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후 1395년 6월 6일부터 한성부라고 칭하고 행정구역을 5부(동·서·남·북·중부) 52방으로 나누었는데, 이 같은 행정구역 체제는 대한제국 말까지 크게 변함없이 이어졌다. 지방은 목(牧)-부(府)-군(郡)-현(懸)으로 나누었는데 이 역시 근대까지 지켜져 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큰 변화가 있었으니 시(市)-군(郡)-동(洞)-리(里)로 바뀌었고 그것이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다.
이렇게 행정구역 체제가 바뀌며 서울의 지명 역시 변화가 있었으니 과거 52방의 지역 명칭은 사라지고, 원남동, 원서동, 낙원동, 관수동, 관훈동, 인사동, 동숭동, 권농동, 통인동, 창성동, 옥인동, 예지동과 같은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데, 오늘 갔다 온 종로구 공평동도 그때 생겨났다. 이곳에 법을 집행하는 의금부(현 SC제일은행 본점 자리)가 있었기에 공평동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했다 볼 수 있겠다.
<금오계첩> 속의 의금 부 그림 / <금오계첩>은 1726년 4월 의금부 관리들의 계회(契會)를 글과 그림으로 엮은 첩이다.SC제일은행 본점 앞의 의금부 터 표석
의금부는 조선 시대에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국가의 중대 범죄와 역모 사건을 조사하고 죄인을 심문하던 국왕 직속의 특별 사법 기관으로 금부(禁府), 금오(金吾), 왕부(王府) 등의 별칭으로도 불려졌다. 그런데 하지만 조선시대 의금부에서 과연 공평(公平)무사하게 법을 집행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예가 지금도 가끔 본 블로그에 올라오는 금부도사의 품계를 묻는 질문이다.
조선후기 의금부의 관료 구성을 보면 종1품 판의금부사가 최고 우두머리로서, 정승이나 판서급 고위 관료가 겸임했다. 그밑으로는 정2품 및 종2품의 지사가 역시 다른 고위직을 겸직하며 의금부의 운영에 참여했고, 바로 아래 정3품 동지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중요 관직을 겸하고 있어 허직(虛職)인 셈이었고, 실제 의금부에 배속되어 권한을 행사한 사람은 도사(都事)였다. 쉽게 말하자면 요즘 말 많은 선관위에 있어 위원장 자리는 기실 법관에게 주어지는 바람막이용 바지사장 자리이고 실제권한은 사무총장이나 처장이 쥐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도사의 정원은 모두 10명인데, 종6품 5명(참상도사)과 종8품 5명(참외도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죄인을 체포하거나 압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흔히 '금부도사'로 불리는 이들은 비교적 하급 관료임에도 왕의 직속 기관이라는 이유로써 예외적 권세가 주어졌다. 예를 들자면 1478년(성종 9) 7월 평안도관찰사(종2품) 이파(李坡)에 대해 직무유기의 혐의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를 붙잡으러 간 금부도사 홍호(洪浩)는 종6품에 불과했지만 이파를 결박해 끌고 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금부도사의 복장 / 고전의상 대여·제작전문업체 '상의원' 제공 사진
내가 아는 한 조선시대 금부도사의 동행 명령을 거부한 사람은 인조 때의 이괄(李适) 한 사람뿐이다. 1624년 1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 앞에 금부도사 고덕률 일행이 나타났다. 지금 한양에서 당신의 아들과 지인인 기자헌 등이 역모 혐의로 잡혀 와 조사받고 있으니 당신도 가서 조사를 좀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괄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으니, "아들이 역적인데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라는 일갈과 함께 금부도사 일행을 죽여버렸다.
곧바로 거병을 한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있는 평양과 다수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안주를 우회하여 방비가 허술한 샛길만을 택해 기동력 있게 남하했다. 이어 예성강 마탄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후 1624년 음력 2월 10일 위풍당당하게 창의문을 통과해 한양에 입성했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 변방에서 거병한 반란군이 한양을 점령한 유일무이한 사례로서, 실감 나는 비유를 하자면 지역 군사령관을 내란 관련 참고인 정도로 체포하려 하자 특검관계자를 총으로 쏘아버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경우로 보면 된다. 요즘은 그런 화끈한 무장이 없겠지만 말이다.
1624년 음력 2월 이괄의 반군이 입성한 창의문
그러고보니 금부도사의 동행 명령을 거부한 사람이 또 있었다. 마탄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했다는 급보를 접한 국왕 인조는 헐레벌떡 숭례문을 빠져나와 공주 공산성을 향해 출발했는데, 그에 앞서 조정에서는 적과 내통할 염려가 있다며 이괄의 친족 및 기자헌 외 37명의 주살을 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비명횡사했지만 반군이 가까워왔음을 인지한 기자헌의 친척들은 극렬히 저항했던 바, 그들을 처치하러 갔던 금부도사 윤유길이 오히려 도망쳐 나와야 했다.
하지만 이상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순순히 붙잡혀 와 고신을 당하고 유배를 가거나 참형에 처해졌다. 붙잡혀 온 자들을 추국하는 자는 20여 명의 서리(書吏)와80여 명의 나장(羅將) 등 하급 관속들이었는데, 이들 또한 권세가 대단했다. 그리하여 죄인의 가족들에게 뇌물을 받고 형을 살살 집행하거나 불법적으로 수감자와 가족들과의 면회 및 내통을 주선하며 뇌물을 챙기기도 했다. 아울러 상서원 발행의 마패를 들고 다니며 역(驛)의 역리들에게 물자와 편의를 요구하는 횡포를 부리는 등 목불인견의 꼴값을 떨었다.
조선초기의 목패(나무 마패)와 마패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지가 <세종실록> 세종 15년 윤8월 기사에 실려 있다. 그곳에는 세종임금이 들은 일화가 적혀 있는 바, "우리나라 관리가 사헌부에 임명되면, 의금부의 옥졸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비록 사헌부에 앉아 있지만 내일은 반드시 하옥되어서 우리들의 제재를 받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나장의 위세가 대단하다 보니 일반인들이 의금부 나장을 사칭하는 범죄가 종종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 전해지는 나장의 복장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Grassi Museum für Völkerkunde zu Leipzig) / 1883년 묄렌도르프가 수집한 조선시대 식생활 도구와 의복, 공예품 등 한국 문화재 다수가 소장돼 있다.사극 속 나장의 모습은 위 복장을 근거로 재현됐다.
말하자면 의금부 하급관리의 전횡이 임금을 걱정케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니, 이는 청와대 실무진이 선출직 공직자나 행정기관, 혹은 국민을 상대로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작금의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얘기하기가 좀 불편하니 어제의 일을 과거 기개 있던 시절의 <동아일보>에 실린 김성환 화백의 4컷 만화로 대변하고자 한다.
경무대(구 청와대)의 끗발을 풍자한 '고바우 영감'공평동 견평방 일대의 발굴 유적을 전시 중인 공평도시유적전시관13호 건물지14호 건물지골목길 □자 집15호 건물지7호 건물지11호 건물지 우물발굴된 생활 유물의금부와 인접했던 수동 집과 금부동 집수동 집과 금부동 집 안내문복원된 16세기 견평방 한옥의 모습이문안 길 석축공평빌딩 건립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