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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산림청장 사이토 오토사쿠에 관한 진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7. 22. 19:41
오늘은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 1866~1936)라는 생소한 인물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활동한 일본 제국 국적의 산림 공무원이자 임업가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 정부의 초청으로 고빙된 이래 조선총독부의 초대 산림과장 및 영림창장(산림청장)을 지내며 조선의 산림 정책의 뼈대를 설계하고 지휘한 핵심 인물이다.
사이토는 1891년 도쿄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 산림국 등에서 근무하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기사(칙임관)로 고빙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그를 고빙한 이유는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조선 산의 황폐함은 현재도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이 말해준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삵(익호)'이 죽어가면서 그리워하던 곳이 고국의 '붉은 산'이다. 당시 조선은 산에 나무가 없어 흙의 붉은색이 도드라져던 바, 전체적으로 붉게 보였던 것이다.
당시 우리의 산하는 외국의 전문가를 고빙해야 할 정도로 황폐화가 심각했다. 그런데 조선의 산은 대체 왜 이렇게 황폐해졌을까? 그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책이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이다. 저자 전영우는 조선 숲의 황폐화는 적게 잡아도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 250여 년 동안 진행됐다고 말한다. 1611년 실록은 벌목으로 인해 도성 안팎의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한 책임을 한성부윤(서울시장)에게 묻고 있지만, 연료로써 오직 신탄(薪炭, 장작)만을 사용해 온 조선으로서는 숲의 황폐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에 이르러서는 헐벗은 서울의 산에서 쏟아져 내린 토사가 청계천의 하천 바닥을 높여 해마다 도성에 물 난리가 났던 바, 1760년 드디어 영조의 '경진준천'(庚辰濬川)이 이루어진다. 청계천 준설이 이루어진 1760년이 경진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준천 공사는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돼 4월 15일 끝났다. 그 57일간의 공사 기간에 동원된 인력은 무려 21만5000여명이며 3만5000냥의 준설 비용과 쌀 2300여석이 함바 식량으로 소요됐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청계천 광통교 교각의 '경진지평' 표석 / 경신년에 땅을 평평하게 했다는 뜻이다. 
경진준천 후 이 글자가 토사에 묻히면 바로 준설에 들어갔다고 한다. 
청계천 오간수문 부근의 '수문상친림관역도' 벽화 / 영조가 가장 난공사 구간이었다는 오간수문 현장에 행차해 공사를 친견하고 독려하는 모습을 담았다. 임금이 앉는 어좌에 일산(日傘)을 받친 신하가 보이나 임금은 관례상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계천만을 준설했을 뿐 근본적인 조림산업에는 힘이 미치지 못했으니 산은 점점 황폐해졌는데,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가와 17세기의 소빙기(小氷期)를 거치며 헐벗음이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한일합방의 해인 1910년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산림조사에 따르면 당시의 전체 산림 면적 가운데 1/3이 채 안 되는 32.3%만이 숲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 나머지는 관목(灌木, 키가 작고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며 밑동에서 가지를 많이 치는 나무)으로 구성된 숲이거나(41.8%), 아예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25.9%).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남부 지방의 산림 황폐화는 극심해서 대부분의 산이 '붉은 산'이었다.
당시 홋카이도청 임업과장 겸 임업시험장장이던 사이토 오토사쿠는 1909년 조선의 산을 푸르게 만들어 달라는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고 조선 땅으로 건너왔다. 이후 농상공부의 칙임관으로 임명된 사이토는 우선 성장이 빠른 사방수종을 한반도에 최초로 대량 도입하여 심었으니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아카시아)와 포플러(미루나무) 등이었다.
아울러 '신무천황 제사일'인 4월 3일을 식수일(植樹日)로 삼아 민·관이 모두 산에 나무를 심게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장이 된 후 전국적으로 추진한 식수일은 조선인들에게 식수의 고마움을 심어주고 일제의 무단 통치를 문화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정략적 목적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찌 됐든 그것이 해방 후 4월 5일 식목일이 되었다.

사이토가 1910년 식수일에 순종황제로 하여금 제기동 선농단에 식수하게 하였다는 일본산 금송(金松)은 해방 후 뽑혀 남아 있지 않다. 
일제가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선농단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위해 세웠다는 '청량대(淸凉臺)' 표석 역시 쓰러져 땅에 묻혔다가 2013년 유적 정비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바닥에 눕혀 전시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조선 땅에 맞는 수종을 개발하고 식수에 노력하였으니, 산림과 직원 아사카와 타쿠미(淺天巧, 1891~1931)가 개발한 '조선오엽송 노천매장 발아촉진법'과 조선오엽송 식수는 그 대표적 사례로서, 이 나무들 역시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수종이다. 아사카와 타쿠미의 남다른 조선 사랑에 대해서는 앞서 '한국을 사랑한 이방인들 -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힌 아사카와 타쿠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조선오엽송(섬잣나무) / 산림조합중앙회 사진 
27살 무렵 조선 자기와 함께 찍은 아사카와 타쿠미의 사진 

망우역사문화공원의 아사카와 타쿠미 묘 사이토 오토사쿠는 조선총독부 영림창장(산림청장)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퇴임 후에는 '사이토 임업사무소'를 세워 산림위탁경영 사업을 운영하며 일본 자본을 조선 임업계에 유치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경기도에 대한 임업 투자를 촉진할 목적으로 <조선 임업 투자의 유망>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듯 시종 임업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1936년 조선 땅에서 죽었다.
사후 망우리 묘지에 묻혔으며, 칙임관(차관; 국장급 관료) 이상으로서 한국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묘는 봉분 없이 묘석 아래 화장한 유골을 묻는 전형적인 일본식 묘제로, 현 7,400기의 무덤 중 유일하다. 묘석 뒤에는 그가 사망한 해인 1936년을 뜻하는 '쇼와(昭和) 11년 6월 28일 소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사이토 오토사쿠 묘 
안내문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하지만 사이토 오토사쿠는 평생의 노력이 무색하게 해방 후에는 식민지 수탈의 지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조선의 토지와 임야를 조사·정리하여 민간의 땅을 총독부 소유의 국유림으로 편입시킨 조선 임야 수탈의 기획자라는 비판이었다. 토지와 임야 조사과정에서 유휴지이거나 주인이 불분명한 땅을 총독부 소유의 땅으로 편입시켰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유지가 되었다.
사이토는 당대 일본인으로는 드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청년회클럽 회원, 일본기독교 장로, 경성기독교청년회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사이토는 '무교회주의'를 제창한 일본 기독교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와 친구였으며,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을 받은 김교신의 제자 유달영, 유달영의 제자 이경숙 등이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사이토와 아사카와 다쿠미 묘지 가까운 곳에 묻혀 있다.
사이토 오토사쿠 묘의 총탄 자국은 6.25전쟁 때의 것이지만 고의 훼손의 흔적도 보인다. 1970년대 사이토의 유족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찾았으나 당시 묘지의 엄청난 규모와 관리 부실로 인한 관목 생성 등의 물리적 한계로 찾지 못하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아사카와 타쿠미의 추모식과 겸해 사이토 추모식도 열리는 듯하다.


사이토와 아사카와 다쿠미 묘를 찾은 사람들 / 연합뉴스 DB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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