다. 양사언 · 한호 · 자암 김구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꼽히기도 하며, 한호 ·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3대 명필로 꼽히기도 하는데, 어찌 됐든 그의 이름은 꼭 들어간다.
     
    안평대군 이용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평소 예술에 관심이 깊어 '시·서·화'에 고루 능했으며 가야금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書)에 능해 그의 글씨는 중국에까지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중국사신들에게 "조맹부를 이었으되 조맹부보다도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그 솜씨는 더 이상 평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실제로 <연려실기술>에는 북경에 간 조선사신들이 좋은 글씨를 찾으면 중국인들이 오히려 "당신네 나라에 제일필(第一筆, 안평대군)이 있거늘 어째서 멀리서 찾느냐?"고 되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뜻밖에도 그의 글씨는 보기 쉽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35살이던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이때 역모의 수괴로 몰려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바로 윗형인 수양대군(세조)에 사사되었고 200여 점에 달하던 그의 글씨까지 모두 폐기 처분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세조는 자신들의 맏형 문종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떠서 만든 금속활자인 경오자(庚午字)마저 모두 녹여 없앴던 바, 글씨가 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올해 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나온 안평대군의 행초(行草) /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를 행서와 초서로 섞어 썼으나 실제 글씨는 아니고 목판본이다.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 해서 제발문(왼쪽) / 몽유도원도에 쓰여져 있는 제발(題跋)이 그의 가장 유명한 글씨일 것이다.
    안평대군의 금니 사경 <지장보살본원경> / 하버드대학 아더 세클러 박물관 소장품이다.
    1452년 금속활자 경오자로 인출된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1316년에 쓴 조맹부의 '증도가(證道歌)' 석각 탁본 / 두 사람의 글씨가 서로 비슷하기는 하다.

     
    안평대군이 죽은 후 그의 흔적은 지워지고 파괴됐다. 무덤도 집도 없다. 다만 그가 살던 집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이기도 하다) 터가 서촌 수성동에 전한다. 조선 후기에 쓰인 한문소설 <운영전(雲英傳)>에는 그 장소에 대해 다음과 설명하고 있다.
     
    수성궁(壽聖宮)은 안평대군의 옛 집이라. 장안성 서쪽이요, 인왕산 아래 있는지라, 산천이 수려하여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하며, 사직단이 그 남에 있고 경복궁이 그 동에 있었다. 인왕산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서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고, 비록 험준하지는 아니하나 올라가 내려다보면 아니 뵈는 곳이 없다.
     
    사면으로 통한 길과 저자거리며, 천문만호(千門萬戶)가 밀밀층층하여 바둑판을 헤친 듯하고 별을 벌여놓은 듯하여 번화장려함이 이루 형용치 못할 것이요,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여 구름 사이에 숨어 비추고 상서로운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침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한다. 
     
    한마디로 입지가 뛰어나며 교통 또한 편한 장소에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이미 집은 폐허가 된 상태였던 듯, 주인공 유영은 그 모습에 홀로 비감해하며 술 한 잔 걸치고 상념에 젖는데, 바로 그때 불현듯 하늘에서 학을 타고 내려온 '김생'(김씨 성을 가진 선비)과 '운영'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운영은 저 세상 사람으로 이승에서는 수성궁의 궁녀였다. 그녀의 썰에 따르면, 운영은 당시 안평대군의 문하의 문인 김생과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궁녀의 몸이라 감히 어쩌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 마침내 두 사람은 야반도주를 결심한다.
     
    그러나 '특'이라는이름의 노비가 안평대군에게 밀고하여 결국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저 세상에 같이 가게 되는 비극적 스토리의 소설로서 고전소설 중에서 유일한 언해피엔딩이다. 아무튼 <운영전>의 서사는 그러한데, 위 도입부의 설명을 보면 비해당은 수성궁으로도 불릴 만큼 큰 집이었던 듯하니, 따로 어느 곳을 지목할 필요가 없이 그 대지가 수성동 계곡 전체를 깔고 앉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안평대군의 별서 비해당 터와 돌다리 기린교
    겸재 <장동팔경첩> 중의 수성동 그림 / 기린교가 보인다.
    20세기 말 이곳에 옥인시범아파트라는 연탄 보일러 아파트 단지가 존재하기도 했다. (1971~2012년)
    수성동의 여름
    수성동의 겨울

     
    수성동 집의 당호(堂號)이자 안평의 호이기도 한 비해당의 비해(匪懈)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숙야비해(夙夜匪解)하여 이사일인(以事一人)이로다'라는 시구(詩句)에서 따온 말로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장 전체를 풀면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한 분 임금만을 섬기네'가 되는데, 아버지 세종이 내린 아호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대단한 선견지명을 지닌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은 수성동 계곡에 자신의 호를 딴 비해당이라는 별서를 짓고 시와 그림과 거문고를 즐겼다. 그는 이렇듯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지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의 형 수양대군은 야심이 뿜뿜한 자였던 바, 어린 임금 단종을 지키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권신을 처치하고 안평대군을 내란의 수괴라고 뒤집어 씌워 죽였다. 이것이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일어난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흔히들 오해를 해 계유정난을 수양대군이 일으킨 반란이라고 생각하나, 그 뜻은 안평대군 · 김종서 ·황보인 등이 이미 일으킨 반란을 바로 잡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유년(1453년)의 정난(靖亂)이라 부른 것이니 수양대군 이유(李瑈) · 정인지(鄭麟趾) · 한확(韓確) · 박종우(朴從愚) · 권람(權擥) · 한명회(韓明澮) · 홍달손(洪達孫) 등은 정난 1등공신이 되었다. 12.3계엄에 대한 역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재명 일당의 소행과 이름을 치환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안평대군의 호 중에는 '낭간거사'(琅玕居士)가 있다. 거사(居士)는 '정치의 장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고, 낭간(琅玕)은 옥(玉), 즉 순수를 의미한다. 정치를 떠나 티없이 깨끗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승자가 역사의 기록을 지배하는 것은 고금(古今)이 마찬가지일 터, 계유정난과 그에 얽힌 인물에 대한 평가도 같은 경우이다. <단종실록>은 안평대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안평대군) 이용은 시문과 서화를 좋아하고 소예(小藝)에 능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조 때부터 권세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간사한 소인들이 이에 아부하였는데 이현로가 으뜸이었다. 무릇 문사(文士)로 유명한 자를 모두 불러 들여서 서로 사귐을 맺고 선물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이용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황보인·김종서 등이 정사를 천단(擅斷)하게 되니 이용이 이를 인연하여 뇌물을 주고 바라지 못할 것을 엿보고 있는데, 이현로가 술수(術數)로써 요사한 말을 꾸며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공공연하게 꾀를 쓰니, 유식한 자는 분해서 이를 갈지[切齒]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모두 복권되었으니, 김종서, 황보인 등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의 청에 의해 관작이 회복되고, 안평대군 역시 김재로, 조상건 등의 청에 의해 복권되었다.
     
    이때 김재로가 한 말은 "안평대군은 다만 글을 잘하여 이름이 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었고, 부수찬 조상건은 "황보인·김종서 두 신하의 죄는 이용(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을 명분 삼았으니, 이제 만약 두 신하의 일을 억울하다고 여긴다면 이용도 마땅히 두 신하와 다름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옛사람의 혜안이 현대 모리배들의 협량을 꾸짖는 듯하다. 

     

    도난 당한 안평대군의 글씨 진품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 / "중국의 선비들은 안평대군의 글씨 한 장만 얻어도 가보로 삼았고"(<태허정집>) "조선의 사대부는 안평대군의 글씨 한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월정집>)고 했다.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은 글자 56자의 작은 소품이나 국보 제238호이다. 그러나 2001년 실종되어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수성동 계곡과 비해당 터
    비해당 자리로 짐작되는 곳
    비해당 자리에서 서촌 쪽을 찍은 사진
    비해당 앞 수석 같은 바위
    바위를 뚫어 기둥을 세웠던 흔적
    석굴암 오르는 길 / 비해당에서 석굴암까지 790m
    중간 쯤에서 볼 수 있는 호주 에어즈락 같은 인왕산 바위
    그쯤에서 만나게 되는 석굴암 약수터
    그쯤에서 내려본 서울 / 멀리 남산 서울타워가 보인다,
    드디어 나타난 석굴암
    오른편에서 찍은 사진
    석굴암 삼존불
    자연 바위 빈 공간에 법당을 마련하고 삼존불을 모셨다.
    석굴암 석조 신중상
    석굴암 돌 산신각
    산신각에서 내려본 청와대
    천향암 석문
    천향암
    천향암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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