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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인사동 핏맛골에서 발견된 수수께끼 유물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8. 14. 19:29

     

    앞서 조선시대 종로 일대의 뛰어난 배수로 시설을 설명하며 인사동 배수로에 연접한 '금속활자가 발견된 집'을 소개한 바 있다. 2020~2021년 종로구 인사·공평동 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과정에서 발굴된 양반가의 하나로, 이 안에서는 세종 대의 갑인자(1434년), 세조 대의 을해자(1455년) 등 조선초에 제작된 귀중한 금속활자가 다량 발견되었데, 바로 옆에서는 동종(銅鐘)의 파편도 나왔다. 지난달 7월 15일 개관한 인사동 인사도시유적전시관에는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전시 중이다. 

     

     

    재현된 발굴 당시의 모습
    출토된 갑인자
    출토된 을해자
    1455년(세조 1) 을해자로 찍어낸 <두씨통전/杜氏通典>

     

    함께 발견된 종은 1535년(중종 30)에 제작된 구리로 만든 종으로, 불교 의식이나 사찰에서 시간을 알리고 대중을 모으는 불교 의식용 타종의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발굴 위치로 보아 이 종은 아마도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에서 사용한 종이 수습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원각사는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이 절을 기방인 연방원(聯芳院)으로 바꾼 후 승려들을 쫓아내고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발견된 동종에는 가정(嘉靖) 14년 4월(1535년 4월)에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조금 당혹스럽다.(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 만일 이 동종이 원각사에서 사용된 것이라면 원각사의 폐사 원인은 기존에 알려진 위의 사실보다 명종 때 유생들이 불을 질러 대규모 화재가 발생된 후 폐사되었다는 야사가 더 정확할 듯하다. 즉 유생들은 명종 9년인 1554년 현 덕수궁 자리에 잔존하던 흥천사 사리전에 불을 질러 흥천사를 완전히 태워버리고 이 즈음 원각사도 태워 폐사시켰던 것이다.   

     

     

    복원된 동종
    동종의 명문
    탑골공원 내의 원각사비 / 1467년(세조 13) 13층 탑을 완성한 후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한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이 비는 1471년(성종 2)에 건립되었다.

     

    이곳에서 함께 발견된 수수께끼의 유물도 화제였다. 당시 금속활자가 담긴 항아리와 동종 파편 옆에서는 전혀 용도를 알 수 없는 조각 난 여러 개의 구리 금속편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이 출토품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물이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발굴팀은 이 조각들을 이어 맞춘 결과 일정한 눈금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과학 기구라고 생각한 발굴팀은 과거 혼천의를 복원한 바 있는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발굴 당시의 사진
    확대한 사진
    조립 후 모습

     

    이 명예교수는 그것이 세종 때 제작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것을 확인한 후 실물을 직접 본 데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만들어냈지만 밤에는 해가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이에 별을 보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라고 명했던 바, 그 결과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가 되는 멀티워치 일성정시의가 완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 밤낮으로 기상 상태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해 이름을 '일성정시의'라 했는데, 이를 완성해 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아울러 세종 당시 모두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전해지는 실물은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발견된 것이었다. 

     

    이 명예교수는 "일성정시의는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을 한 눈금씩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4년에 한 번씩 1일을 추가하지 않고도 윤일 오차를 방지했다. 당시 조선에서 정밀하게 365와 4분의 1도만큼 정밀하게 눈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구다"라며 극찬했는데, 일성정시의를 본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 교수 역시 "서양에도 없는 과학기구"라며 놀라 마지않았다는 후문이다.

     

    발견된 세 개의 고리, 즉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별의 이동을 측정하는 고리) ·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 해시계용 고리) ·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별시계용 고리)은 아래 <세종실록>의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바퀴의 윗면에 세 고리[環]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 · 일구백각환 · 성구백각환이라 한다. 그 주천도분환은 밖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돌며, 밖에 두 귀[耳]가 있는데 지름은 두 자, 두께는 3분, 넓이는 8분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데에 있어 돌지 아니하고, 지름은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밖의 것과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 있어 움직이고 돌며, 안에 두 귀가 있는데, 지름은 1척 6촌 8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안팎 고리와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세 고리의 위에 계형(界衡)이 있으니.... 

     

     

    '일성정시의' 주천도분환 눈금 / 발견 당시의 사진이나 그때는 이것이 '일성정시의'의 부품인지 알지 못했다.
    인사도시유적전시관에 복원된 '일성정시의'
    '일성정시의' 안내문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설명문
    '일성정시의'의 사용법

     

    부근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금속 유물은 총통이다. 조선은 국초(國初)부터 화약무기인 총통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1445년(세종 27)에는 대규모 총통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총통부대에 대한 설명이 <세종실록> 등에 자세하다. 인사동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총통은 소형 화기인 승자총통 1점과 소승자총통 7점으로, 승자총통에는 '계미' 글자가 새겨져 있어 158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소승자총통에는 '만력무자'의 글자가 있어 1588년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1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임진왜란에서는 승자총통과 소승자총통이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은 위 유물에서 알 수 있듯 국초 이후 줄곧 실사구시의 학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차츰 실사구시는 후퇴하고 무익한 성리학만이 판을 쳤고, 그 위에 당쟁으로 반반(半半)이 나뉘어 싸우는 통에 모든 것이 퇴행하고 말았다. 이에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만일 총통부대만 여하히 유지되었어도 왜군의 신형무기 조총에 그렇듯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까지 총통부대가 운영되었다면 조총을 앞세워 쳐들어 온 왜군은 얼마나 놀랐을까? 전에도 말했지만 조선의 총통부대와 일본의 조총부대가 총격전을 벌이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으니, 조선은 횡횡한 왜군의 침입 소문 앞에서도 대비할 생각은 않고 당쟁을 벌이기에 바빴다. 그렇게 반으로 나눠 싸웠던 꼴은 지금의 대한민국과 매우 흡사한데, 이재명 좌파 정권이 들어서며 급격히 위축된 방산 산업 역시 그러해 여러 가지로 걱정됨이 한량없다.  

     

    * 1차 진주성 전투와 행주산성 전투 때 승자총통 부대가 등장한 기록이 있고 그때 조선군이 승리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총통부대가 활약한 적은 없었으니 임진왜란에 앞서 총통부대는 기술적 전술적으로 퇴행한 듯싶다. 하지만 화포는 계속 쓰였던 바,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이었던 이유도 왜군이 보유하지 못한 화포에 기인했다. 비록 명중률이 떨어져도 근접전에서 방포하면 일본 배는 여지없이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출토 승자총통(맨 아래)과 안내문
    출토 소승자총통과 안내문
    전쟁기념관의 승자총통과 소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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