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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빙고의 역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7. 4. 23:24

     

    최근 용산역사박물관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실내 전시장에 재현된 서빙고에서 언뜻 추위를 느꼈던 것이다. 이곳이 박물관이니만큼 실내 온도는 요즘 낮의 평균 체감온도인 31˚C를 밑돌 터인데, 서빙고 내의 온도를 실내 온도보다 더 낮춰 냉기를 체험하게 만든 것이다. 앞서 '타임머신 열차를 타고 가는 둔지미 과거로의 여행'에서도 언급 바 있지만, 개인적 시각으로 큐레이팅이 뛰어난 박물관이라고 생각한다. 차제에 용산역사박물관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용산역사박물관은 대한민국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던 용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지역사 박물관으로, 1928년에 건립된 옛 용산철도병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어졌다. 용산철도병원은 1907년 용산동인병원으로 개원한 이래 줄곧 철도 관련 병원으로 사용되다 1984년부터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이 됐다. 이후 2008년 용산철도병원 본관이 국가등록문화재(제428호)가 됐고 이 건물을 노베이션해 2023년 3월 용산역사박물관이 개관했다. 

     

     

    용산역사박물관 개관 푸스터
    지금은 '스윗 용산'이라는 이름의 용산 제과공장에 관한 기획 전시가 진행 중이다.
    나카오카 제과에 관한 전시물 / 용산은 나카오카 제과를 비롯한 많은 제과공장이 들어서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것질거리를 제공했다.
    그 과자들은 용산의 군대와 함께 경의선을 타고 만주로 이송됐는데, 지금도 오리온제과 공장을 비롯한 당시의 시설들을 볼 수 있다.

     

    서빙고는 서쪽에 있는 빙고(氷庫, 얼음창고)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다. 채취는 음력 12월과 1월 중 지금은 사라진 한강변의 저자도 근처에서 행해졌다. 동호대교에서 응봉동 방면으로 있던 큰 섬이다. 이곳 한강에서 떼어낸 얼음의 표준 크기는 길이 45cm, 너비 30cm, 두께 21cm로 무게는 약 5관(18.75kg)이었다. 이 5관 한 덩이를 1정(丁)이라는 단위로 불렀는데, 조선후기 서울 4개 빙고에 저장한 얼음이 대략 20만 정 정도로 무게로는 3,750톤이다.

     

     

    일제강점기 서울 노량진의 채빙(採氷) 광경
    노들섬 한강 결빙 관측지점 / 1906년부터 한강 결빙의 기준점이 된 곳이다. 이곳이 완전 결빙하면 한강이 얼었다는 일기예보를 내보낸다.

     

    저자도에서 채취된 얼음은 부근의 동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궁궐 내 2곳의 내빙고(內氷庫)에 보관됐다. 국초(國初)인 1396년에 만들어진 서빙고는 동빙고의 2배, 내빙고의 3배에 이르는 크기였다 하는데, 서빙고에는 139,947장의 얼음이 재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동빙고와 서빙고는 남아 있는 유구가 전혀 없어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용산역사박물관의 서빙고는 경상북도 청도군에 유구가 전하는 청도 석빙고 등을 참고해 재현한 것이다. 

     

     

    용산역사박물관에 재현된 서빙고
    서빙고 내에 재현된 얼음
    빙고의 실무책임자 빙고별제(종6품)의 교지

     

    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여름에 이르면 대개 3분의 2 정도는 녹았던 바, 나머지 3분의 1이 사용되었다. 그래도 1,250톤에 이른다. 그런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왜 이렇게 많은 얼음을 필요로 했을까? 음식물이 상하지 않게 하는 용도였을까? 물론 그런 용도도 있었을 것이니, 과거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에서 쫓기던 최상궁이 덜덜 떨며 숨어 있던 곳이 아마도 궁궐 내의 내빙고였을 것이다. 수라간을 총괄하는 최고상궁의 은신처로는 더없이 적합한 좋은 곳이었을 터인데, 아무튼 작가의 상상력이 보통이 아니다.

     

     

    생각이 잘 안 나시는 분을 위한 사진 / 탤런트 견미리 씨로 과거 옥수동 시절 옆집 사셨던 분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얼음의 주된 용도는 죽은 왕과 왕비 시신의 부패 방지용이었다. 누구에게든 죽음은 예고가 있는 것이 아니니 언제 닥칠지 모를 왕이나 왕비의 죽음에 대비했야 했음이다. 왕이 붕어했을 경우 시신은 빈전에 약 5개월 동안 보관되며 그동안 장지 등이 마련된다. 계절을 막론하고 5개월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기간 동안 관(棺)에는 얼음이 지속적으로 채워지며 부패를 막았고, 얼음 녹은 물은 배수시설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2005년 복원된 경복궁 태원전 / 왕과 왕비의 시신이 보관되는 곳으로 과거 30경비단 자리에 있었다. 30경비단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처럼 신군부의 12.12쿠데타 모의가 있었던 곳이다.
    12.12쿠데타 지휘처였던 경복궁 30경비단 본부건물 / 중앙일보 DB
    지난 6월 7일 선거 부정에 항의해 청와대 입구까지 진출한 시위대 / 오른쪽 담장 너머가 태원전 영역으로 이곳에 30경비단이 주둔했다.
    청와대 앞길을 막아선 경찰 / 나름 역사적인 사진이다.

     
    빙고의 얼음은 비단 장례에만 쓰이지 않았으니 한여름에는 종친과 문무백관, 환자, 때로는 죄수들에게까지 얼음이 지급됐다. 말하자면 납량(納凉) 특집이다. 여름철 임금의 하사품인 얼음은 지급에 관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특별한 물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얼음은 왕의 종친, 문무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관료에게 반드시 일정량이 배급되어야 했다. 이들에게는 서빙고에서 얼음을 받아 갈 수 있는 빙표(氷票)가 지급됐다.
     
    받는 사람이야 좋았겠지만 한겨울에 얼음을 채취하는 사람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일은 두뭇개(현재 성동구 옥수동)와 저자도에 살던 백성들에게 부역 대신 맡겨졌는데, 이를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했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 찬바람 속 얼음 위에 서서 문자 그대로 얼음장 같은 물에 손발을 적시며 얼음덩이를 자르고 떼어낸 후 그것을 빙고까지 나르는 일은 고역 중에서도 최고 고역이었을 터,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얼어 죽느니 차라리 도망가자는 심사였을 듯하다. 
     
    그래서 <세종실록>에는 장빙꾼(藏氷裙)을 위로하기 위해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세조 때도 그와 같은 하사의 기록이 보이나 후대에는 그나마 지켜지지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서 생선과 고기 등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사빙(私氷)이 늘어 장빙꾼은 오히려 겨울철 부업으로 자리했다 하는데, 예전 동네 얼음가게에서 톱으로 얼음을 썰어 팔던 상인들이 장빙꾼의 후예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한강의 얼음이 아닌 제빙공장의 얼음을 썼다) 

     

     

    장빙역을 위한 술통 / 용산역사박물관
    1982년 동아일보에 실린 얼음 배달 리어카


    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은 서빙고의 위치성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진 경우로 해방 후 이곳에 있던 미군 기지 역시 '캠프 서빙고'로 불려졌다. 캠프 서빙고는 2020년 12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 반환되었고 그중 장교숙소 5단지가 일반 개방되었다. 장교숙소 5단지는 1986년 대한주택공사(현 LH)가 주거용 빌라를 지어 미군에게 임대했는데, 미국풍으로 지은 데다 조경에도 신경을 써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캠프 서빙고 장교숙소 5단지
    캠프 서빙고 입구의 장교숙소 안내문
    서빙고 역에서 바라본 장교숙소 5단지

     

    장교숙소 길건너에 위치한 카페  I got every thing 앞에는 옛 서빙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강중학교 방면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면 5공시절 '빙고호텔'로 불리며 악명이 높았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이 있던 곳이 나온다. 당시는 나무 숲에 둘러싸여 어떤 위치에서도 은폐돼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던 콘크리트 2층 건물이었다. 지금은 서빙고대원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단지 입구의 인도에 '빙고호텔 터' 동판이 붙어 있다.

     

     

    '서빙고 터' 표석
    보안사 서빙고분실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2015년 서울시가 입구에 '서울시 인권현장 바닥동판'을 매립했다.

     

    동판에는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 분실 자리"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단지 안 화단에는 또다른 표지가 있는데, '서빙고 수사분실 터'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장소는 조선 건국 초기인 1396년부터 얼음창고(西氷庫)였던 곳으로서 인조 13년(1635)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영정을 모신 제당(符君堂)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치하인 1910년경부터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후인 1957년 9월 1일부터 특무부대 공작분실로 개편, 1971년 보안사 수사분실로 개칭하여 사용하다 1990년 11월 폐쇄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수많은 방첩인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터로서 그 의미를 새기고자 표지석을 세운다. 2008년 7월 16일"

     

     

    아파트 단지 내의 '서빙고 수사분실 터' 표석

     

    같은 안내문인지만 표현은 아주 다르다. 동판에는 서빙고 분실에서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이 주인공인 반면, 표석의 주인공은 서빙고 분실에서 일한 방첩인들이다. 내용이 상충하는 이유는 그것을 세운 주체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니, 동판은 박원순 시장 재직 당시인 2015년 추진된「인권현장 표석화 사업(인권 서울 기억)」의 일환으로써 부착된 것이다. 즉 서울시가 민주화 운동과 인권 탄압의 역사적 장소를 보존하기 위해 보도블록 바닥에 부착한 황동 표지 중의 하나인 것이다.

     

    반면, 단지 내 화단의 표석은 서빙고 분실이 1990년 10월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의 여파로 폐쇄된 후 오랫동안 기무사의 소유로 방치되다가 2004년 기무사 요원들을 위한 군인 아파트가 들어서며 세워졌다. 그것이 지금의 서빙고대원아파트이니 그곳 아파트 단지 내에 세워진 표석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일한 수많은 방첩인들'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빙고대원아파트는 이후 각 아파트의 소유주가 여러번 바뀌며 지금은 일반인들이 사는 아파트가 되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유일한 사진

     

    지척에는 또 서빙고 역이 있다. 서빙고 역의 역사는 장구하니 1917년 10월 서울~원산을 잇은 경원선의 보통역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경의·중앙선 전철역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서빙고 역에는 1954년 지어진 212㎡ 규모의 벽돌조 기와 건물의 역사(驛舍)가 현 역사의 완공 후에도 20여 년간 사무 용도의 부대시설로 사용되며 향수를 자극했으나 2010년 5월 결국 철거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서빙고 역은 번잡스럽지 않은 시골역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예전에는 청량리 방면으로 서빙고 역에 진입하기 직전에 선로가 미군기지 쪽으로 분기(分岐)돼 갈라져 미군 보급 전용 선로로 사용되었는데, 지형이 변해서인지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음 번에 여유 있을 때 근방의 서빙고 부군당과 함께 다시 찾아볼 예정이다. 서빙고 부군당은 앞서 소개한 동빙고 부군당과 마찬가지로 용산 특유의 마을 신당이다.  

     

     

    2010년까지 존속했던 서빙고 역사
    지금의 서빙고 역사 / 2번 출구 쪽 사진이다.
    경의·중앙선 선로
    용산구 동빙고동의 동빙고 부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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