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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의 우물과 북장우물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8. 11. 22:24
서울 종로구 명륜동은 조선시대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인 성균관 명륜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성균관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 일정한 자격을 갖춘 유생들이 모여 공자를 받들며 공부하던 곳으로, 쉽게 말하자면 국립 국가고시학원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식으로 문과에 합격하면 곧 고위공무원이 되었던 바, 준(準) 양반 대접받았으며 병역도 면제되었다.

성균관 명륜당 
40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 명륜당 내부 . 공무원 공부를 했을 리는 없겠지만 조선시대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이자 최고의 교육기관답게 왕세자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명륜동 성균관대학 입구의 탕평비는 1742년 3월, 영조 임금이 세자(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하는 시기에 맞춰 유생들에게 당파 싸움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부근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논어> 위정편의 구절을 인용한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스무 자가 적혀 있는데, '두루 통하면서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곧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편당을 지으면서 두루 통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뜻이다.

탕평비각 안의 탕평비 오늘 말하려는 것은 성균관이 아니라 명륜동 일대의 옛 우물로서, 이곳에는 조선시대부터 물이 맑고 크고 깊은 우물들이 있어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 많다. 대표적인 명륜동의 옛 우물과 관련된 마을 이름, 그리고 특징을 열거하자면,
- 명륜동4가 127-8번지 일대의 '깊은 우물골' : 깊이가 약 30척에 달하고 밑바닥이 돌로 되어 있으며 물맛이 아주 좋아 동네 이름까지 '깊은우물골'로 불렸다.

명륜동 깊은 우물골 - 명륜동4가 120번지 일대의 '한우물골' :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줄지 않고 물이 유난히 차가웠던 큰 우물로, 마을 이름인 '한우물골'의 유래가 되었다. 한자어로는 한정동(寒井洞)인데, '한'은 '크다'는 의미이지만 '차다'는 뜻도 있어 혼용된 듯하다.
- 명륜동3가 혜화초등학교 인근의 '웃우물골' : 마을 위쪽에 우물이 있다 하여 '웃우물골' 또는 상정동(上井洞)이라 불렸다.
- 명륜동3가 성균관 동쪽의 '식당우물골' : 성균관 유생들의 식당 부근에 있던 우물이다. 아래 식당교(食堂橋) 자리에서 멀지 않았던 곳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균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유생 식당 
식당교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곳 / 지금의 성균관로 31 부근으로 조선시대 이곳으로 흥덕동천이 흘렀고 그 위에 나무다리가 있었다. - 명륜동2가 21번지 일대의 '궁안우물골' : 조선 20대 왕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의 친정(어유구 집터) 안에 있던 큰 우물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한자어인 궁내정동(宮內井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유구 집터 표석 
그 자리에 구룡관이라는 중식 비스트로가 생겼다. 
어유구 집터 표석 주변 - 명륜동 2가 178-188번지 일대의 '관우물골' : 흥덕동천 관기교(觀旂橋) 아래쪽에 있던 관기다리우물이 변하여 '관우물골', '곤우물골'이 되었다. 관기교는 지금의 대학로 CGV 앞에 있던 다리로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이 다리에서 박석고개를 넘어오는 호위 깃발이 바라다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관기교가 있던 곳 
반대 편에서 찍은 사진 / 바닥의 맨홀 뚜껑을 잇는 선이 흥덕동천이 흐르던 방향이다. - 명륜동2가 127번지 일대의 '산우물골' : 산에서 내려오는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산천동(山泉洞)이라고도 불렸다.
- 명륜동2가 2번지 일대의 '박우물골' : 현재의 창경궁뜰아남아파트 자리에 있던 동네로, 우물이 크고 물이 많아서 바가지로 마음껏 물을 푸었다고 하며, 한자어인 박정동(朴井洞)으로도 불렸다. 우물가에는 박석을 깔아 놓아서 '박우물골'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오늘 찾아 나선 곳은 명륜동에서 와룡동으로 넘어가는 비탈(현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 아래)인 응봉 자락에 있던 북장우물이다. 이곳에는 창덕궁 북문인 북장문(北墻門)이 있는 까닭에 마을 이름은 북장우(北墻隅, 북쪽 담장 구석마을), 이곳의 우물은 북장우물이라고 불렸다. 응봉 자락 아래의 궁벽한 곳에 있어서였는지 명륜동의 다른 우물들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지금껏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학생회관 축대 아래의 북장우물 
이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안내문도 이것이 전부로서, 북장우물이라는 설명도 없다. 
길 바로 건너편에 북장문이 있다. / 북장문과 이어진 담장이 보인다. 창덕궁 북장문 너머는 창덕궁의 후원으로 언뜻 언뜻 태극정과 취규정이 보인다. 하지만 북장문이 폐쇄된 까닭에 이쪽으로는 들어가 볼 수 없는데, 북장문은 아예 주변 진입마저 막아 놔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문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역사적으로는 1884년 12월 6일 오후, 창덕궁을 쳐들어 온 원세개의 청국 군대에 쫓겨 일본공사 다케조에 및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북장문을 통해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이들은 일본공사관에 숨어 있다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고종과 홍영식, 박영교(박영효의 형)도 이곳을 빠져나왔는데, 그때 고종은 인천으로 가자는 홍영식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명륜동 북묘(北廟)로 갔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도망갔던 민왕후가 달고 들어온 무당 진령군의 집이자 관우 사당인 곳이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홍영식, 박영교 외 7명의 하사관들이 북묘에 동행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을 뒤쫓아 온 오조유의 청군(靑軍)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이 데려가려는 고종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며 어의(御衣)를 붙들고 매달렸다. 하지만 고종은 홍영식을 뿌리치고 사인교를 타고 떠나버렸고, 남겨진 두 사람은 청군의 총칼에 7명의 하사관들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됐다. 갑신정변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이났다. 명륜동 북묘에도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먼 저승길에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떠났을 듯해 생각할 수록 안쓰럽기 그지없다.

명륜동 북묘 하마비 / 북묘(北廟)는 명륜동 1가, 옛 홍덕골 일대에 있었다. 현재의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서쪽 부근이다. 
명동 중앙우체국 앞의 홍영식 동상 / 우정총국 초대 총판이었던 까닭에 이곳에 동상이 세워졌다. 
명동 중앙우체국 앞의 반중시위 / 내 경험으로 볼 때 서울에서 가장 시위하기 힘든 곳이다. 바로 뒤에 중국대사관이 있는 까닭이다. 물론 시위대는 그 때문에 이곳에 모인다.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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