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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촌의 숨겨진 역사 V ㅡ 연산군과 종교교회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5. 11. 25. 16:02

     
    조선 9대 임금 성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는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와 권신 한명회가 부린 야료는 이미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다시 간단히 짚자면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으로써 권세를 누리기 위해 8대 임금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맏손주 월산대군을 밀어내고 13살짜리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을산군의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장인인 한명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던 바, 말하자면 성종은 권력 나눠먹기의 산물로 태어난 왕인 것이다. 
     

    세조 가계도
    창경궁의 성종 태실 .

     
    정희왕후는 13살 짜리 성종을 대신해 왕 노릇을 하다 성종이 20세가 되자 철렴(撤簾, 수렴청정을 거둠)하였고, 이후로는 생모인 소혜왕후가 득세했다. 소혜왕후는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의 부인으로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궐내에서 존재감이 사라질 뻔했으나 제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위에 올리며 기사회생한 케이스였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왕(덕종)으로 추존되며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고 까닭에 우리에게는 인수대비라는 이름으로 친숙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하도 많이 등장한 까닭이다. (정식명칭인 소혜왕후는 연산군 때 받은 시호임)
     
     

    옛날옛적 드라마 <왕과 비>의 인수대비 / 고궁을 세트로 이용했던 마지막 드라마로 기억에 남는다. 이후로는 문화재청이 촬영을 불허해 각자 세트장을 지어야 해서 드라마 배경이 급 조악해졌다.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무덤인 서오릉 경릉
    왕후로 죽었기에 남편의 무덤보다 화려한 인수대비의 무덤

     
    아무튼 성종은 20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준비된 왕답게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리하여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편찬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으니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성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모도 잘생기고 키도 컸던 바,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180cm 이상이었다고 함) 여성들에게 인기도 좋았는데, 본인도 색을 밝혀 총 12명의 비빈(妃嬪)을 두고 16남 12녀를 생산했다. 유명한 폐비(廢妃) 윤씨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다.  
     
     

    성종 어필
    성종은 글씨 또한 명필이다.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어떻게 폐비가 되었는지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의외라는 것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르다는 뜻이다. 즉 야사를 반영한 어떤 드라마에서는 성종의 와이프 윤씨가 폐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은, 그리하여 결국은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 것은 왕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피를 낸 일이 단초이다. 그리고 용안 스크래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왕이 그녀의 몸종 일홍과 관계를 가졌던 까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전 윤씨는 자신의 생일날 성종이 자신의 처소를 찾아줄 것을 기대했으나 야심토록 왕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래서 나인에게 왕의 소재를 알아보게 하니 모처(某處)에서 일홍이라는 무수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윤씨로서는 눈이 돌아갈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모처에 쳐들어가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떠는데,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왕을 밀치는 과정에서 실수로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게 된다.
     
     

    드라마 속의 폐비 윤씨

     
    이것이 문제가 돼 윤씨는 사가(私家)로 내쫓기게 되는게, 여기에는 성종의 분노 + 평소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사이가 좋지 않던 관계 + 왕비 윤씨와 왕의 사랑을 다투던 소용 엄씨와 소용 정씨가 인수대비에게 늘어놓은 험담이 요인이 되었고, 결국은 사사(賜死)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폐비 윤씨가 죽기 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우리 아이(연산군)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 적삼으로써 어미의 원통함을 전해주고, 또 나를 건원릉 가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하여달라는"는 유언이었다.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한 자신의 적삼을 아들에게 전해주고, 임금이 1년에 한 번은 행차하는 태조 이성계의 무덤 가는 길에 묻어 성종과 함께 행차하는 자식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애절한 당부였다.
     
    이것은 야사인 <기묘록/己卯錄>에 실린 이야기이니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폐비 윤씨가 건원릉 가는 길에 묻힌 것은 사실이니, 건원릉이 있는 구리시 동구릉로에 살고 있는 나는 작년 지하철 8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폐비 윤씨 묻혔던 경의중앙선 회기역을 거의 매일 지나다녀야 했다. 지금은 고양시 서삼릉 내로 옮겨졌지만 본래 폐비 윤씨의 무덤이 있던 곳은 중랑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서, 회기동의 회기(回基)는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비슷한 글자로 바뀐 것이다.
     
     

    오래전 지하철 회기역에서 찍은 사진
    1969년 고양시 서삼릉 내로 이장된 회묘 / 아들 연산군이 왕릉급으로 무덤을 꾸몄다.

     
    이후 세자 연산군이 성종에 이어 조선 10대 임금이 되자 드디어 피바람이 분다. 전 국왕 성종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한 일에 대해서 엄한 함구령을 내렸던 바, 궁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폐비 윤씨의 이름을 꺼낼 수 없고, 연산군도 내내 어미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컸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는 그저 병으로 죽었다는 것 정도만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위 10년이 되는 1504년, 간신 임사홍이 연산군을 폐비 윤씨의 생모인 연산군의 외할머니와 만나게 하며 마침내 광란의 서막이 열린다. 야사인 <파수편/破睡篇>에는 이때 폐비 윤씨의 생모는 그간 몰래 보관하고 있던 윤씨가 죽을 때 토한 피가 묻은 흰 비단 적삼을 건네고, 이를 본 연산군은 피가 거꾸로 솟는다. 유명한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는 <파수편>을 참고한 듯한데, 아무튼 이 같은 내용으로 인해 연산군의 복수극은 정당성의 서사를 갖게 된다.
     
    그 피의 복수극이 바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때 연산군은 사사건건 자신을 반대하던 사림파를 숙청하고,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훈구파들도 숙청하여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이 화를 입고 이미 죽은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리고 그 복수의 칼은 인수대비에게 겨눠지니 칼을 빼어들고 대비전에 침입한 연산군은 제 할머니 인수대비를 내리치지는 못하지만 박치기로 세게 가격한다. 이후 얼마 못 가 인수대비는 숨을 거두는데, 정사인 <연산군일기>에는 인수대비가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인수대비가 죽은 창경궁 경춘전

     
    위 야사에는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 윤씨의 사가(私家)로 사약을 들고 간 자가 이세좌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 이 소식을 듣은 이세좌의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슬프다, 이제 우리 자손은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어찌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하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앞서 말한 대로 이세좌는 정말로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고 집안도 멸문지화를 당했다. 
     
    <명신록/名臣錄>에 따르면 원래 사약을 들고 가기로 정해진 자는 허종이었다. 폐비 윤씨가 살아생전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성종이 "나보다 더 큰 허종 이라는 신하도 있소"라고 답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정사에는 장신(長身)이라고만 돼 있을 뿐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1척 2촌(十一尺二寸)으로 기록돼 있는 바, 2m가 훨씬 넘는 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허종은 그 역할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야사와 양천허씨 문중에 전하는 형제에 관한 비화는 다음과 같다.
     
    당시 서촌 적선방에 그들 형제의 누이가 살고 있었다. 그 누이는 '백살 할머니'로 불릴 정도로 오래 살았고, 또 그만큼 지혜가 깊어, 똑똑하다는 허종·허침 형제도 어려운 일은 늘 누이에게 묻고는 했다. (형제는 훗날 모두 정승에 올랐다) 형제는 이번에도 지혜를 얻고자 누이의 집을 찾았다. 누이는 단박에 사태를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들의 어린 시절, 네 집 종이 우리 어머니를 죽이는 일에 관여했다 하면 너희가 그 종을 가만 놔두겠느냐?"
     
    형제는 모골이 송연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까? 어찌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백살 할머니가 담담히 되물었다. 
    "여기 오면서 다리를 건넜느냐?"
    "예. 건너기는 했습니다만....."
    "허면 갈 때는 그 다리에서 떨어지거라."
     
    형제 역시 단박에 그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다치면 회의에 불참할 명분을 얻게 되고 왕명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잘못되면 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형제는 그래서 다시 물었다. 
    "예? 그러다 죽게되면....?"
     
    백살 할머니의 대답은 이번에도 담담했다. 
    "그 높이에 죽기야 하겠느냐? 또 어차피 받아놓은 죽음이거늘 조금 일찍 죽는다고 뭐 그리 아쉽겠느냐? 적어도 네 자손들은 보존되지 않겠느냐?"  
     
    돌아가는 길, 형제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앞서 다리를 건너가던 허종이 정말로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동생 허침은 다친 형을 업고 돌아오느라 몸살이 나 입궁할 수 없게 되었다. 2m가 넘는 장신을 업고 왔으니 몸살이 날 만도 했다. 이로써 허종이 없을 경우 대신 사약을 들고 갈 뻔했던 허침 역시 고역(苦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바, 훗날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아래 적선동 종침교 터 표석에는 바로 이 이야기가 축약돼 쓰여 있다.  

     

    조선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 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 터.

     

     

    종로구 사직로8길 48의 종침교 터 표석

     
    조선시대 그 다리는 경복궁 왼쪽을 흘러내리는 백운동천 물과 내시부(내시의 일을 관장하는 간청) 앞을 흐르는 승전색(承傳色, 내시부의 다른 이름) 물이 합쳐지는 곳 아래에 있었는데, 이후 다리는 형제의 이름을 따 종침교가 되었다. 형제의 이름은 동네 이름으로도 쓰였으니 1894년 갑오개혁 때 종교동이라는 정식 동명으로 등재되었으나 일제시대에 내자동과 적선동으로 분할되며 사라졌다.
     
     

    김정호가 1834년 완성한 지도책 <청구도(靑邱圖)> 속의 '도성전도' / 가운데 종침교가 있으며 왼쪽으로 승전색교가 있다.
    종로구 사직로8길 34의 승전색교 표석
    일제강점기 복개되기 전의 백운동천 / 종침교와 승전색교는 1927년 이후 백운동천이 복개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사직로8길에서 본 인왕산 / 종침교에서 사직단까지의 사직로 8길은 백운동천을 복개해 만들어진 도로이다.

     
    종침교는 줄여서 종교(琮橋)라고도 불렸으며 그 흔적이 종로구 사직로8길 종침교 터 표석 근방에 위치한 종교교회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종교교회는 배화학당을 건립한 캠벨 선교사가 필운동 교내에 세운 채플이 기원으로, 120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교회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서 말한 자수교 근방 자교교회의 한자가 변한 것처럼 한자가 변해 옥홀 종(琮)이 아닌 마루 종(宗)을 쓰는데, 교회 앞 표석에 따르면 기독교 창조의 기원을 의미한다고 한다. 흔히 종교교회의 이름을 Religion의 종교로 오해하나 보다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종교교회
    종교교회 앞 표석 / 옥홀 종(琮)이 아닌 마루 종(宗) 자를 쓰는 이유가 적혀 있다.
    배화여고 내 캠벨 여사상
    캠벨 여사상과 기념비
    양화진 선교사 묘원의 캠벨 여사 묘

     
    참고로 허종(1434~1494년) 허침(1444~1505년) 형제는 조선시대 청백리 명단에도 올라 있다. 두 사람 모두 문과에 급제에 재상까지 오른 훌륭한 인품의 인물이었으며, 특히 허종은 문관이면서도 여진족을 정벌하는 임무를 맡아 수차례 북정(北征)에 나섰고, 1467년에는 함길도병마절도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문무겸전의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산 93-2 허종 후손 묘역 내의 허종 숭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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