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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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안개'작가의 고향 2022. 5. 4. 06:51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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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빈 집'작가의 고향 2022. 5. 2. 05:33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1989년 3월 7일이니 벌써 33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질투는 나의 힘 / 안개 / 노을 / 엄마 걱정 / 고독의 깊이 등은 유튜브 시낭송으로서 엄청난 조회수를 보인다. 장미빛 인생 / 봄날은 간다 / 빈집 / 질투는 나의 힘 등은 영화로 다시 태어났으며, 그의 유고 시집 은 지금도 잘 팔린다. 지금껏 대한민국에 이런 시인은 없었다.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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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추천사를 쓰지 않은 <마광수 시선>작가의 고향 2022. 4. 20. 05:03
검사는 사라가 자위행위를 할 때 왜 땅콩을 질(膣) 속에 집어넣었냐고 다그치며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으므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재판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어내려고 애쓰며 피고에게 딸이 있으면 이 소설을 읽힐 수 있겠냐고 따진다 내가 ‘가능성’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을까 또 왜 아들 걱정은 안 하고 딸 걱정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왼쪽 배석판사는 노골적으로 하품을 하고 있고 오른쪽 배석판사는 재밌다는 듯 사디스틱하게 웃고 있다 포승줄에 묶인 내 몸의 우스꽝스러움이여 한국에 태어난 죄로 겪어야 하는 이 희극이여 - 「사라의 법정」 전문 앞서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에서 말한 것처럼 마광수는 1992년 소설 를 출간한 후 운명이 바뀐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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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작가의 고향 2022. 4. 19. 06:59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그녀의 찢어진 입술 그녀의 찢어진 눈꼬리 그녀의 찢어진 미니스커트 그녀의 찢어진 청바지 아아아 찢어진 거미줄 찢어진 신문지 조각 찢어진 나방의 날개 찢어진 북어의 살점 오오오 너무 길게 길러 찢어진 그녀의 손톱 너무 꽉 조여매 찢어진 그녀의 코르셋 너무 무거운 귀걸이를 달아 찢어진 그녀의 귓불 너무 순정을 지키다 찢어진 그녀의 정조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앞서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에 관해 쓰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라는 조사 결과를 소개한 바 있다. 이에 반해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물론 이에 관해 조사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만일 조사를 한다면 고(故) 마광수 교수가 순위에서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증적으로 그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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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석문(石門)작가의 고향 2022. 4. 11. 23:59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려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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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작가의 고향 2022. 3. 29. 23:58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는 2020년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인 1위로 꼽혔다. 그래서 윤동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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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아침'과 '날개'작가의 고향 2022. 3. 28. 07:04
아침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肺壁)에 끄름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어오기도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한 결론 위에 아침 햇살이 자세히 적힌다. 영원히 그 코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이상(李箱)은 1910년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태어났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 고급주택가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날 때부터 모던보이였던 셈이다. 그러나 부자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살았는데 구한말 황실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던 아버지 김연창이 손가락이 절단되어 퇴직한 후로는 가난과 친근해졌다. 이에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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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작가의 고향 2022. 3. 27. 23:0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