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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언덕이 있는 동네 용산구 청파동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7. 11. 23:42

     
    대구에 청라언덕이 있다면 서울에는 청파동(靑坡洞)이 있다. 청파동은 문자 그대로 푸른 언덕이 있는 동네이다. 그 푸른 언덕에 왜인들이 집을 지은 까닭에 지금은 주택가가 되었지만 대신 당시의 풍경이 남게 됐다. 청파동이 왜인 선호지역이 된 것은 인근에 용산 일본군기지가 존재했기 때문인데, 어떤 직접적 관계보다는 주변에 자국의 군부대가 있어 자신들을 지켜줄 곳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을 듯하다. 용산역과 남대문역(현 서울역)이 지척이라는 현실적 요인도 물론 작용했다. 
     
    청파동을 가려면 통상 숙대입구 역에 내려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게 된다. 하지만 예전에는 갈월동 쌍굴다리와 청파동 굴다리를 지났다. 이 다리들은 모두 만초천(蔓草川)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만초천은 서대문구 현저동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서대문 사거리, 서울역, 서부역, 청파로, 원효로를 따라 원효대교 지점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로서, 옛날 이 냇가에 만초(덩굴이 무성한 풀)가 무성하였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 속의 만초천 물길 & 갈월동 쌍굴다리와 굴다리(○)
    갈월동 지하차도
    갈월동 쌍굴다리 / 위로 경부선 열차가 지나간다.
    갈월동 쌍굴다리를 지나면 곧바로 청파로를 마주한다.
    쌍굴다리 옆 골목 풍경이다.
    왠지 긴장감이 묻어난다.
    이런 데도 있다.

     
    초천은 1960년대까지도 서울 서쪽을 가로질러 흐르던 큰 하천이나 1967년 이후 복개가 시작되어 지금은 물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지하로 흐르는 만초천도  옛 물줄기와는 다른데 1925년의 '을축 대홍수' 이후 구부러진 만초천을 직강화(直江化)하며 굴다리 서쪽 청파로 쪽으로 물줄기가 바뀌었다. 을축년 '을축 대홍수'가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아래 사진이 여실히 증명한다. 
     
     

    을축 대홍수 때 물에 잠긴 용산 철도관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사람들 / 오른쪽 건물이 용산우체국이다.
    지금의 서울용산우체국 / 같은 위치에 지어졌다.
    청파로 하수관거 / 복개된 만초천의 냄새와 가스를 빼내기 위한 시설이다. 만초천이 청파로 쪽으로 물둘기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갈월동 지하차도가 보인다.
    청파로 길 건너에 위치한 카페 만천재(蔓川齋)가 만초천을 추억한다. / 주인장의 내공이 느껴진다.
    만천재 바로 왼쪽에 위치한 적산건물
    만천재로부터 1분 거리에 있는 전통의 고기집 '청파 쌍대포 소금구이'
    '쌍대포 소금구이' 옆 골목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옛 창고건물

     
    조선 전기의 문인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 '청파석교기'(靑坡石橋記)에는 연산군 시절 이곳에 처음으로 돌다리가 놓였다고 기록돼 있다. 표석에도 조선시대 돌다리 터라고 쓰여 있는데 그러면서도 '청파 배다리 터'라고 표시된 이유는 정조임금이 화성 능행길에 이곳에 배다리를 놓아 하천을 건넜기 때문이다. 작은 돌다리가 그 많은 인원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을 터.... 수원을 숭례문을 나와 만초천을 건넌 정조 일행은 용산강(한강)으로 가 다시 노량진까지의 긴 배다리를 설치했다. (☞ '정조가 설계한 배다리와 용양봉저정')

     

     

    <수선전도> 속의 만초천과 청파 배다리(●)
    '청파 배다리 터' 표석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건물 바로 앞에 있다.
    1936년 <경성부사>에 실린 청파 배다리와 만초천
    청파 배다리가 있던 곳 / 이곳 청파로로 만초천이 흘렀다.


    고려 때에도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의 만초천은 꽤 아름다웠던 듯, 고려 말의 학자 이색(李穡 , 1328~1396)은 만초천에서 불을 밝혀 민물 게잡이를 하는 풍경을 '만천해화'(蔓川蟹火)라 이름 짓고 남경팔경(南京八景) 중의 하나로 꼽았다. 그 아름다운 내(川)와 어우러지는 푸른 언덕을 일본인들이 거주지로 선호했음은 당연지사일 터, 실상인즉 이와
    같은 풍광이 일제강점기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이 남겨놓고 간 집들을 '적(敵)들의 재산'이라는 뜻의 적산가옥이라고 불렸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청파동의 적산가옥이 꽤 많았는데, 아니 거의가 적산가옥이었는데, 지금은 자체 재개발로 연립주택이 건립되며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왜인들이 필지를 구획하며 만들어진 골목길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옥은 사라져도 길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니, 오늘 그 좁은 길을 걸으며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중간에 만난 어르신들에게 예전 여기에 이러이러한 집이 있지 않았나 물어보곤 하였지만, 집이 오래전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기억이 사라진 것인지,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어쩌면 주택들이 하도 많이 짓고 없어지며 비슷비슷한 시간이 중첩되어 흐른 탓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래의 청파동 골목 사진들이 그에 대한 답을 뭉퉁그려 답하는 듯하다.  

     

     

    위 창고건물에서 조금 위로 올라오면 이와 같은 풍경을 만난다. 가운데 집이 지어지며 양쪽으로 골목이 만들어졌다.
    길이 이렇게도 나뉜다.
    골목길에서 만난 전망 좋은 집
    뒤를 돌아 보니 골목 바깥으로 청파로가 보인다.
    이와 같은 시간의 중첩성도 발견된다.
    위 건물의 안쪽 길
    그 길 꼭대기의 청파동 망루 같은 집
    이 골목 집은 한옥과 중국양식이 어우러졌다.
    단순미가 돋보이는 집도 있다.
    통일교 구(舊)본부교회 / 지금은 청파동 가정교회라 불린다. 통일교의 태동과 궤를 같이 하는 교회로, 2019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바로 옆에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건물이 있다. / 1946년 개성에서 창설된 한국 최초의 한국인 자생 천주교 여자 수도회이다.
    코바코 초밥집은 적산건물을 효율적으로 리모델링한 케이스다.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어로 '설탕'을 뜻한다.
    다시 시간이 중첩된 골목에 들어섰다가
    레지던스 건물이 보이는 숙대 앞으로 나왔다.
    숙대 앞 청파로 45길에서는 가운데 명물 꽈배기집으로 인해 다시 길이 좌우로 나뉜다. 이 길은 마치 일본의 근대거리에 온 것 같다.
    그 중 오른쪽 길을 택했다.
    중간에 만난 또 다른 갈림길
    큰 길을 택해 내려 가니 청파동 굴다리가 나왔다.
    이 굴다리 터널을 지나가면 동화세계를 넘어 다시 현실에 이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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