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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주의의 창시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미학(美學) 2022. 3. 18. 05:23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인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展」(4월 17일까지)이 날벼락을 맞았다. 3월 17일, 그림을 대여해 준 러시아측에서 이번 달 안으로 빌려간 그림들을 모두 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고 유례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유는 명료하다. 지금 한창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싸움에서 우리나라가 미국편을 들어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한 죄(?)를 물은 것이다. (이리저리 빼며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난처하게 됐다)

     

    신드롬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전시회는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꽤 화제가 되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러시아 현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대거 몰려왔기 때문이니,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시리즈,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등은 너무도 유명한 그림으로, 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대작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미하일 라리오노프, 나탈리야 곤차로바, 블라디미르 타틀린 등도 20세기 초 혁명의 시기에 새로움을 추구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대표 작가들이다.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딘스키의 '즉흥' (1913년) / 연해주 국립미술관
    칸딘스키의 '즉흥 No. 217 회색타원' (1917년) /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모서리 역부조' (1914년) / 국립 러시아 미술관
    로드첸코의 '비구상적 구성' (1919년) /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1915년) /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은 단연 말레비치이다. 그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하고, 그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의 제목을 빌려 '절대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마어마 한 작품값으로 더 유명하다. 아래 1916년작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6000만 달러(약 706억원)에 낙찰돼 러시아 미술 작품 중에서는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그림은 2018년 다시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와 8580만 달러(약 1015억원)에 판매되어 기록을 경신했는데, 엊그제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사상 두 번째 고액으로 낙찰돼 화제가 된 <빛의 제국>(약 7980만달러/957억원)과 비교해보면 말레비치의 그림이 얼마나 고가인지 알 수 있다. (☞ 르네 마그리트와 '빛의 제국')

     

     

    '절대주의 구성 회화' / 캔바스에 유화, 88.7 X 71.1 cm.

     

    하지만 이 고가의 작품도 그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에는 못 미친다. 말레비치는 1915년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 하나만을 그려 넣은 그림 <검은 사각형>을 들고 나와 미술사의 새로운 장르를 예고했다. 당시 이 그림은 뒤샹의 변기 <샘>에 버금가는 충격을 주었는데, (☞ '초현실주의 화가 뒤샹 ·달리·미로· 마크리트') 뒤샹의 그것으로 다다이즘이 시작됐듯,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으로 절대주의(쉬프레마티슴 Suprematism/Супрематизм) 미술 시대를 열었다.

     

     

    '검은 사각형' / 2015년 이 그림 밑에서 말레비치가 먼저 그렸던 그림 2점이 X선 촬영으로 발견돼 다시 화제를 모았다.
    카지미르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8-1935)

     

    <검은 사각형>은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최초의 완전한 추상으로서 세계 미술사에서 혁명적 전복을 기도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의 <검은 사각형>은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트리치아코프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이 작품은 아직까지 경매시장에 나온 적이 없어 그 가격을 가늠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 돈 1조 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리치아코프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검은 사각형'

     

    아무튼 그와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이번에 철수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말레비치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화가이다. 그는 독일로 이주해 서구미술사에 편입된 칸딘스키와 다르게 러시아에 남아 작품 활동을 했다. 까닭에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유일한 예술 형식으로 강요했던 스탈린 정권 아래서 억압받았다. 스탈린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퇴폐예술로 낙인찍었고, 그의 작품들은 지방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말레비치는1935년 5월 15일 레닌그라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작품이 빛을 본 것은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숨어 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이 서유럽으로 진출한 후였다. 그중에서도 말레비치의 등장은 그때까지도 2류로 평가받던 러시아 미술을 일약 서구 미술계 거장들의 작품과 어깨를 견주게 했다. 지금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순위 30위 안에 들어 있으며,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전부 상위권이지만 말한 대로 인생 자체는 기구했다.

     

    암 투병을 하던 그는 죽음에 앞서 검은 사각형과 검은 원형이 주검에 걸리는 장례식을 기획했는데, 화가 이순형은 이것을 '스탈린 정부에 대항하는 작가의 소심한 반항이 새겨진 슬프고 아픈 장례식'이라고 평했다.  

     

     

    말레비치가 준비한 관과 그의 장례식

     

    ~ 문득 해방 전후 한국 리얼리즘 미술을 이끌다가 월북한 이쾌대(李快大, 1913-1965)가 떠오른다. 그는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끌며 북한 미술을 선도했지만,(어쩌면 그의 예술세계와 더 맞았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월북했던 친형 이여성의 숙청과 함께 스러져간 듯하니 1950년대 이후로는 활동이 끊겼다. 1965년 자강도 산간 지역 강계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최근 '물방울 화가' 김창렬(1929-2021)의 스승이 이쾌대였다는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그림값이 평가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김창렬은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몇 안 되는 대한민국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쾌대의 '군상 II' (1948년) / 캔바스에 유화, 130 X 160 cm.
    이쾌대의 '자화상'
    김창렬의 '물방울' (1977년) / 서거 직후인 2021년 2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10억 4,000만원에 낙찰돼 작가 최고가를 경신했다.
    김창렬의 'CSH' (1978년) / 2021년 5월에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이 그림이 경합 끝에 약 14억3,000만원(985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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