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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촌의 잊힌 명소 필운대와 백운정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1. 18. 23:05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유다의 헤로데 왕,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수나라의 양제, 무굴제국의 샤자한, 조선의 광해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건축광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많은 궁궐을 지은 군주로서, 1608년 왕위에 올라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의 15년간 궁궐만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궁궐 영건(營建)에 공을 들였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을 비롯해 인경궁, 경덕궁(경희궁), 자수궁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까지 복원하려 하였으니 폐위되지 않았다면 경복궁도 당시에 복원됐을는지 모른다.
     
     

    샤자 한이 만든 타지마할 앞의 김정숙 여사
    관심을 잃으면 진실은 잊힌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이 불탄 것이 분노한 백성들의 소행인가, 왜군의 소행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말이 달라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불타 사라진 것은 사실인 바, 광해군은 우선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했다. 선조가 의주에서 한양으로 되돌아왔을 때 머물 곳이 없던 그는 월산대군(성종의 형)이 살던 집을 행궁 삼아 거처하게 되는데, 다른 궁이 없었으므로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그곳이 나중에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이 된다)
     
    선조도 당연히 궁궐을 재건하고 싶어 했다. 경복궁 중건은 엄두도 못냈고 규모가 작은 창덕궁을 택했다. 하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고 결국 그 과업을 광해군이 이어야 했다. 광해군은 영건을 서둘러 창덕궁뿐 아니라 창경궁까지 중건했고 이어 인왕산 밑에 인경궁을 건립했다. 인경궁은 그 규모가 경복궁에 미칠 만큼 장대했으며 모든 전각에 청기와가 씌워질 정도로 미려한 궁궐이었다. 이에 전국의 와공(瓦工)이 모두 동원되었고 각지의 가마 굴뚝에서는 연기 그칠 날이 없었다고 전한다. 
     
     

    인목대비가 유폐됐던 경운궁 석어당(昔御堂) / 인조반정 후 이곳으로 끌려온 광해군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이 꿇려진 채 36개의 죄를 질타당한다.

     
    그런데 그는 인경궁이 채 완공되기도 전 다시 경덕궁(경희궁)을 창건했다. 경덕궁은 재위 9년째 되는 1616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이후에는 다시 경복궁을 중건해 경덕궁과 연결되는 구름다리를 놓으려 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정신 감정을 받아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의 SF적 구상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포로 돌아갔고 애써 지은 인경궁마저 급 황폐화되어 사라졌다. 그리하여 약 한 세기 반이 지난 영조 때는 궁중에서조차 인경궁이 있던 위치를 몰라 동네 노인에게 묻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영조실록> 45년 기사)
     
    임금(영조)이 세손(정조)과 함께 궁에 들어갔다가 승지에게 명하여 인정전의 옛 터를 살피게 했다.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인목왕후가 인경궁에서 승하하였다는 글이 있으므로 그 터를 찾아보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에 승지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동네 노인에게 물어봤더니 인왕산 아래 사직단의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하였다.
     
     

    근자에 졸속 복원된 경희궁
    경희궁 정전에는 품계석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 인경궁은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어 위치를 비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학자들은 대강 지금의 배화여중고와 배화여대가 있는 곳이 인경궁의 중심지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치 상 지형 상 그러했기 때문인데, 1897년 미국 남(南) 감리선교회 정식 파견교사로 한국에 온 조세핀 캠벨은 1년 뒤인 1898년 인달방(仁達坊) 고간동에 캐롤라이나 학당(배화학당의 전신)을 건립하며 볕이 잘 들고 넓은 터를 가진 이곳을 선택하고 크게 만족한다. 그는 이때 이곳에 남아 있는 여러 채의 궁속(宮屬) 건물을 매입해 교사(校舍)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캠밸 기념관이 된 배화여고 본관
    조세핀 캠벨 상
    캠밸 기념관 오르는 계단
    계단 위 은행나무
    배화기념관이 된 생활관
    배화기념관에서 내려본 도심 / 멀리 창덕궁과 계동 현대 사옥이 보인다.
    배화여대 쪽에서 본 인왕산
    배화여대 쪽에서 본 북한산과 백악산


    그런 것을 보면 일대는 구한말까지도 관(官)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인경궁이 있었다면 위치 상  지밀(至密)의 후원은 필시 필운대(弼雲臺)였을 것이다. 현재 배화여고 별관 뒤에 있는 필운대 바위는 광해군이 궁궐을 짓기 전까지는 선조 때 재상을 지난 백사 이항복의 별서지였다. 지금도 볼 수 있는 '필운대' 각자의 '필운'은 이항복의 또 다른 호를 새긴 것이나 글씨도 그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광해군의 인경전 영건에 그의 후손이 물려받은 별서지를 빼앗겼을 것임은 확실하다. 
     
    그것을 조선말인 1873년 후손인 이유원이 되찾은 듯하니,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또한 거부(巨富)였던 이유원은 계유년(1873년) 필운대 바위에 '우리 조상의 옛집에 왔는데....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 구름만 깊다'라는 소회를 밝히며 제 이름을 새겨 놓았고, 그 옆에는 또 조선말의 유명 가객(歌客)이었던 박효관이 당시 교류했던 이들과 함께 이름을 새겼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말 이유원은 남양주 천마산 아래의 가오실 별서에 살았고 필운대는 박효관이 빌려 은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필운대 전경
    필운대
    필운대 각자 바위
    필운대 각자 바위 아래 홈을 파 바위 틈에서 나오는 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윗 홈에 고인 물이 홈 사이의 바위 속으로 뚫어진 작은 구멍을 통해 아랫 홈에 고이도록 했는데, 지금은 풍화에 구멍이 사라졌다.
    이유원의 각자
    박효관의 각자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 중의 '필운대' / 지금은 배화여고 건물 등에 막혔지만 과거 이곳에서는 서울의 광경이 한 눈에 내려 보였을 것이다.


    겸제 정선이 서울 북촌과 서촌의 정경을 그린 장동 8경 그림 가운데도 '필운대'가 있다. 그 <장동팔경첩> 그림 속의 명소 8곳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필운대 한 곳은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필운대는 세인들에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배화여고 내 깊숙한 장소에 있기 때문일 터인데, 교내에서 만난 학생들마저 거의가 그곳을 몰랐다.  
     
    그보다 더 어렵게 찾은 곳은 아래의 백호정이다. 이곳은 필운대로부터 도보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곳이나 코 앞에서도 찾기 힘들 만큼 마을 주택에 둘러싸여 있다. 아마도 이곳 백호정을 단 번에 찾은 탐방객은 없으리리 본다. 안내문에 따르면 백호정은 인왕산 다섯 활터 가운데의 하나로, 정자는 없어지고 각자 바위만 남았다고 한다. 글씨는 숙종 때의 명필 엄한붕이 썼다고 돼 있다. 
     
    백호정 바위 아래는 지금도 물이 고이는 샘이 있는데, 인왕산 호랑이가 와서 먹었다는 전설이 깃들어져 있다. 전설이 아니라 필시 그러했을 듯싶다. 상상을 하자면 그 인왕산 호랑이의 호환을 막고자 인경궁이 있었을 때는 후대의 내금위와 같은 군인들이 주둔했을 법하고, 그들의 기지가 훗날 활터로 전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백호정 바위 / 이곳은 정말로 찾기가 쉽지 않으니 심지어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다.
    '백호정' 각자
    옆에서 본 각자 바위
    바위 위에서 내려본 광경 / 오른쪽 아래에 개구리바위라고 부르고 싶은 돌출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들이 주택가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는 전혀 전혀 노출이 안 된다. 주소는 누상동 166-1이며 내비 상으로는 옥인3길 끝에 위치하나 찾기는 쉽지 않다.
    인왕산 쪽 풍경
    안내문
    각자 바위 아래의 샘
    샘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고인다.
    배화여대에서 내려본 모습
    백호정 가는 길
    백호정 부근의 한옥
    근방에서 '건축학 개론'에 나온 집도 볼 수 있다.
    '건축학 개론''에 나온 누하동 한옥
    그 무렵의 수지
    배화여고 부근 은행나무 / 서울매동초등학교 앞, 승동교회 뒷편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이나 정식 명칭은 없다.
    옛 인경궁의 흔적? / 배화여고 오르막 길에서 발견한 조선식 성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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