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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교 이광사가 살았던 서울에서 가장 시원한 동네 냉천동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8. 5. 22:13

     
    서울에서 가장 늦게 눈이 녹는 곳, 공포영화 '소름'의 촬영장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민아파트…. 16일 서대문구 냉천동 14의9. 30여 분간 꼬불꼬불한 금화산 길을 따라 올라가자 산꼭대기에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 초라한 아파트 2개 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40년째 자리를 지킨 짤막한 5층 아파트는 주변 신식 아파트들과 달리 세월의 켜를 고스란히 간직했다. 해발 200m의 아파트 초입은 찌는 더위에도 서늘할 정도로 시원했다.
     
    2009년 7월 <서울신문>의 한 기자가 서대문구 냉천동 금화시민아파트를 주목해 쓴 이 기사는 다분히 중의적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도 요즘과 같은 무더위였던 듯한데, 그럼에도 냉천동 초입이 서늘할 정도로 시원했던 이유는 그곳이 해발 200m의 고도(高度)이기도 했지만, 그 고도에 지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아파트(1969년 건립)가 2007년 7월 안전진단에서 붕괴 위험 수준인 'E급' 판정을 받아 실제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금화산 산중턱의 금화시민아파트 / 2015년 최종 철거됐다.
    최후까지 남았던 금화시민아파트 2개 동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의 금화산 달동네 / 당시 서울시장이던 김현옥 시장이 1968년 이곳을 싹 밀어내고 최초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했다.
    2015년 나머지 아파트 2개동이 철거된후 공원으로 조성됐고 일부는 '천연뜨란채아파트' 등으로 재건축되었다. 주소는 서대문구 독립문로8길 159(지번: 충정로 2가)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동네는 실제로도 서늘했을 것 같다. 마을 곳곳에서 찬 우물이 솟았기 때문이니 조선시대 이 일대는 무악산 수맥을 따라 맑고 찬 약수와 샘물이 솟아 나와 '찬 우물골' 또는 '냉동(冷洞)'이라 불렸다. 그것이 광복 이후 지금의 냉천동(冷泉洞)으로 이름을 바뀐 것인데 동명(洞名)에서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금은 도시화와 더불어 그 냉천(冷泉)들이 모두 사라져 옛 우물의 원형이나 정확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현재 경기대학교 캠퍼스 북쪽 냉천동 74번지(옛 지번 기준)가 냉정(冷井) 쌍우물 자리라고 전해진다. 이곳 우물은 물맛이 특히 좋고 얼음처럼 차가워 유명했는데 1930년대 지면을 더 깊게 파고 철관을 묻어 길가로 물을 끌어내 위쪽 우물은 식수로 쓰고 아래쪽은 빨래터로 쓰면서 '쌍우물'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냉정( 冷井) 쌍우물 자리로 여겨지는 곳
    쌍우물 자리에서 바라본 서울

     

    이 금화산은 예전에는 '둥그재' 혹은 원교산(圓嶠山)이라 불렸다. 완만한 둥근 형태의 고개라고 해서 그렇게 불려진 것으로,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이곳 지명을 따 자신의 호를 붙였다. 그는 33살 때인 1737년(영조 13) 이곳으로 이사 와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와 벗하며 지냈는데, 이광사가 지은 <내도재기/來道齋記>에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이 전한다.

     

    김광수는 증조부 김우석이 도승지와 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조부 김연은 예조판서와 호조판서, 아버지 김동필은 이조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나 본인은 잠시 지방관을 지낸 것 외에는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골동ㆍ서화 수집과 감상에 몰두하며 생을 보냈다. 이에 냉천동 그의 집에는 종정(鐘鼎, 옛 청동기)과 고비(古碑)의 탁본이 그득했고 또 기이한 책이 많았다. 이광사 역시 그 쪽에 조예가 깊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을 터, 두 사람은 자주 모여 동호(同好)의 취미를 즐겼다. 

     

     

    <서결> / 이광사가 지은 서예이론서로, 김광수의 소장품으로부터 안목을 얻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유배지인 전라도 신지도로 들어온 지 2년 후인 1764년 6월 완성했다.

     

    부르는 쪽은 언제나 김광수 쪽이었으니 위에서 말한 <내도재기/來道齋記>에 자세하다. <내도재기> 자체가 '도보(道甫, 이광사의 자)를 오게 하는 집에 관한 이야기'란 뜻이니 만큼 이러저러한 얘기가 넘쳐 나는데, 두 사람은 날이 저물도록 서로 떠들고, 때로는 며칠을 함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고도, 돌아가자마자 또 생각나 다시 불려지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이광사는 김광수의 초대를 마다한 적이 없었으니 서로 간에 통하는 도(道)가 있지 않았나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성중(成仲,김광수의 자)은 세상에 달리 벗이 없고 오직 나 한 사람과 친하다. 나 역시 친구가 없고 오로지 성중과 친할 뿐이다. 사람들이 서로 친한 까닭은 추구하는 바와 취미가 들어맞는 대로 모이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 둘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인데도 유독 친하니 이는 실로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다.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성중에게 물어보니 성중도 그 까닭을 몰랐다. 성중이 나에게 되물었지만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나와 성중이 알지 못하니, 세상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나와 성중과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아마도 그 밑바탕에 깊이 일치하여 바래지 않는 도(道)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成仲無友於世, 獨善余一人, 余亦無友, 顧獨與成仲善. 凡人之所以相善, 必趨其氣尙酸鹹之相契者, 而今乃以相反而獨善者焉, 實理之外也. 余疑之而問於成仲, 成仲不知, 成仲復問於余, 余亦不知. 余與成仲旣不得以知之, 則世之人孰得以知之? 余與成仲與世之人之所不得以知者, 或乃所以爲深契而不渝之道歟. <圓嶠集選ㆍ來道齋記>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걸린 서울 봉원사 대웅전 / 오른쪽 대방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청나라 스승  옹방강의 친필 글씨를 볼 수 있다.

     

    이광사는 이와 같은 고상한 삶을 영위하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나이 51세 때인 1755년 이후 이광사의 생은 꼬이기 시작하였다. 나주에서 귀양살이하던 소론 윤지가 나주 객사에 괘서(掛書)를 붙여 영조를 비난하는 나주괘서사건이 발단이었으니, 평소 윤지와 서신을 주고 받던 이광사에까지 화가 미쳤다. 가장 먼저 일어나 비극은 이광사가 의금부에 하옥된 후, 부인 류씨가 남편이 사사되었다는 오보를 전해 듣고 마흔둘의 나이로 자결한 일이었다.

     

    사실 이광사는 빠져나오기가 힘든 지경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종친인 이광사를 처형하지 않고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부령 유배지에서 이광사의 명성을 듣고 선비들이 모여들자, 조정에서는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762년 전라도 진도로 2차 유배를 보냈고, 다시 완도 신지도로 배소가 옮겨졌다. 그는 결국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1777년 일흔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광사의 초상 / 화공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이 신지도 유배지에 찾아가 70세의 이광사를 그렸다는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명사십리 해변으로 유명한 완도군 신지도
    이광사가 유배 생활을 한 신지도 고택 / 연합뉴스 DB
    또다른 냉정(冷井)을 찾아 접어든 서대문 냉천동 골목
    골목에서 발견한 사람이 살지 않는 적산가옥
    카페로 쓰였던 듯하다.
    파손은 되었지만 그래도 외형이 보존된 안채
    이 부근에 냉정이 있었다고 한다.
    옛 분위기 물씬한 골목
    왜식 축성법이 뚜렷한 축대도 볼 수 있다.
    이 오래된 건물도 주인이 떠났다.
    복사·제본업체로 변모한 경기대 앞 도로의 적산가옥
    도로에서 보이는 골목 끝의 클래식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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