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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 뒤편으로 사라진 마이클 콜린스 & 인저뉴어티의 비행
    거꾸로 읽는 천문학개론 2021. 4. 30. 23:57

     

    엊그제 28일(현지시간)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였던 마이클 콜린스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1969년 7월 21일, 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으로 닐 암스트롱, 버드 올드린과 함께 달에 갔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달 표면에 내리지 못하고 컬럼비아호를 타고 달 주위를 선회해야 했다. 달 탐사를 마치고 이륙할 이글호와 도킹한 후 그 안에 탄 두 우주인들과 함께 지구로 돌아오는 것이 콜린스가 맡은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역사적 사진을 앞서 '달착륙 음모론 중 해결되지 않은 단순한 의문 하나'에 실은 바 있다.

     

     

    컬럼비아호에서 분리된 이글호가 달 표면에 접근하는 역사적 광경이다.
    사령선 컬럼비아호와 이글호의 분리 상상도

     

    그래서 이때 사령선에 홀로 남은 마이클 콜린스의 외로움을 누군가 이렇게 묘사했다.

     

    우주 비행사 마이클 콜린스의 임무 
     
    그는 항상 우주선 컬럼비아호를 조정한다.
    이번 여행에서 달 표면을 밟지 않게 될 유일한 우주 비행사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 착륙선 이글호를 달 표면에 내리는 동안 컬럼비아호를 타고 달 궤도를 돈다.
    만약 이글호가 달에서 이륙하는 데 실패하면 그는 혼자 컬럼비아호를 조종해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


    - 베아 우스마 쉬페르트(Bea Uusma Schyffert) 《달의 뒤편으로 간 사람》 中

     

    실제로 당시 궤도 비행을 하던 사령선이 달의 뒷면으로 들어갔을 때 지구와의 교신은 끊겼고, 콜린스는 48분간 달 뒷면을 바라보며 절대 고독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때 콜린스는 "이곳을 아는 존재는 오직 신과 나뿐이다. 온전히 홀로 있는 이 순간이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다"는 당시의 심정을 역설적으로 읊은 메모를 남겼고, 누군가는 또 "아담 이래로 누구도 콜린스가 겪었던 고독을 알지 못한다"라고 기록했다.

     

    마이클 콜린스와 그에 관한 책

     

    그래서 그는 동료인 암스트롱이나 올드린과 달리 달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유로서 '잊힌 우주비행사', '기억하지 않는 세 번째 우주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달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인류 닐 암스토롱이 남긴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이것은 한 사람에게는 단지 조그만 한 발짝에 불과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하나의 큰 도약이다)라는 메시지는 명언이 되었으나 베아 쉬페르트가 위의 책을 쓰기 전까지 코린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개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잖았다. 대표적으로는 빌 케이싱 같은 사람으로, 그는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은 날조된 것이라는 주장을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이 귀환한 얼마 후부터 퍼부어대기 시작하더니 1976년에는 급기야 '우리는 달에 간 적이 없다'(We Never Went to the Moon: America's Thirty Billion Dollar Swindle)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음모론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1960년대 미국은 달착륙 임무를 수행할만한 기술이 없었다는 것으로, 달착륙은 소련과 우주 경쟁을 하던 미국 정부의 거대한 연출이라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우리는 달에 간 적이 없다'
    conspiracy theorist 빌 케이싱은 본래 NASA와 계약을 맺은 언론 홍보 회사의 기자였다. 그는 지난 2005년 작고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어릴 적 만화가게 TV에서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착륙을 지켜본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달착륙이 연출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빌 케이싱이나 짐 콜리어의 주장과는 별개인 나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달착륙 조작설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번에 또 하나 그것에 보탤 거리가 생겼다. 앞서 '퍼서비어런스 화성 착륙과 아폴로 우주선 달착륙 비교'에 쓴 내용과 같은 맥락의 것으로, 이번에는 지난 26일 인저뉴어티(Ingenuity)의 3차 비행 시험 과정을 지켜보며 든 생각이었다. 

     

    '독창성'이라는 뜻의 인저뉴어티는 화성탐사선 퍼서비어런스호에 딸린 초소형 무인(無人) 헬리콥터로서, 지난 19일 오후 4시 30분(한국 시각, 화성 시간 오후 12시 30분) 화성에서의 첫 시험 비행에 성공한 데 이어,(당시 40초 동안 3m까지 상승했다가 내려왔다) 22일 2차 비행에서는 5m 높이까지 올라가 52초 동안 하버링(제자리 비행)한 뒤, 동체를 5도 각도로 기울여 2m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난 25일 3차 비행 시험에서는 탐사로봇 로버로부터 85m 떨어진 위치에서 5m 상공으로 올라가 수평으로 50m를 이동한 후 이륙 지점으로 돌아왔다. 왕복 비행 거리는 100m, 비행시간은 80초였다.

     

     

    인저뉴어티의 1차 비행
    인저뉴어티의 2차 비행
    인저뉴어티의 3차 비행
    인저뉴어티가 찍은 로버 (큰 사진 왼쪽 모서리가 로버이고 가운데는 확대 사진이다)

     

    지난 19일 오후, 인저뉴어티 1차 비행 때의 뉴스는 떠들썩했다. 지구 외 다른 천체에서의 첫 비행이라는 역사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로 다른 천체에서의 첫 비행일까? 그렇다면 1969년 7월 21일의 달 표면에서의 비행은 무엇일까? 물론 화성과 달은 중력과 대기밀도가 다르고 비행에 이용된 동력도 다르니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행거리를 보자면 인저뉴어티는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달 표면과 컬럼비아호까지의 거리는 어느 자료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이글호는 적어도 수백 미터는 날았다.(반면, 앞서 말한 대로 인저뉴어티의 비행은 40초 동안 3m를 상승했다가 내려온 것이 전부였다)

     

     

    달 표면의 이글호
    이글호의 이륙 상상도
    이글호와 컬럼비아호의 도킹 상상도. 이후 이글호의 두 우주인은 컬럼비아호로 옮겨탄다.

     

    그때는 이상의 장면을 의심 없이 믿었으나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스토리다. 위의 그림은 상상도이지만 실제로 이글호의 동체는 그렇게 달 표면을 이륙해 고독하게 달 주위를 선회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의 컬럼비아호와 도킹했다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기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들은 그 후 어떻게 지구로 돌아왔을까? 그들 3인의 우주인들은 컬럼비아호를 타고 지구로 되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1865년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이 쓴 <달나라 여행'(De la terre à la lune)>의 내용과 진배없는 스토리다.* 

     

    * 270m의 초대형 대포를 이용해 달로 유인 우주비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로켓이 제대로 실용화되기도 전에 쓰인 것인데도, 작중에 나오는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여러 가지 이론은 나중에 아폴로 계획상의 것과 비교해 봐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엄밀한 과학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발사 시에 지구 자전 속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미국 영토에서 최대한 위도가 낮은 지점에 대포를 설치하는데, 소설 상의 위치가 실제 케네디 우주센터와 거의 같고, 소설에서 포탄의 궤도가 아폴로 계획의 궤도와 거의 일치하는 등.

     

    다만, 실제로 거대한 대포를 달에 대고 쏜다면 그 포탄에 있는 사람은 엄청난 압력으로 죽게 될 터인데, 소설에서도 나무와 물 등으로 몇 겹의 완충장치를 하고도 충격을 다 흡수하지 못해 등장인물들은 한참 기절해있고, 탑승한 개 한 마리도 두개골이 깨져 죽고 만다. <위키백과> 

     

     

    '달나라 여행' 영역본

     

    하지만 문제는 그보다도 그렇게 힘들게 얻은 달나라 티켓이 '원 웨이 티켓'이라는 점이다. 갈 수는 있어도 돌아올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아폴로 우주선도 마찬가지였으니 아폴로 11호 우주선은 1969년 7월 16일 13시 32분 0초,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를 아래와 같이 요란하게 출발해  발사 후 109시간 10분 35초 만인 7월 21일,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다. 그리고 2시간 30분 동안의 달 탐사 임무를 마친 후 7월 24일 16시 50분 35초에 지구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올 때는 달에 갈 때의 엄청난 추진 연료를 실은 로켓이 아닌 위에서 보는 컬럼비아호가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을까? 이번에도 기적적으로 이룬 성공일까?  

     

     

    발사되는 아폴로 11호
    지구로 돌아오는 아폴로 11호의 사령선
    최종 캡슐 분리
    낙하
    그들은 이렇게 지구로 귀환했다. 착륙 위치는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8시 방향으로 1500km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로, 미 해군 항공모함 USS 호넷이 그들을 맞았다.
    닉슨 대통령이 나가 직접 그들에게 환영 인사를 했고, 달에서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2주일 동안 격리된 후 열광적인 환영행사에 초대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좌로부터 버즈 올드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그래서 1969년 8월 12일 휴스턴 공군기지에서의 인터뷰 사진들에 대해 어떤 분석가는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Below a picture of the Apollo 11 Post Flight Press Conference, just when in the beginning the 3 “heroes” are presented – or do they rather look like accused and feeling guilty?
    "이 3명이 '영웅'으로 불려지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비난받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입니까?"
    아폴로 11호의 선장이자 달에 첫 발을 디딘 최초의 인류 암스트롱은 영웅 대접을 받았음에도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본래 과묵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달 탐사 이후엔 “염세적 성격으로 변했다”는 말도 나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원치 않았던 그는 항공우주국(NASA) 내근을 택했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고, 암스트롱은 결국 고향 오하이오로 돌아가 작은 농장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201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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