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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혜화동 무장 탈영병 사건과 안규백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7. 18. 19:53
1993년 4월 19일 낮, 서울 도심인 혜화동과 명륜동 일대가 지옥으로 변했다. 그날 새벽 강원도 철원군의 한 부대에서 K-1소총 한 점과 실탄 103발, 수류탄 22발을 가지고 탈영한 임채성(20) 일병이 마구잡이로 총기를 난사하고 인질극을 벌이며 군경과 대치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오토바이틀 타고 지나가던 고성주씨(51)가 임채성의 총에 맞아 숨지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은 당일 새벽 3시 40분, 이른바 '관심 병사'였던 임채성 일병이 부대 생활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훔쳐 탈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탈영한 임채성은 걸어 철원군 군남면에 도착했고, 남연우씨 집에 들어가 남씨 부부를 총으로 위협해 제압했다. 이어 남씨의 체육복과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남씨에게 그의 봉고차를 운전시켜 서울로 향했다. 그 봉고차는 서울에 집입하기까지 7곳의 검문소를 거쳤으나 형식적인 검문이라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탈영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그러할 만도 했다.
임채성은 이렇게 서울로 잠입하였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으로 이후 봉고차는 서울 창신동 이스턴 호텔 주차장에 주차했다. 임채성이 호텔 주차장에 들어선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잠시 쉬기 위함이었는데, 그쯤에서는 서울 지역 군·경에도 체포 명령이 내려졌던 바, 멀리서 사인렌 소리가 들려오자 차를 움직여 원남동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때가 오전 11시경이었다.
오전 11시 35분, 혜화동에 도착한 임채성 일행은 동성고등학교 앞길에서 처음으로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첫 검문자는 혜화파출소 조규남 순경으로 그 짧은 순간,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연우씨가 문을 열고 냅다 달아냈다. 당황한 임채성은 K-1소총을 마구 발사해 비무장이었거나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리볼버 권총을 들었을 조 순경을 제압하고 수류탄을 챙겨 길 건너 명륜동 쪽으로 뛰어 도망쳤다. 그는 이때 수류탄도 던졌으나 불을 내는 소이수류탄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임채성은 지금의 명륜동 성균관로 58길쯤에서 길을 가던 김순애(37)씨를 붙잡아 다시 인질로 삼은 뒤에 마구잡이로 총기를 난사해 부근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던 김성식(40)씨 외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어 명륜 8길 쪽으로 달아나던 임채성은 3차례나 총기를 더 난사해 오토바이를 타고가던 배달 가던 야채상 고성주(51)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40살 여성 김선기씨가 무릎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때는 이미 군경이 총출동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임채성은 길을 지나가던 부녀자 1명을 어린이 2명을 인질로 잡고 군인들과 대치하다 총기를 난사해서 인질 김씨 등 4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군인들과의 총격전을 벌였다. 임채성은 주변의 민가 대문을 발로 마구 차며 문을 열라고 외쳤으나 문이 열리지 않자 안을 향해 수류탄을 던져 폭발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다리와 하복부에 총을 맞은 임채성이 고꾸라졌다. 하지만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최초 검문이 있었던 동성고 앞길 
군인과의 총격적인 벌어진 성균관로 / 오른쪽 자동차 들어가는 골목이 임채성이 달아나 대치한 곳이다. 
임채성이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된 골목 /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당시의 필름 모음 
총을 맞고 쓰러진 임채성 
임채성의 K-1 소총 중상을 입은 임채성은 서울 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저녁 국군 수도통합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임채성은 1993년 11월 2일 제15사단 보통군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마땅하지만 소년법 제2조 소정의 소년(당시에는 만 19세까지가 촉법소년이었다)이므로 작량감경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군검찰과 임채성 모두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했지만 고등군사법원은 양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임채성은 이후 20년을 복역한 뒤 2013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러다 다시 10년 후인 2023년 채팅으로 만난 여성을 성매매에 이용할 목적으로 협박해 알몸 사진촬영했다가 기소되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되었으나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의 사유는 피해자와 합의했고 공탁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현재 나이는 54~55세이며 아직 죽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
전후로도 무장 탈영병 사건은 심심찮게 일어났지만 혜화동 무장 탈영병처럼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없었다. 도심에서 총격적이 벌어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견해로는 2026년 발생한 탈영병 안규백의 국민 기만 및 군 분탕질 사건은 혜화동 무장 탈영병 사건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이미 여러 사람이 그의 병적 자료를 확인했고 나아가 그의 병적 자료에는 1985년 30일 구금 기록과 '기소유예' 사실이 기재돼 있다고 하는 바, 이제 의혹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안규백의 국방장관 지명 전 청와대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했고, 지명 2주 전에는 민주당 관계자가 "안규백의 병적 자료에 '구금(30일)이 기재돼 있는데 구체적인 사유는 기재돼 있지 않다. 1985년 당시 방위병이 어떤 경우에 구금 30일 처분이 되는가?"라고 군 전문가인 김영수 예비역 소령에게 물어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증언 등을 미루어 볼 때 청와대 인사검증팀에서도 방위병 안규백의 탈영 사실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규백은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에 청문회에서 그의 불분명한 병적 관계(특히 복무기간 14개월인 방위가 22개월을 근무한 이유)에 대한 질의가 쏟아졌고, 이때 안규백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소속 부대 중대장의 부탁으로 군인들에게 점심(식사 수혜)을 제공했다'는 투서가 접수되어 서너 차례 불려 가 조사를 받았는데, 부대 측의 행정 착오로 이 조사 기간이 공식 복무 기간에서 제외되었다"는 등의 해괴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야당 의원들이 요구하는 병적기록부 제출을 끝내 거부했다.
대신 그는 "저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살았습니다"라고 발언했다. 그의 병적기록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때 이미 그의 군무이탈 사실을 확신했다. 세상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산 자가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에.... 윤동주 시인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겠지만.... 아무튼 안규백이 이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일 듯하니, 지금은 하마평이 무성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의 사직으로 끝날 일이 결코 아니니, 대통령이 왜 탈영병 안규백을 부득불 국방장관에 임명했나 하는 문제가 풀어져야 되리라 본다.


이영돈 PD에 주장에 따르면 방위병 안규백은 아직도 탈영 상태이다. 

이와 함께, 이런 자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해야 한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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