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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I) - 또 다른 베들레헴 설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19. 12. 16. 23:59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인류의 오래 전부터의 숙제였다. 그래서 이를 풀려고 하는 노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나 역시 그 문제에 주목해 작년 이맘때 쯤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했었다.(☞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I, II, III') 하지만 지금껏 '어디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부각되지 않았다.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성서에 명기돼 있는 명약관화한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퀴리니우스)가 수리아(시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복음 2:1-7)



    이상은 성서에 언급된 예수 탄생 시기에 관한 유일한 기록의 전문일 뿐더러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령을 내렸고, 이에 요셉과 그의 정혼자인 마리아도 남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갔는데, 마침 인구조사령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여관이 만원이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마굿간에서 출산했다는 것! 이것이 누가복음이 말하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게 된 이유이다.


    인구조사령을 내린 아우구스투스

    윗글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메시아가 출생할 것이라는 미가(5:2)의 내용 및 황제의 인구조사령으로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게 된 누가복음(2:1-5)의 내용을 근거로서 크리스마스를 성스러운 날로 규정하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령, 즉 켄수스(Census)를 시행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살펴보자면 그 시기는 다음과 같다.
     

    1> 옥타비이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아그립파가 집정관이었던 BC 28년.

     

    2> 가이우스 켄솔리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가 집정관이었던 BC 8년.

     

    3>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가 집정관이었던 AD 14년.


    * 로마시대에는 현대와 같은 편년체 역사 기술이 없었고 '누구 누구가 집정관이었던 해'라는 식으로 역사 기술을 했다. 어떤 사건이 어느 집정관의 통치 시절에 있어났는가를 기록한, 이른바 '집정관 연대 산정법'의 역사 서술이다.



    예수의 탄생 연도는 위 3개 중 하나를 골라 유추되었는데, 이중 기원전 28년은 일찌감치 배제되었지만 기원전 8년과 서기 14년은 지금껏 공박중이다. 우리가 예수의 출생연도로 알고 있는 기원전 6년이나 기원전 4년은 <2번>에서 도출한 것이니 중앙 로마의 인구조사령이 로마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타인까지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을 감안한 결과이다.(나는 나름대로의 근거로서  BC 5년으로 정했다.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I') 예수의 탄생 시기는 지금도 이렇듯 가변적이지만 그 장소만은 불변이다. 유다 지방의 베들레헴이라 불린 작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이 결코 철옹성은 아니니 합리적 사고를 가진 이들에 의해 다음의 것들을 의심받아 왔다.


    1> 예수 탄생이 기록된 신약의 두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서는 왜 인구조사령이 언급되지 않는가?(⇒예수는 인구조사령에 의한 여행 중에 출생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2> 호적 신고를 위해 고향으로의 천리 길을 떠나야 하는 인구조사 방법이 현실적으로 타당한가?(⇒요셉 식구뿐이 아닌 로마제국 전 백성의 대규모 인구이동을 상상해보라)


    3> 예수의 산실이 누가복음에서는 '마구간'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집'이다. 이 임팩트 있는 공간이 마태복음에서는 왜 생략되었는가?


    이중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당연히 <2번>이다. 당장의 생업을 뒤로 하고 원적지(原籍地)에 가서 호적 신고를 해야 하는 인구조사의 방법에 전혀 설득력이 실리지 않는 까닭이다.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요셉이 만삭인 여인을 대동하고 175km(직선거리 120km)나 떨어진 베들레헴까지 며칠을 이동해야 했던 것은 그의 조상이 다윗 왕이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의 고향이 베들레헴 에브랏이므로(사무엘상 17:12) 원적지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던 것이다.(그외는 다른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인구조사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요셉의 천 년 전의 조상인데, 오로지 그 때문에 원적지인 베들레헴 주민센터로 간다는 것은 경주 김씨인 내가 인구조사를 위해 천 년 전의 조상이 살았던 경주로 내려가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을까? 그저 가까운 관공서에 가서 하면 되지 않았을까?(나의 경우는 동네 주민센터나 구리 시청에 가면 될 일이다. 물론 요즘에는 인구조사원이 가가호호 방문을 하므로 그럴 필요도 없지만)


    베들레헴까지 며칠을 걸어야 했겠지만 그나마 요셉의 경우는 다행스러운 경우였으니, 만일 유다 땅에 살던 어떤 사람의 고향이 루지타니아(지금의 포르투칼)의 리스본이라면 그는 아마도 몇 년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인구조사의 집계는 불가능했을 것이니 켄수스를 해야 할 이유마저 의심스럽게 된다.(그 사람의 먹고 잘 방법도 괜히 걱정된다. 그도 만일 요셉처럼 배우자 혹은 자식이 딸렸다면.....? 이건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게다가 그가 만일 출산이 오늘내일하는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호적 신고를 하러 떠난 미련퉁이라면 더욱 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저러한 경우를 대입해 요셉이 행한 켄수스의 허구성을 증명할 필요는 사실 없다. 무엇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로마는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나라였다는 것을 상기하자)


    따라서 위 누가복음의 내용에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의 구절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누가복음서의 저자가 이같은 무리수를 둔 건 예수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가 비록 미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요셉은 본래 이스라엘 왕가의 자손, 그것도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사실 예수는 요셉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자도 마찬가지이다.(마태복음에도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의 아비 요셉으로 이어지는 장황한 족보가 실려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령 대신 동방박사라는 신 스틸러가 등장해 아기 예수의 행방을 쫓는데, 이때도 그들이 찾아간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다만 마구간이 아닌 '집'이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복음 2:8-11)


    그렇다면 이제 슬슬 결론을 내보자. 그 결론이란 당연히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먼 베들레헴까지 가지 않고 호적 신고를 할 수 있는 다른 적절한 장소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누가복음의 내용과 마태복음의 내용이 합치되면 더욱 좋을 것이다.(원래 구조적으로 완벽히 합치될 수는 없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이 본래 나사렛 마을에서 살았다고 하고, 마태복음에서는 그곳에서 살지 않다가 헤롯 아켈레오가 죽은 후 이사왔다 하므로 이를 합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


    최근 그에 합당한 장소를 찾았다.(솔직히 작년에는 몰랐었다) 그들이 호적 신고를 한 곳은 일대를 관할하는 호적 신고소가 설치된 스불론 지파의 성읍 베들레헴으로,(여호수아 19:15) 그들이 살던 나사렛 동네에서 북서쪽으로 10여 km 떨어진 곳이었다.(공교롭게도 그 이름이 같은 바, 학자들은 흔히 갈릴리 베들레헴 Bethleham of Galilee이라 칭한다) 그 거리가 그들이 살던 나사렛으로부터 반나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호적 신고를 하러 갔다가 진통이 왔던 것이고, 이후 어느 집의 마구간에서 출산을 하게 되는 것은 기존의 전승과 이하동문이다.


    갈릴리 베들레헴과 유다 베들레헴의 위치



    갈릴리 베들레헴에서 출토된 예수 시대 등잔


    갈릴리 베들레헴의 비잔틴 시대 교회 흔적

     

    갈릴리 베들레헴에서 발견된 인장
    베들레헴의 지명을 추정할 수 있는 2,700년 전의 점토 도장이다.

     

    갈릴리 베들레헴 마을 풍경


    갈릴리 베들레헴의 마을 회관


    갈릴리 베들레헴의 급수탑

     

    두 개의 베들레헴

    나사렛에서 굳이 아래 베들레헴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여관주인의 또 다른 궁금증

    임신 9개월의 여인을 나귀에 태우고 175km를 온 남자에게 여관주인이 묻는다.

    "뭐라고요? 갈릴리에서....? 당신 제 정신이오?"



    *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II) - 나사렛 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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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